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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드크로프트 [James Gordon Holdcroft, 1878~1972]
허대전(許大殿), 미국북장로회ㆍ독립장로교회 목사, 선교사, 신학자, 교육가.
【1878년】
- 8월 31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 6월, 미주리주 파크빌의 파크대학을 졸업하였다.
- 10월,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 개척자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 신분으로 내한하였다.
- 서울에서 1년 6개월 일하는 동안 목회와 선교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었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1908년】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북장로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뉴욕 케이퍼타운제일장로교회에서 1년간 목회하였다.
【1909년】
- 뉴욕에서 태어나 바사대학을 졸업한 넬리 코완(Nellie Mary Cowan, 1881~1976)과 결혼한 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그해 12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 이미 한국에서 2년간 사역한 경험이 있기에 곧바로 평양선교부에 파견되어 안식년 휴가를 떠난 그레이엄 리(Graham Lee, 이길함)의 선교구역을 맡아 중화ㆍ곡산 지역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마침 한국에서 백만명구령운동이 진행 중이어서 순회전도대회 강사로 활약하였다.
【1912년】
- 1912년 보고에 의하면 홀드크로프트는 70개 교회에 세례교인 2,430명, 학습인 1,514명, 세례아동 259명을 확보하였고 1년 사이에 세례교인 354명, 세례아동 66명, 학습인 729명이 증가하였으며 새로 다섯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평양지역 주일학교 조직과 교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 2월 1~2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 1911년 4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특파원 브라운(Frank L. Brown)이 극동아시아지역을 순방하던 중 서울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 소속 선교사들은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주일학교와 연계한 국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2월 1~2일 서울에서 연합공의회에 참여한 6개 선교부 대표와 조선예수교장로회와 미감리회 및 남감리회 대표, 조선예수교서회 대표 13인이 회집하여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 스와인하트를 원장, 북장로회 선교부 대표 홀드크로프트를 총무로 선출하였다. 이때부터 홀드크로프트는 초교파 주일학교연합회 사업과 행사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 연합회의 첫 사업으로 세계주일학교연합회 발행의 『만국주일계단공과(International Graded Lesson』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1913년 봄 전국 주일학교 교사대표들이 참여하는 주일학교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하였다.
【1913년】
- 1913년 초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세계주일학교연합회 국제실행위원회는 브라운의 보고를 듣고 한국 주일학교 사업을 위해 매년 2천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 1913년 4월 19일, 서울 경의궁에서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언더우드가 대회장으로 집회를 이끌었는데 전국에서 무려 1만 4천 명이 참석하여 선교사와 목회자는 물론이고 조선총독부 관계자와 일반 시민들도 놀랐다.
- 홀드크로프트 부부는 평양선교부 부임후 다른 선교사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1913년 5월에야 평양 경창리에 2층짜리 양관 사택을 짓고 입주하였다.
- 부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사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출석하는 남문밖교회 주일학교를 지도하였고 매년 평양지방 여자사경회를 인도하였으며 평양여자성경학원에 나가 강의하였다.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평양외국인학교 운영위원회 회계로도 활약하였다.
【1914】
- 4월, 브라운을 단장으로 하여 미국과 영국 주일학교운동 지도자 20여 며이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홀드크로프트는 대표단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서울ㆍ부산ㆍ대구ㆍ광주ㆍ목포ㆍ군산ㆍ청주ㆍ공주ㆍ개성ㆍ인천ㆍ해주ㆍ재령ㆍ평양ㆍ선천 등 주요 도시를 순방하도록 하였다. 홀드크로프트는 그 이유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주님의 사역, 그 능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저들의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저들에게만 의지하지는 말자.”고 설명하였다.
- 그는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하는 1914년 4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복음전도 기관으로서 주일학교”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교회 부흥이 주일학교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1915년】
- 1915년부터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으려는 어린 유아들을 위해 어머니와 아기들이 함께 성경 이야기를 듣는 형태로 진행하는 유아반을 운영하였다.
- 6월, 서울로 올라가 성서공회 총무 밀러(H. Miller) 집에서 거행된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 마펫(S. A. Moffett)과 평양외국인학교 교사 루시아 피쉬의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1916년】
- 그동안 교단별ㆍ교파별로 서로 다른 직제와 명칭으로 진행하던 주일학교 교육과 운영을 통일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1917년】
- 주일학교 교사를 위해 『주일학교선생 양성공과(Sunday School Teacher Training)』를 간행하였다.
- 7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 부부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 설립자인 화이트 박사의 뉴욕성경학원에서 3개월 신학수업을 받고 휴식을 취한 후 1918년 12월에 돌아왔다.
【1919년】
- 일본으로 건너가 총리에게 3ㆍ1운동의 학정을 항의하였다.
【1920년】
- 홀드크로프트는 1920년 3월 KMF 편집부에 평양에서 진행된 ‘연합기도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3ㆍ1독립운동 이후 오히려 입교자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에 따라 주일학교운동도 활기를 찾았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회는 북장로회 선교부에 홀드크로프트로 하여금 주일학교 사역에 전념하도록 파송해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때부터 홀드크로프트는 전도와 목회 사역에서 벗어나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무 사역에 전념하였다.
