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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8대 국왕] 신대왕(新大王, 165~179)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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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8대 국왕] 신대왕(新大王, 165~179)

 

  • 고구려 제8대 국왕(재위 : 165년 ~ 179년)
  • 출생일 : 89년
  • 사망일 : 179년 음력 12월
  • 부친 : 재사(유리명왕의 아들)
  • 배우자 : 미상
  • 자녀 : 고발기(高拔奇)ㆍ고남무(高男武)ㆍ고발기(高發岐)ㆍ고연우(高延優)ㆍ고계수(高罽須)

 

고재사(고구려국 고추가)의 서자(庶子)인 그는 태조왕(太祖王)과 차대왕(次大王)의 이복 동생이지만 태조왕과는 터울이 42살까지 나므로 이복 동생이 아니라 태조왕의 아들 또는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의 이복 동생으로, 진수의 삼국지에는 태조왕의 서자로, 반고의 후한서 後漢書에는 차대왕의 아들로 나온다. 신채호에 의하면 차대왕, 신대왕, 인고(仁固) 3형제는 태조왕의 이복 동생이 아니라 서자라고 한다.

 

휘는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이다. 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 165년에 명림답부(明臨荅夫)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죽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 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러 나이 차를 감안한다면 차대왕의 출생연도는 113년쯤으로 추정되며,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우가 아니라 차대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

 

[166년]

 

좌ㆍ우보(右輔)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임명하였으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후한(後漢)의 현도태수가 침공해 들어와 항복하였으며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羣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 一夫當關 萬夫莫當者 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數千 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荅夫坐原及質山 爲食邑
8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기신대왕 8년 기사

 

[176년]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다.

 

[179년]

 

음력 12월에 91세로 사망하였다.

 

[자녀들]

 

  • 장남 : 고남무(高男武) - 고국천왕
  • 차남 : 고발기(高發岐) -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즉위하자, 공손도에게서 병력을 빌려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자살하였다.
  • 3남 : 고연우(高延優) - 산상왕
  • 4남 : 고계수(高罽須) - 신대왕의 막내아들로, 형인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대에 장수로서 활약했다.

 

[신대왕에 대한 학계의 정설]

 

현재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먼 방계쯤 된다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라더라도 후일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뒷 시기의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대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조-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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