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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6대 국왕]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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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대 국왕]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

 

  • 고구려 제6대 국왕(재위 : 재위 53년 11월 ~ 146년 음력 12월)
  • 출생일 : 47년
  • 사망일 : 165년 9월(음력)
  • 부친 : 재사(유리명왕의 아들)
  • 모친 : 부여태후
  • 배우자 : 미상
  • 자녀 : 고막근, 고막덕, 차대왕

 

어릴 적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휘는 궁()이다. 유리명왕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사촌 형인 모본왕이 두로에 의해 시해된 후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53년]

 

11, 사촌 형인 모본왕이 폭정으로 인해 두로에 의해 시해되자 즉위하였다. 원래 신하들은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再思)에게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여 재사의 아들인 태조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세였으므로 어머니 부여태후가 섭정하였다.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ㆍ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를 우태(于台)에 임명하였다.

 

[70년]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서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2년]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증거로 여겨진다.

 

[98년]

 

책성(柵城)을 순수하여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102년]

 

책성을 안무(安撫)하여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109년]

 

후한과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1년]

 

후한과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4년]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서자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ㆍ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한나라 군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121년부터 태조대왕은 동생인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123년에는 목도루(穆度婁고복장(高福章)을 좌ㆍ우보(右輔)로 삼아 수성을 보좌하게 하였다. 고복장은 수성이 차대왕으로 즉위한 후에 차대왕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고복장은 수성의 정치적 반대파였을 것이다. 따라서 태조대왕이 목도루ㆍ고복장을 좌ㆍ우보로 임명한 것은 수성을 견제하고 왕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122년]

 

마한ㆍ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후한과 화친하였다.

 

[146년]

 

후한과 전쟁이 일어나, 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약탈하였다.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은 132년 무렵부터 왕위에 욕심을 냈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죽지 않자 146년에 측근들이 부추기니, 수성은 역모를 도모하였다. 이에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65년]

 

퇴위 후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5년에 서거하였다. 사인은 자연사로 추정되지만, 차대왕 또는 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후에 평안남도, 주로 평양 주변 지역에서 무속 신의 하나로 숭배되었다.


[후대 관계 논란]

 

그와 후대 고구려 왕들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은 그의 동생들이라 한다. 하지만 후한서와 그것을 인용한 신채호의 견해로는 차대왕ㆍ신대왕ㆍ인고(仁固) 3형제가 있으며, 이들 3형제는 태조대왕의 동생이 아니라 서자라고 한다. 한편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조에서는 산상왕 위궁이 태조대왕의 증손자라 되어 있는데, 고구려본기의 위궁이란 이름이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더라도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자려면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과 충돌한다.

 

[즉위에 대한 의문]

 

태조대왕의 즉위와 그 가계는 현재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겨져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는 유리왕의 아들이라 한다. 재사의 조카인 모본왕이 사망한 시기는 53년이며, 유리왕이 사망한 후부터 38년이 지난 시기이다. 따라서 재사가 유리왕 말년에 출생했다고 가정해도, 유리왕이 18년에 죽었으므로, 재사의 나이는 아무리 높아도 35세이다. 그런데 재사는 모본왕 사후에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사양하였으므로, 35세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분명하다. 또한 재사의 다른 아들들로 기록된 차대왕ㆍ신대왕은 그 출생 연도가 71년과 89년이므로 신대왕을 낳을 당시 재사의 나이는 아무리 적어도 70세를 상회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신채호는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이며, 재사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 주장하였다.

 

[차대왕ㆍ신대왕과의 관계]

 

한편 차대왕ㆍ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한서에는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는 차대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태조대왕 가계의 의문점은 삼국지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라고 쓰인 기록의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 태조대왕 이전 왕들의 이름이나 시호에서 부여의 왕성인 해()씨가 나타나는 점을 토대로 하여, 태조대왕 이전은 해씨 소노부가, 태조대왕 이후는 고씨 계루부가 왕위를 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안제 건광 원년(121)에 후한서에 궁이 죽고 궁의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는 후한서의 대목을 인용해놓기도 했다.