- 10월, 일본 도쿄에서 제8회 세계주일학교대회가 열려 한국교회 대표들을 대거 파송하려 하였지만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민족주의 단체들이 “일본이 3ㆍ1독립운동 무력탄압으로 악화된 세계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만든 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를 보내지 말라”고 호소하는 바람에 선교사 중심으로 소수 대표만 참여하였다. 그 대신 일본 대회에 참석했던 20여 명의 미국 대표들이 대회 후 한국을 방문하여 탄압받는 한국 민족과 교회 현실을 시찰하는 기회를 얻었다.
【1921년】
- 1월, 건강이 악화되어 휴가를 얻어 귀국, 휴식을 취했다.
【1922년】
-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에서 1922년 신학석사 학위와 모교인 파크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1923년】
- 귀환 후 주일학교연합회 총무 사역에 복귀하였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인과 목사가 협동총무로 부임하여 일을 돕기 시작했다.
- 봄, 미국 여름성경학교운동 지도자 내쉬(W. L. Nash) 방한을 계기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도 하기아동성경학교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1924년】
- 1924년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 안에 주일학교 강사 양성부를 설치하여 주일학교 교사와 지도자를 양육하였고, 월간 「주일학교잡지」, 주간 「주일학교통신」을 간행하였다.
【1925년】
- 10월 21~28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하였다.
- 주일학교대회를 계기로 임지를 평양에서 서울로 옮겨 서울 연지동선교부 안에 새 주택을 짓는 한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주일학교연합회 사무실을 냈다.
- 9월 23일, 경성 수표교교회당에서 모인 제2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를 맡았다.
【1928년】
- 독자적인 주일학교연합회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1928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여 주일학교회관 건축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30년】
- 9월, 귀환 후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하는 대신 모금한 3만 원을 당시 종로 2가에 새 회관을 짓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 건축에 동참하기로 했다.
【1931년】
- 6월, 완공된 조선예수교서회 4층에 독자적인 사무 공간을 확보하였다. 서울로 사무실을 옮긴 후 주일학교연합회 사무는 정인과 협동총무와 이서락 간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32년】
- 주일학교연합회를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은 후 1932년 10월 총무직을 남감리회 선교부의 스톡스에게 넘겨주었다.
-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북장로회 선교부는 홀드크로프트ㆍ로즈ㆍ솔타우ㆍ매큔 등을 대책위원으로 선정하여 조선총독부 교육당국과 협상하도록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1934년】
-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선교 50년 역사를 정리하는 역사편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대회를 앞두고 1934년 8월 KMF에 “앞으로의 전망”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는 지도력 이양 문제에 달렸다고 하면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늘어나야 하고 선교사들은 줄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35년】
- 미국 북장로회 총회와 신학교들이 진보주의/근본주의 신학논쟁에 휘말려 갈등을 빗다가 1935년 보수진영이 북장로회 총회를 이탈하여 정통장로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와 성경장로회(Bible Presbyterian Church), 독립장로회해외선교부(Independent Board of Foreign Missions) 등을 조직하였다.
- 보수적 신학노선의 홀드크로프트는 치솜(W. M. Chisolm), 브라이엄(R. B. Bryam), 핸슨(M. L. Hanson) 등과 함께 독립장로회해외선교부를 지지하였다. 헌트(B. F. Hunt)와 해밀턴(F. E. Hamilton), 말스베리(D. R. Malsbury) 등은 정통장로회를 지지하였다.
【1936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
- 어머니의 급환으로 1937~1938년 미국을 다녀와 선천선교부로 가서 2년간 사역하였다.
【1939년】
-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회장직을 마지막으로 수행하였다.
【1940년】
- 1월, 북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 4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 귀국 후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면서 독립장로회해외선교부 총무로 사역하였다.
【1945년】
- 해방 직후 내한하여 출옥성도 한상동과 주남선 목사를 도와 고려신학교 설립과 고려파 법통노회 조직을 지원하였다.
【1948년】
- 국제기독교연합선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다(1948~1964년).
【1950년】
- 1950년 이후 미국 독립장로회 총회장과 Biblical Mission 편집장, 훼이스(Faith)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1년】
- 11월, 미국성경장로회 칼 매킨타이어와 함께 내한하여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컬 노선과 ‘용공주의’ 노선을 비판하는 강연을 열면서 보수적인 ‘복음동지회’(NAE) 진영이 독자적인 신학교와 총회를 조직하도록 지원하였다.
【1959년】
- 내한, 합동측 교단 분립 시 총신(용산)을 세우는 데 재정적으로 공헌하였다.
【1976년】
- 6월, 펜실베니아에서 93세로 별세하였다.
- 뉴저지 캄든의 할레이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부인 넬리는 1976년 3월에 94세로 별세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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