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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차]

칭기즈 칸 [成吉思汗, 1162~1227년]

by [수호천사] 2024.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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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成吉思汗, 1162~1227년]

 

【1147년】

  • 몽골 쿠툴라 칸이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 변경을 공격하여 들어갔다.” “당시 금나라 도원수 김올술은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강화하고 물러났다. 서평 하북 27부락(단체)을 떼어 주고, 매년 일정량의 소와 양과 쌀과 콩을 보냈다.” (『몽골아사기』 권1)

 

【1161년】

  • 금 완안량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였다. “송 유기 등은 타타르 제국과 더불어 금 완안량을 토벌하였다.” (『삼조북맹회』 권232)
  • 송과 금의 채석 전투가 발행하여 금이 패하였다. 금의 동경유수 완안옹이 스스로 일어나 황제의 자리에 올라 금 세종이 되고 대정으로 개원하였다. 완안량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초원에서 세력을 확립하였다.

 

【1162년】 테무친 1세

  • 송 고종은 황태자 신에게 전위, 효종이 되었다.
  • 몽골은 타타르를 정벌하고, 예수게이가 테무친 우게를 포로로 잡았다.
  • 칭기즈칸 테무친이 태어났다. 『집사』에서는 테무친이 1155년 돼지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1163년】 테무친 2세

 

【1164년】 테무친 3세

 

【1165년】 테무친 4세

 

【1166년】 테무친 5세

 

【1167년】 테무친 6세

  • 『집사』에 의하면, 이해에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인에게 사로잡혀 독살당했다.

 

【1168년】 테무친 7세

 

【1169년】 테무친 8세

 

【1170년】 테무친 9세

  • 예수게이가 테무친을 데리고 쿵크라트부에 가서 구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인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 다음해 타이치우트부가 배반하였다.
  • “칭기즈 칸은 나이가 어려서 타이치우트, 메르키트, 타타르 등의 부족들에게 각종 고난을 당했다. 처음에는 각 부락에서 포로로 잡혔지만, 온갖 방법을 이용해 탈출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

 

【1171년】 테무친 10세

 

【1172년】 테무친 11세

 

【1173년】 테무친 12세

 

【1174년】 테무친 13세

 

【1175년】 테무친 14세

 

【1176년】 테무친 15세

 

【1177년】 테무친 16세

 

【1178년】 테무친 17세

 

【1179년】 테무친 18세

  • 이해는 여전히 “돼지해로 자식이 많은 해다.”
  • 테무친과 부르테가 결혼하였다. (『칭기즈 칸 전설』)
  • 보오르추와 젤데가 테무친에게 와서 충실한 누케르가 되었다.

 

【1180년】 테무친 19세

 

【1181년】 테무친 20세

  • 1180년경 부르테를 메르키트에게 빼앗겼다.
  • 이해 테무진은 케레이트부의 토그릴 칸과 자다란부의 자무카와 연합하여 메르키트부를 공격, 부르테를 되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테무친의 장자 주치를 낳았다.

 

【1182년】 테무친 21세

 

【1183년】 테무친 22세

  • 대략 1183년에서 1184년에 테무친은 자무카를 떠나 단독으로 숙영지를 건설하고 키얀부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 에린칭 선생은 테무친이 “몇몇 귀족에 의해 추대되어 칸이 되고... 이는 대략 12세기 1180년대 초의 일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내몽골대학학보》 1962년 제1기)

 

【1184년】 테무친 23세

 

【1185년】 테무친 24세

 

【1186년】 테무친 25세

 

【1187년】 테무친 26세

 

【1188년】 테무친 27세

 

【1189년】 테무친 28세

  • 금 세종이 죽고, 그 아들 완안경이 제위를 이어 장종이 되었다.
  • 송 효종은 태자 돈에게 선위하고 광종으로 하였다.
  • 『몽골비사』에 의하면, 이해 테무친은 비로소 키얀부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1190년】 테무친 29세

 

【1191년】 테무친 30세

 

【1192년】 테무친 31세

 

【1193년】 테무친 32세

 

【1194년】 테무친 33세

 

【1195년】 테무친 34세

  • 테무친이 칸을 칭한 후, 그리고 자무카와 대립이 발생한 바로 이때 13익 전투가 일어나 테무친이 반란하고, 금에서 우승상 완안양을 보내 토벌하도록 했다.

 

【1196년】 테무친 35세

  • 테무친은 토그릴 칸과 연합하고 금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타타르부를 공격하는 올자강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금은 케레이트부 토그릴 칸을 왕으로 삼아 ‘옹 칸’이라 하고, 테무친은 ‘자우트 쿠리’로 봉하여 금나라 여러 부족을 통할하도록 했다.
  • 나이만부의 이난차 칸이 기회를 보아 옹 칸을 공격하였고, 케레이트부의 권력이 동생에게 넘어가자 옹 칸은 서요로 도망갔다.
  • 그해 가릉 옹 칸이 서요에서 돌아오자 테무친은 그의 통치를 회복시켰다. 쌍방은 카라툰에서 거듭 부자의 관계를 맺었다.

