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金枓奉, 1889년 2월 16일 출생 ~ 1960년 4월 4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한글학자(일제 시대 독립운동가, 교육자, 작가, 언론인, 정치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경상도 기장현(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출생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ㆍ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였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
【1889년】
- 1889년 2월 16일, 지금의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적개심을 갖던 김두봉은 아버지 김돈홍 밑에서 한문과 한학을 배우면서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는 입학을 거부하였다.
【1908년】
- 1908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어 배재학당으로 진학했다. 낮에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김두봉은 밤에는 보성고보의 국어 교사였던 주시경이 운영하는 하기강습소에 다녔다. 하기강습소는 1917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문닫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김두봉은 1914년까지 하기강습소 야간반에 다니며 한글, 국어연구법을 배웠다.
【1910년】
- 1910년 일제는 이완용 등을 앞세워 그해 8월 22일 강제 합병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한일 완전합병을 선포했다. 국권이 피탈되자 김두봉은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13년】
- 1913년 대동청년단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배재학당을 중퇴해야 했다. 배재학당을 자퇴한 김두봉은 당시 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에 입사하여, 한글을 연구하며 회보와 잡지 “청춘” 등을 편집했다. 이때부터 한글학자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4년】
- 그 뒤 그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대종교에도 입교하여 입교하여 교인이 된다. 동시에 계속 유명한 국어학자인 주시경선생 밑에서 한국어를 연구했고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에도 참여했다. 스승인 주시경이 한글 국어사전인 우리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혼신하는 것에 감격한 김두봉은 사전 만드는 일을 곁에서 돕고 있었다.
- 스승 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한창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의 뜻을 계승하여 한글 국어사전인 《조선말본》을 쓰기 시작한다.
【1916년】
- 1916년 4월 조선말본이 드디어 완성되어 서울에서 세로 쓰기로 조선말본을 편찬, 발행할 수 있었다. 이 국어사전은 당시 서울말을 기준으로 하고, 우리말 이해를 위해 순한글로 집필하되, 옆에 한자를 써놓았다.
- 1916년 음력 8월 대종교 교주 나철의 시봉자(侍奉者) 6명 중의 한사람이 되어 나철을 따라 강화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8월 15일 나철의 순교를 목격하고 내려온다.
【1917년】
- 1917년 그는 모교의 보성전문학교의 국어교사로 초빙되었으며, 그해 결혼하였다. 이어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의 국어교사로 초빙되었다.
【1919년】
- 1919년 3ㆍ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3ㆍ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헌병의 체포를 피해 한달간 서울시내에서 이집 저집으로 은신했다. 숨어다니면서 그는 망명을 결심하였다.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 그는 일제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부인만 홀로 서울에 남겨두고 상해로 탈출 망명했다.
- 4월 보성고보와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국어 교사직을 사퇴한 그는 총독부 경찰의 계속된 추적을 국경 압록강에서 따돌리고 안동현에서 상하이로 가는 영국 화물선박에 숨어서 이동했다.
- 상하이로 가서 출판활동에 종사하다가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위원을 맡았고, 1919년 7월 7일 개회된 제5기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지역구 : 경상남도 대표)에 선출되는 등 독립 운동을 했다.
- 1919년 10월에는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설립한 대한교육회의 편집국 국원으로 일하다가, 그해 이동휘 등을 통하여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 1922년에 1916년에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하여 “깁더 조선말본”을 상해에서 출판했다. 그러나 김두봉의 오랜 정성과 노고 끝에 만들어진 <깁더 조선말본>이 기대한 것만큼 상해 주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김두봉은 몹시 애를 끓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무장독립운동을 할 시간에 책이나 보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인식이 상해 주민들 사이에서 팽배하였기 때문이다.
【1924년】
-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가 된 김두봉은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상하이 한인 교민학교 인성학교의 국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1927년】
- 1927년 독립운동가 김구의 배우자 최준례가 상하이의 불조계 보경병원에서 사망하자 최준례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은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으로 순 한글체였다. 이는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ㅂ해 ㄱ달은 대한민국 6년 1월이라는 뜻이다. 이 일을 계기로 1948년의 남북협상 때 김구가 자신보다 10년 연하인 김두봉에게 인형이라 부르며 깎듯하게 대하게 되었다.
【1929년】
- 1929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으며 곧 한독당 비서장이 되었다.
