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970년 2월 1일】
- 소식통에 의하면, 주한민군지원부대의 감축개시를 명확히 했다. 그 수는 이미 600여 명.
【1970년 2월 2일】
- 윤보선 전대통령, 신민당을 탈당.
【1970년 2월 3일】
- 정부, 콜레라균 수출문제로 일본에 항의
- 공화당, 원내총무를 경질 -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지난 1월 31일에 사표를 제출했던 김택수 원내총무의 후임에 金振晩(김진만)씨를 임명.
【1970년 2월 5일】
- 서울시민 30만, 北傀(북괴)의 세균전ㆍKAL機 납치를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다.
- 검찰, 9일부터 병역사범 일제검거 시작한다고 발표.
【1970년 2월 6일】
- 일본정부, 한국에 쌀 30만톤의 대부를 결정(20일에 양국정부 합의각서에 서명).
- 「貸與穀制(대여곡제), 연내에 철폐」 - 농림부는 종래, 端境期의 絶糧農家(절량농가)를 대상으로 실시해 오던 대여곡제도를 금년내에 완전히 청산하기로 하고, 시ㆍ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여곡 30만 석을 경지정리사업의 노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조치는 최근 농가의 절량사태가 거의 없게 된 결과, 대여곡을 대출하지 않고 보관만 하여 비용이 늘게되고 실용가치가 없게 된 까닭에 행해졌다. 대신에 일부의 절량농가에 대해서는 경지정리 및 근로사업에서 양곡을 노임으로 공급하여 구제하기로 했다.
【1970년 2월 7일】
- 한은, 「69년 중의 신설 법인기업의 87%가 서울ㆍ부산에 편재」라고 발표.
【1970년 2월 10일】
- 농가소득증가 둔화의 추세 - 농림부가 잠정추계한 69년도의 호당 농가소득은 68년도의 17만 9,000원보다 10.6%가 많은 19만 8,000원으로 연간 1만 8,000원의 절대액이 늘었는데, 도시근로자소득에 대한 상대소득증가율은 오히려 둔화, 68년 기준으로 도시근로자소득의 62.6%를 점했던 농가소득이 69년도에는 60.9%로 줄었다. 한편 연간소득증가율에 있어서도 작년의 10.6%는 63년부터 67년까지 5년간의 연평균증가율 15.1에 비하여 크게 둔화된 것이 분명하다.
도시근로자소득에 대한 농가소득의 연도별 상대소득비율은 아래와 같다.
63년 116.2%
64년 129.3%
65년 99.7%
66년 80.6%
67년 59.8%
68년 62.6%
69년 60.9%
【1970년 2월 11일】
- 외국인투자업무를 3월부터 일원화하기록 결정.
【1970년 2월 13일】
- 69년의 도시근로자소득 -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69년도시가계동향」에 의하면, 69년 중 근로자가계의 월평균소득은 2만 7,800원으로, 전년보다 3,970원(16.7%) 늘고, 또 지출은 2만 7,020으로 전년보다 3,710원 늘었다. 이 때문에 평균흑자가 전년의 520원에서 780원으로 되었다. 한편, 근로자가계의 월평균근로소득은 2만 1,000원(68년 : 1만 7,700원), 그 외의 소득은 6,800원(68년 : 6,130원)으로 총소득 중 근로소득이 75.5%, 기타 소득이 24.5%를 점하고 있고, 근로소득은 전년보다 19%가 증가하고 있다.
【1970년 2월 14일】
- KAL기 승객 39명이 북한측으로부터 석방되고, 12명은 잔류.
【1970년 2월 16일】
- 치안당국, KAL기 납치는 趙(조)의 단독범행이라고 발표.
- 주한일본대사관의 간판 떨어지다.
【1970년 2월 19일】
- 일본정부, 북한에로의 콜레라균 수출을 부정.
【1970년 2월 20일】
- 국토통일원, 통일에 관한 여론조사결과를 발표.
【1970년 2월 21일】
- 국무회의, 무비자(VISA) 입국자의 체재기간 연장 등 관광객유치책 채택.