 

【1197년】 테무친 36세

 

【1198년】 테무친 37세

 

【1199년】 테무친 38세

  • “이해 칭기즈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부 타양 칸의 동생 부이룩 칸을 공격했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크게 이기고 여러 장수와 부족의 무리를 몰살한 후 시체를 쌓아 올려 본보기로 삼았다. 나이만부의 세력은 점차 약해졌다” (『원사』, 「태조기」)

 

【1200년】 테무친 39세

  • 테무친과 옹 칸은 싸리환에 집결하여 군대를 동쪽으로 향해 타이치우트부와 그 동맹자를 토벌했다. “공격에 무너진 그들은 적군의 방면에서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1201년】 테무친 40세

  • 몽골 기년이 시작되었다.
  • 몽골 초원의 열두 개 부족이 동맹을 맺고 자무카를 공동 수령(구르 칸)으로 추대하였다. 테무친과 옹 칸은 그들과 결전을 진행하여 쿠이텐의 전투가 일어났다. 자무카 연합군이 패배하고 쿵크라트부가 테무친에 귀부하였다. 테무친은 타이치우트부를 공격하여 전복시켰다.
  • 제베가 테무친에 투항하였다.

 

【1202년】 테무친 41세

  • 테무친이 타타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 전쟁을 하기 전에 군령으로 “전리품과 재물을 약탈하지 말 것”을 선하였다. 알탄, 구차르, 다리타이옷치긴이 군령을 위반하고 테무친을 떠나 옹 칸에게 의탁했다. 테무친은 옹 칸과 의로 맺은 부자 관계 이상으로 가까워지기를 원했으나 “쌍방의 혼사 문제가 무너지고 틈이 생겼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1203년】 테무친 42세

  • 셍굼과 옹 칸이 테무친을 공격하여 칼랄지드 사막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테무친이 퇴각하여 물러났다. 군대가 흩어짐에 따라 테무친은 곤경에 처하고 열하홉 명의 부족 수령이 함게 발주나 호수의 물을 마셨다. 옹 칸의 연맹이 무너지고, 옹 칸의 황금 장막을 기습하여 패망시켰다.

 

【1204년】 테무친 43세

  • 테무친이 나이만부를 토벌하여 타양 칸은 죽고, 그 아들 쿠출룩이 도망하였다.
  • 자무카가 사로잡혀 테무친에 의해 죽었다.
  • 메르키트부의 톡토아 부자가 도망하였다.

 

【1205년】 테무친 44세

  • 테무친은 처음으로 병력을 보내 서하를 침입하였다. 로스 성을 지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서하는 수도 홍경부를 중홍부로 고쳤다. 병력을 보내 성벽과 보루를 고치고 경내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1206년】 테무친 45세

  • 테무친이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어 원의 태조가 되었다.
  • 송 한탁주가 병력을 내어 금을 공격하였다. 이를 역사에서 개희 북벌이라 한다. 송이 대패하고 금과 화의를 맺었다.
  • 서하의 다른 한 파인 이안전이 정변을 일으켜 순우를 폐하고 스스로 일어나 양종이 되었다. 금은 이안전을 서하의 왕으로 책봉하였다.

 

【1207년】 테무친 46세

  • 몽골이 재차 서하를 공격하고 알라카이 성을 함락시켰다. “동년 칭기즈 칸은 키르기스인이 사는 곳까지 사람을 보냈다. 키르기스인이 귀부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 주치가 명령을 받아 삼림에 사는 백성을 정복하였다.

 

【1208년】 테무친 47세

  • 서하가 금에 사신을 보내 병란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 남송은 한탁주의 머리를 들고 금과 화의를 청하였다.
  • 금 장종이 죽고 그의 숙부 위소왕 완안영이 제위를 이어받았다.
  • 칭기즈 칸은 수베에테이에게 톡토아, 쿠출룩을 추격하게 하였다. 톡토아는 전사하고 그의 여러 아들과 쿠출룩이 도망하였다.

 

【1209년】 테무친 48세

  • 칭기즈 칸이 세 번째 서하를 공격하여 중홍부를 포위하였다. 서하는 여자를 보내 화의를 요청하였다.
  • 위구르가 몽골에 귀부하였다.
  • 몽골과 금은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집사』에서는 몽골의 세 번째 서하 공격이 1210년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

 

【1210년】 테무친 49세

 

【1211년】 테무친 50세

  • 칭기즈 칸이 남하하여 금을 정벌하는 야호령 전투가 일어났다. 거용관에 들어가 사방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 서하 양종 이안전이 폐위되어 죽었다. 종실 제국 충무왕 언종의 아들인 대도독부주 이준욱이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가 서하의 신종이다. 서하가 금을 공격하여 번주, 경주를 격파하고 평량부와 동승주를 포위하였다.
  • 서요는 쿠출룩이 권력을 탈취하여 스스로 야율대석이라 칭하고 칭제하였다. 서요는 78년간 존재하였다.

