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콜라 신학은 유럽에 세워졌던 개혁적인 수도원 종단들로부터 탄생했고 파리와 옥스퍼드와 같은 새로운 대학들에서 꽃을 피웠다... 대성당과 수도원 학교와 대학들로부터 스콜라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종류의 신학운동이 일어났다. (369)
-
“스톨라 철학은 본질적으로 본래부터의 이성적이며 모순이 없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방법론적이며 철학적인 논증을 시도한 하나의 운동이다” (370)
-
수많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은 어떤 현실적인 중요성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힘입어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인식론은 낙천적이었다. (370)
-
중세 스콜라 철학... 1) 신학 안에서도 인식에 이르는 통로로서 인간의 이성을 열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2) 비기독교 철학들과 신적 계시와의 사이에 정확한 관계를 발견하려고 하는 관심으로 압도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에서 그리고 유럽에 기독교 대학들에서 재발견되고 있을 때, 따라서 스콜라 신학자들은 철학의 주된 통찰력과 기독교 진리 사이의 내적 적합성을 설명하여 나타내 보이려고 시도하였다... 3) 과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현저한 논평들에 초점을 맞춰서 가르치고 쓰는 확실한 형태를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토론하는 것이었다. (371)
-
중세의 모든 스콜라 학자들은 논리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논리라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 자신과를 연결시키는 인간의 정신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했다... (372)
-
안셀무스... 기독교 사상의 건설적인 증거와 명제적인 체계로 신적인 계시의 종이요 도구로서 오로지 논리만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다섯 가지 감각 즉 오관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오관은 물질세계를 검토하는 데 신뢰할 수 없으며, 고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72)
-
다른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롭게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영향 아래서, 오관을 철학과 신학의 기본적인 “자료”로 보았다. (372)
-
마르틴 루터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독교 신학을 이치에 맞지 않는 사색으로 끌어들이려고 유혹하는 “강한 매춘부”라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심지어 그 마르틴 루터까지도 그것에 의하여 영향을 입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고려해 넣어야만 했다.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