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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9대 국왕] 고국천왕(故國川王, 179~197)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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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9대 국왕] 고국천왕(故國川王, 179~197)

 

  • 고구려 제9대 국왕(재위 :179년 ~ 197년)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197년 5월(음력)
  • 부친 : 신대왕
  • 배우자 : 왕후 우씨(于氏)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신대왕의 아들로 휘는 남무(男武)이다. 동생으로는 발기, 산상왕(연우), 계수가 있다.

 

[176년] 신대왕 12년

 

3월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179년]

 

12월에 신대왕이 사망하여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180년]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 우씨(于氏)를 왕후로 삼았다.

 

[184년]

 

후한의 요동(遼東) 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출병하여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격퇴하였다.

 

[190년]

 

가을,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자 왕이 이를 벌하려 하였다. 이에 좌가려 등이 사연나(四椽那)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1914월에 수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반란을 진정시킨 뒤 그해에 왕은 평민 출신의 을파소를 등용하고 국상(國相)에 임명하였다. 구신(舊臣)들이 신진 세력인 을파소를 참소하자 왕은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다.”라고 포고하였다. 이에 을파소는 왕의 정성에 감동하여 정치에 힘써 나라가 융성하였다.

 

[194년]

 

10월에는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갔다가 만난 어떤 백성이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옷과 식량을 준 후 진대법을 실시하여 하호(下戶)들을 구제했다. 진대법은 구휼책으로 춘궁기(음력 3월부터 7월까지)에 국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음력 10)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였다.

 

[197년]

 

사망하였으며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기록의 오류]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의 형 발기(拔奇)가 재능이 용렬하다(불초하는)는 이유로 발기 대신 동생인 이이모(伊夷謨)가 국인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발기는 이이모를 원망하여 연노부(소노부)의 장과 함께 각각 30,000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 공손강에게 항복했다가 나중에 비류수 유역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기록대로라면 아귀가 안맞는 부분이 여럿 생기게 된다. 공손강이 요동을 확보한 것은 산상왕 시기인 204년의 일로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국천왕 대라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잘리고 고생하던 시기로 요동태수가 되기 이전이다. 공손도의 요동태수 임명 시기는 다른데, 삼국지189, 후한서184년이다. 이중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고국천왕의 즉위 이후 시점인 것이 문제이다. 고발기를 도운 인물이 공손강이 맞다면 이는 이 시기 요동 지역에 존재하였던 동명이인이자 병력만 30,000명이 넘는 유력자인 공손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시기 요동 공손씨 정권의 공손강의 경우, 아버지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면직되어 영향력을 잃자 요동군 양평현령 공손소가 공손강을 강제로 끌고가서 하급 관리로 부려먹는 중이었는데, 이후 간신 동탁이 집권하고 공손도가 복권되어 요동태수가 되자 공손강이 공손소를 체포해 저잣거리에서 때려죽였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공손강이 고생하던 시기의 요동태수로 유력한 인물은 장거와 장순의 반란시에 죽은 양종이다. 동명이인설을 주장해도 당시 요동에 딱히 공손씨 군벌이 있었던 흔적이 없는데 평범한 어느 공손강이 과연 30,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원해줄 수 있었는지도 문제이다.

 

삼국사기의 고국천왕 즉위년 왕위 계승 분쟁 기사는 삼국사기내의 다른 기록과도 충돌한다. 176(신대왕 12) 정월, 신하들이 고남무의 태자 책봉을 건의하는 기사와 3월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신대왕 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사실 민중왕과 모본왕이라는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모본왕이 어렸기 때문에 추대된 특수 사례다. 따라서 삼국사기고국천왕 즉위년 기사는 오류라고 할 수 있고, 고국천왕의 형 고발기는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發歧)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국천왕의 형 발기와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가 동일 인물이라면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비해 세부 요소에서 동일 인물일 경우 일어날 수 없는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삼국사기산상왕 즉위년의 기사를 후대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윤색된 기사로 보면 아귀가 맞는다.

 

사실 기록이 이렇게 꼬여버린 데에는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고국천왕을 누락시켰고, 이 착오를 통전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 한 몫 한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김부식이 통전의 기록을 보고 이이모는 백고를 이었기에 고국천왕, 위궁은 백고를 이은 이이모를 이었기에 산상왕일 것이라 여겨 원래는 삼국지통전에서는 산상왕에 대응되던 이이모(伊夷模)를 고국천왕, 동천왕에 대응되던 위궁(位宮)을 산상왕에 각각 대응시킨 후 이이모와 관련된 기사를 고국천왕 즉위년조로 가져와 인용했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국천왕의 실존문제]

 

그런데 삼국지의 기록대로 신대왕 백고의 뒤를 이은 이이모가 산상왕이고, 위궁이 동천왕이라면, 고국천왕의 존재가 누락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쓰다 소키치 같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한 바 있다.

 

쓰다 소키치의 고국천왕 부존설은 노태돈에 의해서 반박 당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고국천왕이 존재하지 않은 군주가 아니었다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 중국의 역사서에 적힌 우리나라 왕조의 왕계는 누락이나 착오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서긍(徐兢, 1091~1153)고려도경(高麗圖經) <세차>(世次) -왕씨조-(王氏條)에 적힌 고려의 왕계를 고려사(高麗史)와 비교해봤을 때, 그 왕계에 착오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 또한 그랬을 것이란 얘기다.

 

두 번째, 고구려의 집안(集安) 천도가 산상왕 때 이루어졌음을 근거로, 환인(桓仁)에서 죽은 고국천왕의 왕호가 어떻게 국천왕이 될 수 있냐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이는 산상왕이 천도할 때 고국천왕의 시신을 환도성으로 운구해갔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학설이란 것이다.

 

노태돈은, 삼국지의 단속적인 접촉을 통해 파악된 왕계보다는 고구려 내부에서 스스로 정리해 삼국사기에까지 전해진 왕계가 더 사실성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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