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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15대 국왕] 미천왕(美川王, 300~331)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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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5대 국왕] 미천왕(美川王, 300~331)

 

  • 고구려 제15대 국왕(재위 : 300년 9월 ~ 331년 2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331년 2월(음력)
  • 부친 : 돌고(서천왕의 아들)
  • 모친 : 미상
  • 배우자 : 왕후 주씨(周氏)
  • 자녀 : 고국원왕 · 고무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등이 전해진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을불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숨어 지냈다. 사람들은 봉상왕보다 을불을 더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품고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이후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촌구석인 수실촌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기고 음모(陰牟)라는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을불은 죽어라 고생만 해야 했고, 특히 여름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들들 볶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밤을 새면서 연못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머슴살이를 버티지 못하고, 1년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 소금 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했다. 소금 장수가 된 이후에도 불우한 생활은 매 한 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思收村)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을 얻어갔다. 그러나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을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고 관가에 도둑으로 신고했다. 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렸고 압록강 변의 재()는 팔랑귀처럼 노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려 현행 절도범 누명을 씌우고는 을불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태형을 내려 매를 친 다음 내쫓아 버렸다. 이런 갖은 고생을 한 을불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이었으니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予野人, 非王孫也。請更審之。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 창조리 등 신하가 을불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302년]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을파소 이후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던 국상 직위의 언급이 미천왕 대 창조리 이후로 없는 것을 봐도 역시 왕권이 강화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창조리를 미천왕이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302년 경부터 국상 자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 미천왕이 국상 벼슬 자체를 전격 폐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로도 국상 벼슬은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신라 시대 상대등 같이 제가회의를 이끌고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오던 국상을 굳이 따로 두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고구려의 부총리급 직위인 좌보와 우보를 합친 게 국상이었는데, 국상 벼슬이 생긴 지 200여년 만에 국상 벼슬이 날라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대대로/막리지가 나올 때까지 국상에 비견될 벼슬이 나오지 않는다.

 

[311년]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낙랑군 및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였다. 서안평은 중국 단둥시(구 안동시) 일대를 가리키는데 쉽게 말하면 압록강 하류 용천평야 일대라고 보면 된다. 옛날부터 고구려가 황해 진출을 위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다. 그래서 이 땅을 태조대왕 때부터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당시 요동 세력들의 방해로 온전히 고구려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했는데 이것을 미천왕 대에 와서야 이루게 된 것이다. 서안평은 중국 만주 지방에서 가장 험한 지형을 자랑하는지라 지상군으로는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수군을 동반한 수ㆍ륙 양진을 해야 점령이 가능했다는 것으로 미천왕 때 이 땅을 점령했다는 것은 수군의 기반을 닦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313년]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병합하여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다.

 

[315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318년]

 

중국 군현 세력이 축출된 이후 요서 지방에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318년 경, 동진(東晉)의 평주 자사(平州刺史)ㆍ최비(崔毖)의 작전에 따라 선비족의 다른 일파인 단부(段部우문부(宇文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였는데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모용선비와는 악연이 이어져서 그의 아들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국내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고구려는 미천왕의 능이 파헤쳐져 시신이 수레에 실려 전연으로 갔으며, 미천왕의 왕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0,000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미천왕의 시신은 몇 달 뒤 반환되었으나, 주 태후는 인질로 붙잡혀있다가 13년이 지난 뒤에야 고구려로 귀환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다. 다만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나중에 전연이 멸망해 태부였던 모용평이 망명해오자 저족이 세운 전진으로 압송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그런데 전진이 멸망하고 옛 전연이 있던 땅에 모용선비족의 후연이 들어서자 2차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천왕의 손자인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공격해 승리하나 싶더니 그 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겨서 도로아미타불. 후대인 광개토대왕 때에도 광개토대왕이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과 대치하는 동안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털어버리는 등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증손자인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격, 숙신성을 빼앗고 얼마 안가서 후연이 한족의 북연으로 대체되었으며, 고손자 장수왕이 북연의 수도 용성을 불사르고 그 황제 풍홍을 끌고 와 용성왕으로 강등시켰다가 죽이는 것으로 미천왕의 원수를 완전히 갚았다. 고구려는 미천왕 대로부터 약 100여년이 흐른 뒤, 증손자인 광개토대왕 대에 가서야 요동을 완전히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모용선비로 보면 무려 모용외 ~ 모용희까지 49, 고구려로 보면 미천왕 ~ 광개토대왕까지 45왕에 걸친 악연이었다.

 

[319년]

 

동진의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하성(河城)을 지키던 여노(如孥)가 모용부의 공격에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겨울에도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330년]

 

후조(後趙)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중국 방향에서 모용부를 견제하려 하기도 하였다.

 

[331년]

 

서거하였으며 미천(美川)의 들에 장사지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고구려를 위협하려고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가족관계]

 

  • 조부 : 서천왕(西川王, ? ~292) - 제13대 국왕
  • 조모 : 왕후 우씨(王后 于氏) - 서부(西部) 대사자(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이다. 271년에 왕후에 간택되었다.
  • 아버지 :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 ? ~293)
  • 어머니 : 미상
  • 왕비 : 왕후 주씨(王后 周氏) - 342년에 모용황(慕容皝)에게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355년까지 인질로 고초를 겪었다.
  • 장남 : 고국원왕(故國原王, ? ~371) - 제16대 국왕
  • 차남 : 고무(高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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