【1930년】
-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이사가 되고, 같은해 11월 3일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11ㆍ3학생운동 1주년 기념식에 참가, 안창호ㆍ오의순 등과 함께 강연회 연사로 섰다.
【1932년】
- 1932년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김규식 등 9명과 함께 모여 중국에 있는 각 독립단체간에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하고, 모든 독립단체들이 수차례의 모임을 한 끝에 민족유일당 설립을 결정하였다.
【1935년】
- 1935년 6월에는 의열단 단장으로 일제에 저항한 경력이 있는 김원봉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같은 김해 김씨인 김원봉과 가까운 친척으로 오해되기도 했으나, 그의 돌림은 두자 돌림으로 김원봉과는 항렬자가 다른 먼 친척뻘이 된다. (다만 그의 외조카 박차정이 김원봉의 후처가 되었으므로, 모계로는 김원봉과 처당숙-처조카사위가 된다.)
-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김규식이 총재였고 김원봉은 당 서기였으며, 김두봉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고,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
- 1937년 1월 한국민족혁명당은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 1937년 남경(南京)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김두봉은 민족혁명당과 함께 남경을 떠나 사천성 중경까지 따라갔다.
- 상하이 활동 중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 김진익과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이후 김두봉의 첩과 김진익이 성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 첩이 임신을 하면서 김두봉은 그 첩 및 김진익과 결별하였다. 그 밖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김규식, 김원봉의 노선에도 다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충칭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1940년】
- 1940년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고 김원봉이 의열단을 중심으로 개편한 조선의용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와 합작하게 되자 그들을 따라 함께 활동했지만,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투쟁방안을 하자는 그의 의견이 거부당하자 그는 중경을 떠나 한인촌이 많이 밀집한 화북으로 떠났고, 섬서성 옌안에 자리잡았다. 중경을 떠나 어린 딸을 데리고 화북까지 갈 때 벙어리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1942년】
- 1942년 4월 옌안에 도착하였으며 군사단체를 조직하고 조선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한빈, 박효삼 등이 휘하에 모였고, 한인 사회주의 청년들들이 자원하였다.
- 이때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한 최창익 일파가 합류하였고, 연안에서 별도로 무장투쟁을 하던 김무정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 7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 위원장이 되었다. 조선의용군의 세는 확장되었고 1942년 7월 10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설치하였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1944년】
- 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다.
【1945년】
- 1945년 2월 김두봉은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1945년 광복후 일본의 패망은 예측했던 김두봉은 9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고 연안에서 4천 7백리나 되는 한반도를 향해 걸어서 왔다. 당시 중국 화북 지역엔 철도가 없었고 교통시설은 파괴되었으며 비롯 일반 차량마저 없는데다 의용군의 군용차량도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 귀국하는 길에 중국에서 새로 만난 아내 역시 연락이 끊긴채 그대로 중국에 남아있게 됐고, 연안에 데리고 있던 14세된 딸 김해엽은 데리고 왔으나 중경에 남아 소학교에 다니던 12세된 아들 김상엽과는 생이별을 하였는 등 가정적인 불행을 겪었다. 11월말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광복 직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만주로 추방되자 김두봉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하였다.
-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 평양으로 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신민당 당수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2월 21일과 22일 양일에 걸친 회의에서 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3월 연안에서 함께한 공산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독립동맹을 정당으로 바꾼 조선신민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지냈으나 1946년 8월 소련군의 압력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을 추진하게 되었다.
- 1946년 8월 그의 조선신민당은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 합당하였다. 이때 남한에 있던 조선신민당은 백남운의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다. 북조선노동당 통합창당 후 그는 북조선노동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 1946년 10월 김일성 대학이 설립되자 초대 총장에 임명되었다(1948년 9월까지). 총장은 김두봉이지만 명예직에 불과했으므로 실제적인 총장은 부총장인 한빈이었다.
【1948년】
- 1948년초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제정위원장 자격으로 그는 “태극기는 미 군정청이 권유하고 있으므로 새 민주주의 국가에는 맞지 않고 태극기의 근거인 주역은 비과학적이며 표준성이 없다”며 태극기 폐지를 주장했다.
