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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차]

채필근 [蔡弼近, 1885~1973]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호는 편운(片雲)

by [수호천사] 2024.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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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필근 [蔡弼近, 1885~1973]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호는 편운(片雲)

 

【1885년】

  • 9월 16일 평남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채응빈(蔡膺斌)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1898년】

  •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으나 1898년 같은 설매리의 채정민(蔡廷敏)이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고 그가 다시 채씨 문중에 전도하게 될 때 믿기로 결심하였다.

 

【1899년】

  • 유학에 미련을 두었던 채필근은 부친의 결정에 따라 마지못해 교회에 출석하다가 1899년 길선주가 인도하는 사경회에 참석한 후 적극적인 교인이 되었고 그해 세례를 받았다.
  • 그는 북장로회 리(G. Lee) 선교사에게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설매동교회에서 설립한 용산리교회(龍山理敎會) 설교를 맡아 7년간 봉사하였다.

 

【1907년】

  •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제6회)하였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1910년】

  •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곳곳에서 결사대가 조직될 때 참여하여 서울까지 올라와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소위 ‘대한문사건’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평양으로 돌아와 대성학교장 안창호의 지도를 받으며 숭실내에 ‘청년학우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민족운동을 벌이려 하였다.

 

【1911년】

  • 안창호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 만주로 가던 중 회령에 들러 그곳에 있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바커(朴傑) 및 김영제 목사의 호의에 의해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의 조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함북 경흥ㆍ경원ㆍ온성ㆍ종성ㆍ회령ㆍ부령 등지와 두만강 건너 시베리아 우수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함북에 13처, 만주에 20처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았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시무하면서 2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성경야학교도 설립, 운영하였다.

 

【1913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 경흥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8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11회)하였다.
  • 함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흥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간 시무하였다.

 

【1919년】

  • 10월 14~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3회 조선장감연합협의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토오쿄오 한국 YMCA이사장을 역임했고, 토오쿄오한인교회에서 설교했다.

 

【1923년】

  • 메이지학원 고등학부 문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 토오쿄오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 졸업후 토오쿄오제국대학의 교수로 수차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여 숭실중학교 강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

  •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과 과장직도 겸임하였다.
  • 10년을 숭실전문학교에 있으면서 학교내의 기도회와 전도회를 인도하였고 평양의 신암교회, 연화동 일본인교회, 서문밖교회, 장대현교회 등지에서 임시목사 혹은 설교자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1934년】

  •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난관에 부딪치게 되고 마침 교회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장대현교회가 그를 초빙하게 되자 학교를 사임하고 목회 일선으로 복귀하였다.
  • 장대현교회의 문제를 수습해 나가며 4년간 목회하였다.

 

【1935년】

  • 송창근ㆍ김재준ㆍ한경직 등과 함께 집필자로 참여한 신생사의 《단권성경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장로교 총회에서 문제되었을 때 그는 즉시 사과문을 낸 일도 있었다.

 

【1938년】

  • 서울로 이주,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2년간 다시 강단에 섰다.
  •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가담하였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와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도 장로교 대표로 참여했다.

 

【1939년】

  • 서울의 김영주ㆍ차재명ㆍ김대현ㆍ함태영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 설립운동을 벌여 3월 조선신학원설립기성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0년】

  • 조선신학원이 개교하기 직전, 평양에서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고 그를 초청하게 되자 평양으로 가서 1940년 2월 평양장로회신학교(후평양신학교라고도 함)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3년】

  • 종래의 장로교총회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재조직될 때 그는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반대파는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출범한 이 조직은, 찬송가를 편찬할 때 기미가요를 싣고 시국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 예배를 올리는 등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애국기 헌납 운동라는 이름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후 친일 행위로 투옥되는 등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1946년】

  • 해방후 신학교를 떠나 1946년부터 평양 창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4년간 시무하였다.

 

【1950년】

  •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제주도 서귀포의 피난민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52년】

  • 부산 동광교회(현 서북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면서 동아대학 및 부산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 대통령촉탁 고등고시위원을 역임하였다(1952~1960년).

 

【1955년】

  • 부산장로회신학교 교장에 취임, 6년간 봉직하였다.

 

【1962년】

  • 서울 동숭교회의 청빙을 받아 시무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여자대학 강사로도 나갔다.
  •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를 역임하였다(1962~1965년).
  • 숭실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였다(1962~1966년).

 

【1963년】

  • 고등공무원교육원 강사를 역임하였다(1963~1966년).

 

【1973년】

  • 은퇴 후 산돌교회(예장 통합, 서울 소재)를 개척하여 계속시무하였다.
  • 1973년 3월 17일 별세하였다.

 

【기타】

  • 유족으로 부인(朴德惠)과의 사이에 2남(蔡義順, 蔡義春)이 있다.
  •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개신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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