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10대 국왕] 산상왕(山上王, 197~227)

by [수호천사] 2022. 4. 5.
728x90

[고구려 10대 국왕] 산상왕(山上王, 197~227)

 

  • 고구려 제10대 국왕(재위 : 197년 5월 ~ 227년 5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227년 5월(음력)
  • 부친 : 신대왕
  • 모친 : 미상
  • 배우자 : 왕후 우씨(于氏)
  • 자녀 : 동천왕

 

산상왕(山上王)은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에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태조왕과 같이 이빨이 나 있고, 사물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이름이 위궁이라 하나, 중국의 삼국지에는 그의 아들 동천왕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중국 북사(北史)에 의하면 그는 태조왕의 증손자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및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신대왕은 태조왕의 동생이므로 태조왕은 그의 큰아버지가 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다른 이름으로 위궁(位宮)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북사에도 위궁은 그의 이름이라 한다. 삼국지등의 중국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위궁은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의 이름이라 한다.

 

[197년]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우 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다시 왕후에 올랐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며,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發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발기는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뒤이어 발기가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하였다. 계수가 발기의 군대를 물리치자 발기는 자살하였다.

 

197년에 형인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인 우씨(于氏)가 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밤중에 발기를 찾아와 ‘(고국천)왕이 후손이 없으니 발기가 왕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고국천왕의 죽음을 몰랐던 발기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부인이 어찌 밤중에 돌아다니냐고 호통쳤다. 우씨는 그대로 동생인 연우에게 가서 왕의 죽음을 알리고는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우씨가 선왕의 유명이라 둘러대며 연우를 왕으로 옹립하니 곧 산상왕이다.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쳤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너는 차례를 뛰어넘어 왕위를 빼앗는 큰 죄를 저질렀다! 속히 나오거라! 그러지 않으면 처자를 죽이겠다!”

사흘간 대치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도(公孫度)에게 귀순하였다. 곧바로 공손도에게서 병사 3만 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추격당하였다. ‘이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냐는 발기의 말에 계수는 형제의 정이 떠올라 도저히 해치지 못하고 연우형이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도 순간의 감정으로 자기 나라를 멸하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죽은 후에 조상님을 어찌 뵈려고 하십니까라고 답하였다. 발기는 밀려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자살하였다. 계수가 슬피 울며 시체를 거두어 두었다가 산상왕에게 청해 왕의 예로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발기(拔奇) : 《삼국사기》에는 한자가 다른 발기(拔奇)가 고국천왕의 형이자 신대왕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건안(196년~220년) 초기에 동생 이이모에게 밀려나 왕이 되지 못하고 공손강(공손도의 아들)에게 귀순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부식 등이 산상왕 1년(197년)조에 썼어야 할 《통전》의 기록을 고국천왕 1년(179년)조에 잘못 옮겨 쓴 것으로 해석해 두 발기를 동일인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 이유는 건안 연간이 196년에서 220년 사이라는 점, 공손씨 정권은 요동에 189년부터 들어섰다는 점, 《삼국지》에서 이이모는 산상왕을 가리킨다는 점, 고국천왕은 176년에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후계 문제가 정리되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중국의 기록에서 고국천왕이 누락된 것을 《삼국사기》에 억지로 잇다가 잘못 옮겨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8년]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203년]

 

국상 을파소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208년]

 

겨울 음력 11월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后女)라는 20세 가량의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다.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으며, 후녀는 아들 교체(郊彘)를 낳았다. 후녀는 소후(小后)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09년]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13년]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위나라 조조 군에 쫓겨 1천여 가()를 거느리고 투항하였으며, 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227년]

 

서거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다.


[출생년도 추측]

 

정확한 출생년도는 추정할 수가 없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 등을 검토해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아버지 신대왕이 태어난 때와 자신이 죽을 때의 나이 차이가 140여 년이 난다. 그렇다면 위에 형이 발기, 고국천왕, 발기 3명이 있다 치고, 신대왕이 늦게 장가를 갔다고 쳐도 90세다. 이리 되면 아들 동천왕이 209년생인데 상식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 재위에 오른 뒤 동천왕을 낳았으니 죽을 당시 나이는 50세 전후이거나 많이 잡아도 60대다. 실제로 동천왕은 성인이 되어 즉위하여 40대에 사망했고, 뒤를 이은 아들 중천왕은 즉위 당시 20대였다. 이리 되니 태조대왕에서 차대왕, 신대왕에 이르는 태왕들이 형제들이 아니라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사료들을 기준으로 차대왕은 95년생이고, 신대왕은 113년생이며, 165(52)에 즉위해서 179(66)에 죽었을 것으로 산출된다. 신대왕과 고국천왕의 나이차를 24살로 추정하면 이미 179년 즉위할 때 42살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다면 고국천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137년생일 것이고, 19760세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선대 왕들의 나이가 계속 24살이나 18살로 조작되는 흔적을 감안하여 출생년도가 고국천왕과 부자 관계라면 173년 근처이며, 형제 관계로 보면 155년생이라 추정해볼 수가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