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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차]

채핀 [Anna Margaret Bair Chaffin, 1883~1977] 채부인(蔡夫人ㆍ蔡富仁), 미국미감리회 선교사, 목사, 신학자

by [수호천사]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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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핀 [Anna Margaret Bair Chaffin, 1883~1977]

채부인(蔡夫人蔡富仁), 미국미감리회 선교사, 목사, 신학자 / 9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영문서기(1932)

 

【1883년】

  • 9월 16일, 미국 아이오와주 매닝에서 네덜란드계 이민 후손인 완슨 베어(Watson Monroe Bair, 1858~1930)와 조세핀 올슨(Josephine Minnie Olsen, 1857~1915)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01년】

  • 라도라(Ladora)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4년간 봉직하였다.

 

【1906년】

  • 아이오와 주립대학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1907년】

  • 유니버시티파크의 존플레처대학(John Fletcher College)으로 옮겼다.

 

【1911년】

  • 유니버시티파크의 존플레처대학(John Fletcher College)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하였다.
  •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7월, 대학 2년 선배 채핀(Victor Duclos Chaffin, 1881~1916)과 결혼하였다.

 

【1912년】

  • 딸 모텔(Motel)을 낳았다.

 

【1913년】

  • 미국 미감리회 노스다코다연회 목사였던 남편의 목회를 돕다가 한국선교를 결심하고, 남편과 다섯 살 아래 동생 블렌치(Blanche Rosa Bair)와 함께 1913년 4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16년】

  •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정식 파송을 받지 않은 독립선교사 신분이었던 남편은 처음 1년간 동양선교회의 토마스를 도왔고 1914년부터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의 사역을 돕다가 1916년 6월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 남편 장례 후 귀국하지 않고 선교사로 남기로 결심하고 1916년 9월 동생이 속했던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디모인(Des Moines)지회의 파송을 받아 서울 죽첨정(현 충정로 3가)의 감리교부인성서학원 교사로 취임하여 앨벗슨(M. A. Albertson) 교장을 도와 여성목회자 양성사역을 시작하였다.
    미 감리회 여선교부가 1901년 설립한 부인성서학원은 1912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낸 후 1918년까지 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 각 지방 전도부인 및 교회학교 교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1919년】

  • 4월, 동생과 함께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 1년 6개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뉴욕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1920년】

  • 9월, 서울로 귀환, 건강 때문에 귀국했다가 별세한(1918년 12월) 앨벗슨 후임으로 부인성서학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감리회 여선교부와 미감리회 여선교부가 여자신학교를 합동으로 경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교명을 ‘협성여자신학교’로 바꾸었고 채핀 부인이 교장,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틴슬리(H. Tinsley)가 부교장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대학 수준의 신학교로 발전함에 따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종만과 홍에스더를 교수로 채용하였고 신학생의 목회실습을 강화하는 한편 학생들의 자급을 위해 제과부(Bakery Department)를 설치하였다.

 

【1926년】

  • 6월, 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할 때 서울외국인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미국 대학에 입학할 딸도 동행하였고 자신도 워싱턴D.C. 아메리칸대학과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두 군데서 학위를 받았다.

 

【1928년】

  • 9월, 서울로 귀환하여 협성여자신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고 컬럼비아교육대학교에서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 황애덕을 신학교 농촌사업과 교수로 초빙하여 최용신과 김로득 등 농촌사업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31년】

  • 1928년 9월부터 남자신학교인 냉천동의 협성신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 학생들의 ‘남녀공학’ 수업을 실험적으로 실시한 결과 1931년 12월 두 신학교를 통합, 조선총독부로부터 전문학교 인가를 받은 후 교명을 ‘감리교신학교’로 바꾸고 부교장으로 취임했다.
  • 1930년 12월 남북 감리회 합동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를 조직하면서 처음으로 ‘여성목사’ 안수제도를 채택하였던 바, 그 결과로 1931년 6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ㆍ동부ㆍ서부 연합연회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사역했던 여선교사 13명(동생 포함)과 함께 양주삼 총리사에게 ‘한국교회 최초’ 여성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 이 무렵(1931~1932년) 감리교신학교 기관지 「신학세계」에 “여성에 대한 기독의 태도”, “예수께서 보신 여자의 지능과 영성”, “예수께서 여자를 변호하심”, “여성에 대한 예수의 책망”, “예수와 버림당한 여성들” 등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의 여성들을 조명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여 여성신학자로서 면모를 드러냈다.
  • 1931년 기독교 가정잡지 「우리집」 편집인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기관지 「절제」 발행인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 9월 16~17일, 제9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에 선임되었다.

 

【1935년】

  • 제3차 안식년(1935~1936) 휴가를 다녀왔다.

 

【1936년】

  • 만주 선교사 데밍(C. S. Deming)의 초청으로 북만주지역을 다녀왔다.

 

【1937년】

  • 4월, 지린(吉林) 사평가에 만주선교연회 산하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만주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데밍의 급작스런 별세와 만주사변 이후 악화된 종교상황에서 재정지원도 줄어들어 성경학교 운영이 어렵게 됨에 따라 1937년 12월 철수하였다.

 

【1938년】

  • 3월, 천안지방에서 사역하던 동생 블렌치가 뇌암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신학교로 복귀하지 않고 동생이 사역하던 천안지방으로 파송을 받아 열악한 지방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의 50년 한국선교역사를 정리한 Fifty Years of Light를 편집ㆍ간행하였다.

 

【1939년】

  • 3월 8일, 천안읍교회에서 천안지방 목회자와 교인들에 베푼 ‘채부인 선교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 3월 9일, 천안읍교회에서 개최된 ‘배의례 목사 1주기 추모식’에서 동생이 남긴 유산 3천 원을 천안읍교회 예배당 건축기금으로 기부하였으며, 미국에서 보내온 조의금(2천원)에 사재(500원)을 합쳐 천안지방 여전도인 기금을 조성하였다.

 

【1940년】

  • 11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마리포사호로 귀국하였다.
  • 귀국후 결혼한 딸이 살고 있던 인디애나주 몬티첼오에 머물렀다.

 

【1946년】

  • 12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서울로 귀환하여 감리교신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의로 사역을 재개하였다.

 

【1947년】

  • 감리교신학교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다다.

 

【1948년】

  • 7월, 협성여자신학교 및 감리교신학교 제자들이 ‘채핀부인 선교35주년 기념사업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주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일해온 무의탁 은퇴 여전도사들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라며 30만 환을 기부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양로원 설립운동이 전개되어 1948년 10월 흑석동에 ‘채부인 선교기념 여전도인 안식관’이 설립되었다. 이것은 후에 정릉의 ‘여선교회 안식관’으로 발전하였다.

 

【1949년】

  • 총리원 이사 겸 부녀국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서울 감람교회 소속목사로서 서울남지방과 대전지방, 천안지방 여선교사업을 담당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태화여자관, 기독교세계봉사회 이사로 활약하였다.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3년】

  • 12월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선교사 활동보다는 미연합감리회 산하기구인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MCOR)의 한국 책임자로서 한국교회와 기독교기관의 전후 복구, 재건 사업을 지원하였다. 총 60만 달러 규모의 기금으로 사회사업과 농촌사업, 융자사업을 추진하였다.

 

【1956년】

  • ‘43년간의 한국선교와 봉사’ 사역을 마친 후 1956년 4월 2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 귀국 후에는 몬티첼로와 워싱턴D.C.를 거쳐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로빈크로프트에서 지냈다.

 

【1977년】

  • 93세로 별세하였다.
  •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남편과 동생 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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