 

【1212년】 테무친 51세

  • “이해 칭기즈 칸은 군대를 여러 아들이 나누어 지휘하게 하여 도시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금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허다한 다른 지역도 점령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 서하는 금이 누차 몽골에 패하는 것을 틈타 금의 변경을 침략하고,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과 소통하였다. 금은 이준욱을 하의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1213년】 테무친 52세

  • 몽골군이 금의 중도를 포위하고, 병력을 나누어 하동, 하북, 산동 90여 주를 공략하였다. 금의 중도에서 정변이 일어나 위소왕이 피살되었으며, 완안순이 제위를 이어 선종이 되고 정우로 개원하였다.
  • 서하가 계속 금을 공격하자 이로부터 쌍방이 서로 침략하여 1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니, 정예병을 모두 소진하고 결국 두 나라 모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214년】 테무친 53세

  • 금의 위소왕이 공주를 칭기즈 칸에게 헌납하고 동시에 황금과 비단, 말을 몽골에 보내 화의를 요청하여 중도의 포위를 풀었다. 오래지 않아 금 선종은 남경(지금의 개봉)으로 천도하였다. 몽골은 금이 수도를 천도하자 다시 중도를 포위하였다.
  • 서하는 금 공격을 송과 약속했으나 금의 원조를 받아 배반하였다.
  • 몽골은 서하의 변경에 들어가 만리장성을 파괴하고 위협하였다.

 

【1215년】 테무친 54세

  • 몽골군이 금의 중도로 내려가자 야율초재 등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군이 병력을 나누어 금의 860여 개 도시를 공격 점령했다.
  • 서하는 금의 섬서 보안, 연안, 수덕 등지를 공격하고 임조부를 함락했다.

 

【1216년】 테무친 55세

  • 몽골군이 금의 동관을 격파하고 선봉대가 개봉 부근의 행화영에 이르렀다.
  • 서하와 몽골 연합군이 금의 연안, 대주 등지를 공격하였다. 서하의 병력이 금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자 금은 엄격히 방비하여 반격하였다.
  • 그해 가을, 칭기즈 칸은 “금 정벌 전선에서 케룰렌 초원으로 돌아왔다.”

 

【1217년】 테무친 56세

  • 칭기즈 칸은 무칼리를 태사, 국왕으로 삼고 중원을 경략하도록 했다.
  • 금이 대거 동원하여 서하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금이 남송을 공격, 이때 금은 세 방향에서 적을 맞이하여 실패하였다.
  • 칭기즈 칸은 수베에테이를 파견하여 톡토아의 아들 쿠두 등을 토벌하였다. 쿠두 형제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 보로굴을 파견하여 투마트족을 평정하였다. 보로굴이 진에서 죽었다.

 

【1218년】 테무친 57세

  • 호라즘이 몽골 상인 450명을 살해하여 칭기즈 칸이 교섭단을 보냈는데 그 정사가 살해당하자 칭기즈 칸은 서정을 결정했다. 제베를 파견하여 서요를 정벌하고 쿠출룩을 죽여 서요의 고토을 차지한 뒤 호라즘에 접근했다.
  • 몽골이 병력 파견을 요구했으나 서하는 거부하고 출병하지 않았다. 몽골은 서하를 공격하여 중흥부를 포위했다. 준욱이 태자 덕임으로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서경으로 달아났으나 오래지 않아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청했고 몽골 군대가 물러났다.

 

【1219년】 테무친 58세

  • “이해 칭기즈 칸은 오르두에서 집회를 열어 대쿠릴타이를 소집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이란 지역 출정식을 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 오트라르 성을 포위 공격하고 병력을 나누어 변방을 정리하였다.
  • 무칼리는 지주 무장을 이용하여 금을 공격하고 순조롭게 나아갔다.
  • 서하는 변경에서 금과 통교하였는데, 후에 또한 남송과 함께 금을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1220년】 테무친 59세

  • 몽골군이 오트라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성을 연이어 격파하였다. 호라즘 무함마드는 수도를 포기하고 카스피 해 일대로 도망하였다.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고 무함마드는 해도에서 병사하였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우르겐치에 진군하였다.
  • 금은 몽골에 화의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남송과 서하가 함께 금을 공격하였다. 금은 서하의 유주를 공격하고 신퇴부를 포위하였다.