 

[산상왕과의 관계]

 

산상왕과의 관계도 다소 불확실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일부와 삼국유사, 중국의 북사(北史)에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 위궁(位宮)이라 하면서 그가 태조대왕의 증손자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다른 기사 및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이라 하므로, 태조대왕은 산상왕의 큰아버지가 된다. 위궁이 산상왕이 아니라 그 장남 동천왕의 이름이라고 고쳐 이해하더라도,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면 동천왕은 태조대왕의 증손이 아닌 종손이 된다.

 

[사망년도 논란]

 

태조대왕이 죽은 해가 삼국사기ㆍ삼국유사에는 공히 165년이라고 기록되었지만, 후한서에는 121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조에는 ()이 죽고 그 아들 수성(遂成, 차대왕)이 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만약 후한서를 따른다면 태조대왕의 재위가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대왕의 업적이 아니고 아우(혹은 아들)인 차대왕의 업적이 된다.

 

[태조대왕의 나이에 대한 의문]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동생인) 차대왕은 71년에 태어나서 7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70대인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43살까지 벌어진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복형제라고 둘러댈 경우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삼형제의 아버지 고재사의 기록도 이상하다. 모본왕이 시해당한 후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재사가 자신이 연로하다며 사양해서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부터 의문인데 당시 고구려는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재사가 즉위할 명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고재사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재사보다 형일 대무신왕 무휼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서기 53년에 고재사는 50이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고재사의 아들로 나오는 차대왕, 신대왕은 각각 서기 71, 89년에 태어났다고 하기 때문에 연로하다며 왕위를 태조대왕에게 양보한 재사가 그로부터 20~40년 후까지 더 살아서 아들을 낳은 셈이다. 유리명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했으므로 신대왕이 태어났을 때 고재사가 살아있었다면 최소한 71살은 되었을 것이다.

 

원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초기 군주들의 수명이 비상식적으로 길게 기록돼 있다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남을 감안해도 군주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백제본기><신라본기>에 비해 비교적 신뢰를 얻고 있는 <고구려본기>에서 특정한 시간대에 연속해서 왕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이 시기만큼은 백제, 신라 기록보다도 불신도가 더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후기에 신라 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쓴 김부식이 고구려의 연대를 줄이기 위해 초기 왕들을 합쳤다는 의혹이 조선시대부터 제기되었다.

 

[학계의 정설]

 

동명성왕부터 모본왕까지의 왕가는 태조대왕 이후 왕가와 별개의 계통이었는데 모본왕 피살 후 긴 왕권 다툼이 발생해 최종적으로 태조대왕계로 왕가가 바뀌었고, 후대에 인위적으로 두 왕계를 연결시키면서 태조대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 동명성왕계에서 태조대왕계로의 왕가 교체가 연노부(소노부)와 계루부 간에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논쟁이 있는 편이다. 노태돈은 이 왕가 교체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가 교체와는 별개로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사실 연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가 교체부터가 이론이 많은데, 동명성왕 시기의 비류국 세력 귀순이 연노부와 계루부 간의 왕계교체라는 설(정설), 태조대왕으로의 왕가교체가 연노부와 계루부 간의 왕계교체라는 설, 연노부와 계루부 간의 분화가 산상왕 시기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태조대왕은 언제 출생하고 언제 사망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한서121년 태조대왕 사망 기록을 신뢰한다. 이유는 후한서에 나타난 태조대왕 사망 소식 전달부터 고구려로 사신을 파견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자세하다는 점, 태조대왕의 죽음을 알린 인물은 태조대왕과 여러번 싸운 인물로써 고구려에 대해 잘 알았으며 장례식에도 직접 참여했다는 점, 중국이 다른 나라의 왕계에 대해서는 종종 부정확하게 기록하지만 기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점, 중국에서 굳이 죽지고 않고 장례식도 없었는데 조작할 이유가 없다는 점, 121년부터 146년까지 삼국사기-태조대왕조- 후기 기사가 부자연스러우며 조작으로 보인다는 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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