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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金昌俊, 1888~1959]
감리교 목사, 민족대표 33인, 월북
【1888년】
- 5월 23일, 평남 강서군 증산면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 12월, 강서군 반석면에 있는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년】
- 강서군 일상리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무어(J. W. Moore, 문약한)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1911년】
- 경성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1911년 3월 15일부터 남ㆍ북 양감리회가 주최한 춘계 신학회 2년급에 출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1913년】
- 평양에 거주하며 남산현교회의 전도사의 일을 맡아 일하였다.
- 이 시기에 광성고등학교 부교장을 3년간 맡았다.
【1914년】
- 5월, 숭실대학을 졸업하였다.
-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에서 1년간 수료하였다.
【1917년】
- 귀국 후 1917년 3월 19일,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변영서와 함께 종로교회(현 중앙교회)로 파송을 받아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9년】
- 종로교회 전도사 시절,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의 간사 박희도의 권유에 따라 민족대표 33인으로 3ㆍ1운동 참여하였다. 당시 30세로 가장 어린 나이였다.
- 2월 28일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조선독립선언서 900매를 받아, 이 중 600매를 이갑성(李甲成)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京城靴商店)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운반하였다.
- 법정에서 장래에도 또 이런 운동을 할 기력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 나는 원래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온 자로서 금후도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실행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 12월 22일, 최린(崔麟)ㆍ함태영ㆍ오세창(吳世昌)ㆍ권동진(權東鎭)ㆍ이종일ㆍ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가석방되었다.
【1922년】
- 종로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하였다.
- 9월, 제15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가 되었다.
【1924년】
-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6년에 귀국하였다.
- 미국에서 시카고 한인교회를 담임하면서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6년】
- 6월, 개렛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8월, 에반스톤 서북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얻었다.
- 12월 27일, 귀국하여 다시 중앙교회를 맡아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감리회신학교에도 강사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29년】
-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부서기에 피선되었다.
【1931년】
- 9월 18일에 열린 중앙협의회에서 협성신학교 이사, 피어선 성경학교 이사, 조선주일학교연합회 대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표로 선택을 받았다.
【1932년】
- 10월 2일, ‘김창준 목사 교역 15주년 기념식’을 중앙교회에서 가졌다.
【1933년】
- 4월, 중앙교회를 사임하고 감리회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1934년】
- 『아빙돈성경주석』을 출간할 때 사사기의 번역 집필자로 참여하였다.
【1938년】
- 일제 말기에는 기독교의 내선일체, 황민화 체제의 첫 출발인 경성기독교연합회가 1938년 5월 8일 발회식을 가졌는데 김창준은 자의든 타의든 여기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친일자 명단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1940년】
- 1940년 10월, 신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고 1941년 3월 11일 특별총회는 연회를 해산하였다. 그는 이 총회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송을 받지만 부임하지 않고 은든생활을 시작하였다.
【1945년】
- 해방을 경기도 양주에서 맞았다.
-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평안북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6년】
- 2월, 좌익계의 민족통일전선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1947년】
- 광복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여 찬탁 운동을 벌이고 서울에서 좌파 기독교인들을 결집하여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는 등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48년】
-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때 38선 이북을 방문했다가 허헌, 홍명희와 함께 그대로 머물렀다.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되면서, 강양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사가 되었다.
【1950년】
-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 남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 6ㆍ25 이후 월북하였다.
【1951년】
- 2월, 김책 장의위원을 맡았다.
- 8월, 허헌 장의위원을 맡았다.
【1953년】
-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7년】
-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59년】
- 9월 29일, 별세하였다.
-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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