-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북측 대표로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주영하 등과 함께 남측 대표인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회동하였으며, 김일성과 함께 단독으로 남측 대표의 주장격인 김구, 김규식과 4김 회동을 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5월 남북협상이 종결된 뒤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계획한다. 8월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박헌영, 홍명희, 김일성 등과 함께 남측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에게 참석을 부탁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였다.
- 1948년 9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가 구성되자, 의회의장격인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동시에 형식적으로나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직을 맡게 되었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 (연안파에서도 실제 최고 실력자는 최창익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김일성 체제에 불만을 품고, 연안파 중진들과 함께 저항하였다.
- 다른 계파와 경쟁관계 중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북한내에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연안파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1950년】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라는 곳은 조선의 심장부이니 우리 몸에 심장보다 중요한 곳은 없으니 심장을 장악하고 8월까지는 기어코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며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는 데 동조했다는 주장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류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 6ㆍ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에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임시정부 시절 동료였던 부통령 이시영에게 이승만이 도망쳤으니 이시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논리로 김일성과 (명목상의) 정상회담을 하자면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이시영은 이를 거부하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헌법 준수를 촉구하며 김일성과 대립각을 많이 세웠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매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당지도부에는 포함이 되었으나 김일성은 김두봉이 비조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계속하여 비판하였다. 무력감 때문에 김두봉은 소련측에 전쟁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퇴했을 것이라고 자괴감을 토로하였다.
【1952년】
- 1952년 김두봉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당을 대표하여 신년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1953년】
-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ㆍ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6】
- 김일성의 계속되는 토사구팽과 개인숭배 강화에 환멸을 느낀 연안계와 고려인 지도자들이 1956년 3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격하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에 맞서 8월 그룹을 조직하면서 김두봉 역시 여기에 합류하였다.
-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두봉은 주권기관 선거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했다. 어쨌거나 정치위원회에서 개편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 1956년 8월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 지도 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두봉은 처음에는 동참했으나 소련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원회의 2주일 전에 발을 빼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최창익, 박창옥 등을 비판하는 데 동원됐으나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최창익, 박창옥을 비판해야 하는 당 회의 때 늙어서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가버리는 등 반대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1957년】
-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대의원으론 재선되었으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최용건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영주가 주도한 열성자회에 끌려가 비판을 당했는데 늙고 병든 김두봉이 운신을 하지 못하자 김영주가 늙은 반동이 늙은 것이 벼슬인 줄 아냐고 못나오면 우리가 끌어내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개처럼 끌어내서 조리돌렸다.
【1958년】
- 1958년 3월 3일부터 3월 4일에 평양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제1차 대표자회 직후, 이른바 연안파숙청 때 ‘8월 종파사건’의 주동혐의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을 사퇴했다. 이때 그는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3월 4일 최창익ㆍ서휘 연안파, 박헌영 등 국내파 등과 함께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의 결의로 노동당에서 제명과 동시에 숙청되었다.
- 1958년 3월 7일, 김일성은 도, 시, 군당위원장들 및 인민위원장들에게 한 연설 <당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를 통해서 “김두봉은 자기가 대통령이니, 왕이니 하면서 거기에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하는 기술서기들을 궁녀라고 하고 상임위원회를 당보다 더 높다고 하였으며, 별의별 못하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상임위원회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1960년】
- 고령의 이유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평안남도 순안군 산골 오지의 한 지방협동농장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농사일을 하다가 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향년 75세였다.
-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1960년 1월, 박창옥, 최창익, 고봉기, 김웅 등을 총살하기 위해 비밀재판이 소집되었을 때 김두봉은 이미 병사한 후라서 재판에 회부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두봉과 같이 숙청당했던 박의완은 이때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유성철의 주장에 따르면 농촌으로 하방당한 후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농촌당원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유성철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대숙청 시기 소련 NKVD가 실제로 써먹은 방법이기는 하다.
【1961년】
- 1961년 장면 내각이 남북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홍명희와 함께 김두봉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기도 했다. 이미 숙청되어 협동 농장에서 노역하고 있던 시기 또는 사망한 시기이므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그가 해방된 뒤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남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인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80년】
- 1980년 초 그가 실각 이후 대한민국에 남파 간첩으로 보내졌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조선어문연구회와 과학원에 있으면서 조선어 신철자법과 조선어 철자법을 펴내는 일을 주도, 한국어 연구에 공헌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편 김두봉은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 까지는 사회주의와는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도록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안까지 와서 정치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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