- 노총, 제네스트를 포함한 투쟁방침을 결정 - 중앙일보가 21일 보도한 바에 의하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최근 중앙위원과 시ㆍ도협의회 의장과의 합동회의를 열고, 1)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쟁의에 관한 특례법의 폐지, 2) 위헌적 노동입법의 저지, 3) 정부의 임금억제정책문제 등을 당면과제로 정하고, 그 투쟁방침으로 1) 전면적인 임금인상 쟁의의 제기, 2) 기업주의 遵法(준법)에 대한 요구, 3) 전국적인 스트라이크 등을 협의했다.
- 외국인투자기업체인 한국화이자 종업원 260명 노조활동 보장, 요구코 무기한 단식농성.
【1970년 2월 23일】
- 박대통령, 기계공업에 대한 외자제한철폐를 지시
- 申 국토통일원장관, 서독을 방문.
【1970년 2월 24일】
- 미 상원외교위 사이밍턴 소위, 한국문제로 비밀청문회(~27일).
【1970년 2월 25일】
- 「상업차관상환, 금년의 대불(代佛)발생 40억 원 이상」 - 관계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69년 말 현재의 산은(産銀)과 시중은행의 상업차관 지불보증액은 11억 5,207만 달러이고 금년도의 상환액을 1억 4,189만 달러라고 한다면, 차관기업의 상환능력부족으로 40억 6,800만 원(약 1,300만 달러)의 대불이 발생한다라고 보고 있다. 이 대불예상액은 69년 말까지의 대불누계액 24억 2,000만 원에 비하면 거의 2배에 가깝고, 금년도 원리금 상환액의 9%에 해당한다.
- 검문ㆍ호구조사 등 실시 - 정부는 3월 1일부터 공무원을 필두로 하여 정부 투자기관 및 사기업체의 40세 미만의 兵役未畢者를 직장별로 조사하여 즉각 면직하는 한편, 4월 15일부터 각 경찰서 단위에서 검문, 검색, 호구조사 등을 통하여 병무사범을 일제히 단속하기로 했다.
【1970년 2월 26일】
- 부두노조(조합원 2만 1,900명), 콘테이너 도입 반대에 스트라이크 찬성 투표율 97%.
- 부산지검, 의사의 입회없는 주사는 의료법 위반이라 하여 간호원 김영자에게 징역 1년 6월 구형. 법원의 구형에 반발 3월 2일 대한간호협회 6,000회원 주사 거부 보사부에 통고.
- 「70년대의 과제는 통일」 - 박대통령을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통하여, ‘70년대는 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준비를 완료하는 연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또, ‘이것은 실현가능한 당면과제이다’라고 강조했다.
- 일본 三菱(삼능)사절단, 한국과 대규모 商談(상담) - 中村基孝 三菱商事 專務를 단장으로 한 三菱그룹의 「한국상품수출촉진사절단」은 25일의 방한 이래, 국내 업계와 적극적인 商談을 행하고, 연간 천수백만 달러의 신규 수입계약을 맺었다. 국내의 정ㆍ재계는 대일무역의 入超(입초)시정의 견지에서, 금번의 방한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번 사절단은 三菱상사, 三菱중공업, 三菱전기 등 三菱그룹을 대표하는 1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1) 일본 또는 제3국에 수출 가능한 신상품의 개척, 가공수출, 2) 합병사업에의 적극참여, 3) 장기계약에 의한 특산품 안정생산의 확보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체제가 의논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채산을 무시한 구입이나, 제3국에로의 중계서비스 등도 고려되고 있다고 말해진다.
【1970년 2월 27일】
- 강남지역 등의 地價(지가)급등 - 국세청에 의하면, 작년 10월부터 이상한 부동산 투기붐을 일으키고 있는 강남(한강의 남쪽)지역 등 특수지역의 지가(地價)는 과거 4개월간에 최고 6배로 급등했다.
- 칼텍스, 대륙붕 석유자원의 개발권 획득.
- 주한 미대사관, 「북한의 위협이 있는 한 철수 불능」이라고 언명.
- 일본해에서 韓美합동對潛훈련 시작(5일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