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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백제 30대 국왕] 무왕(武王, 600~641)

by [수호천사]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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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30대 국왕] 무왕(武王, 600~641)

 

  • 재위 : 600년 ~ 641년 3월(음력)
  • 출생일 : 580년
  • 사망일 : 641년 3월(음력)

 

무왕(武王)의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출생지는 전라도 익산이다.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위덕왕의 서자라는 설이 존재한다. 재위 기간 신라에 공세를 취하는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중립 외교를 펼쳤다.

 

왕권 강화를 위해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에 백성을 징발하여 사비궁을 중수하였으며 익산에 별도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인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지원으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했다.


[출생의 비밀]

 

법왕 서자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는 설이며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이와 달리 위덕왕의 아들설이 있다. 삼국사기의 주장과 달리 북사에 근거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외에 금강의 과부가 검은 용과 정을 통해서 무왕을 얻었다는 설과 무왕이 궁 밖에서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진사왕 후손설도 있다. 이것은 1398년 일본 규슈의 영주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정종에게 자신의 조상이 부여명농의 셋째 아들 부여의조라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오우치 씨의 족보를 보내면서 새로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진이왕은 백제 16대 진사왕의 아들인 진손왕의 현손이다. 그러나 해당 족보는 직계가 아닌 왕계상 계승을 나타내고 있어서 정말 그가 무왕의 아버지인지는 논란이 많다.

 

그 밖에 방계왕족 귀실씨설(문주왕 후손설)이 있다. 노중국 계명대학교 교수가 주장한 설로 위의 삼국유사기사 외에도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지명에 아버지인 의자왕, 할아버지인 무왕의 이름만 있고, 당시 일반적인 귀족 묘지명과 달리 증조부의 이름이 없는 점을 근거로 무왕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귀실씨인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점을 들어 무왕도 방계 왕족 귀실씨의 일원이었으나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여씨로 환원했다는 설이다.

 

동성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4933월 동성왕(東城王)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이다.'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름으로 '말다(末多)'라는 이명도 나왔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딸이 둘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동요>에 나오는 진평왕 셋째딸 설은 일연만 주장하는 여자다. , <서동요>에서 '마동' 혹은 '서동''모대', '마모', '말다'가 이름인 동성왕이고, <서동요>는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의 혼인 설화가 가계 전승 및 우상화 차원에서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 밖에 고조선 준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602년]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관륵(觀勒)을 왜에 파견하여 천문ㆍ책력ㆍ지리ㆍ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

 

[608년]

 

당시 왜국과는 의외로 관계가 안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스이코 덴노 16(608) 6월 조에 따르면 수나라에 갔던 왜국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 양광이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국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10월에서 615년 사이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무왕의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무왕 초기에 백제와 왜의 관계가 굉장히 안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611년]

 

10월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여 100여일만에 빼앗았다.

 

[616년]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23년]

 

가을에는 늑노현(勒弩縣)을 침범하였다.

 

[624년]

 

한편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630년]

 

사비궁을 화려하게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되었다.

 

[633년]

 

음력 8월 서곡성(西谷城)을 점령하였다.

 

[634년]

 

왕흥사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막대한 인력을 징발하여 전라도 익산에 미륵사를 조성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시도했다. 비록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약화된 왕권이 무왕 때 다소 회복되었다. 이는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636년]

 

5월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641년]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당 태종은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고 한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무왕의 능을 통해 그가 익산 태생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산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미륵사지 서탑 해체]

 

20091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화 공주와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당대 왕들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족관계]

 

  • 부친 : 법왕 혹은 진이왕
  • 왕후 : 사택왕후, 선화공주
  • 자녀 : 의자왕, 교기, 부여새상(扶餘塞上, 일본서기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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