 

【1221년】 테무친 60세

  • 칭기즈 칸과 툴루이가 군대를 이끌고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역을 궤멸하였다. 우구데이 등이 호라즘의 구도 우르겐치를 공격하였다.
  • 몽골군이 수장 잘랄 앗 딘을 추격하여 신하(申河(, 인더스강)의 전투가 발생하고 잘랄 앗 딘은 인도로 도망하였다.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그루지야군을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하여 이라크를 소탕하였다.
  • 송과 몽골이 서로 사신을 파견하여 통호하였다. 금 군주는 추밀원을 소집하여 하의 일을 논의하였다. 서하의 군주 이준욱은 자카감보 장병 5만을 보내 몽골 무칼리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금나라의 가주(葭州)를 취하고 연안부를 공격하였다.

 

【1222년】 테무친 61세

  • 칭기즈 칸이 파르반에 주둔하고 바랄 등을 파견하여 인도로 잘랄 앗 딘을 추격하도록 했다.
  • 장춘진인 구처기가 사마르캰트에 와서 파르반에 있는 칭기즈 칸을 알현하였다. 가을 칭기즈 칸은 구처기에게 도를 세 번 물었다.
  • 칭기즈 칸이 회군하였다.
  •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오소드와 킵차크 등지를 침략하였다.
  • 몽골은 서하와 함께 금을 정벌하기로 약속하였다. 몽골군이 금의 하동ㆍ섬서를 공격하였다.

 

【1223년】 테무친 62세

  • 칭기즈 칸은 동쪽으로 돌아올 것을 명하였다.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통솔하는 몽골군이 러시아 킵차크 연합군과 칼가 강에서 싸워 러시아 킵차크 연합군이 대패하였다. 몽골군이 러시아에 들어갔다가 동쪽으로 돌아왔다.
  • 무칼리가 금의 봉상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서하군이 철회하였다. 서하의 신종 이준욱은 몽골이 죄를 문책할 것이 두려워 태자 덕왕에게 선위하고 태상황이라 칭했다. 덕왕이 즉 서하의 헌종이다.
  • 무칼리가 병사했다.

 

【1224년】 테무친 63세

  • 칭기즈 칸이 동쪽으로 돌아와 에르디시 강에 주둔했다.
  • 서하는 고비 사막 북쪽의 여러 부족에게 사신을 보내 원조를 받아 몽골에 대항할 것을 기도했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모반 기도를 듣고 무칼리의 아들 보로로 하여금 하의 은주를 공격하게 했다. 서하가 다시 금과 화의를 회복하여 형제 국가가 되었으며, 각자 본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서로 원조했다. 하는 몽골 선봉대에 사신과 질자를 보냈다.
  • 송의 영종이 죽고 양자 조윤(趙昀)이 제위를 이어 신종이 되었다.
  • 금 애종이 다시는 남송을 침략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1225년】 테무친 64세

  • 이해 봄, 칭기즈 칸은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란 지역으로 출정한 지 7년이다. 그는 오르두를 거쳐 여름과 가을에 탕구트로 출정하였다.” (『집사ㆍ칭기즈 칸사 편년기요2』)
  • 칭기즈 칸은 도중에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저 부상을 당했으나 물러나지 않고 서하를 공격하였다.
  • 금의 애종은 서하와 통호하기를 선포하였다.

 

【1226년】 테무친 65세

  • 칭기즈 칸은 몽골군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 서하를 공격하였다. 서로군은 수베에테이가 인솔하여 사주, 숙주, 감주 등지를 점령하였다. 칭기즈 칸이 친히 주력군을 이끌고 흑수성을 점령하고 사랑산에서 크게 싸우며 서량부를 포위하였다. 서하 군주 이덕왕은 두려움 속에 죽었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원조군을 격파하고 서하의 수도 중홍부를 포위하였다.

 

【1227년】 테무친 66세

  • 서하 정벌 1년여가 지나 서하는 멸망이 이미 결정되었다. 칭기즈 칸은 부상이 심하여 이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이리하여 그는 우구데이, 툴루이 등 아들을 불러 세 가지 중요한 유촉을 내렸다. 그 후 남은 병력으로 중홍부를 공격하도록 하고 차간을 중홍부에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 칭기즈 칸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적석주를 공격하고 금의 변경에 들어갔다. 서하 군주 이현은 항복을 청하고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였다.
  • 칭기즈 칸이 청수현 행궁에서 병사하였다. 장군들은 유명을 받들어 발상하지 않았다.
  • 서하 군주 이현이 투항 후 피살되었다. 서하 건국 190년에 이르러 멸망한 것이다.
  • 툴루이가 칭기즈 칸의 장례를 주관하고 그의 유해를 싸리환에 매장하였다. 아울러 오르도스 초원에 ‘의곤총’을 만들었다.

 

[참고] 주야오팅, 이진복 옮김, 『칭기즈칸 평전』, 민음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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