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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차]

채정민 [蔡廷敏, 1872~1953] 장로교 목사, 신사참배 반대운동

by [수호천사]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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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정민 [蔡廷敏, 1872~1953]

장로교 목사

 

【1872년】

  • 4월 28일 평남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채필영(蔡弼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7년】

  •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7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교인 중 한 사람인 이성하(李成夏)와 최일형(崔鎰亨)이 향리에 와서 전도할 때 기독교인이 되었고 같은 동네의 최훈(崔薰)과 함께 믿기 시작하여 문중과 마을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니 이것이 설매동교회의 시작(1898년)이 되었다.

 

【1898년】

  • 세례를 받았고 인근 용산리에도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0년】

  • 조사가 되어 북장로회 리(G. Lee) 선교사와 함께 중화ㆍ대동ㆍ곡산 등지 30여 교회를 돌아보며 목회를 시작하였다. 특히 의병들이 일어나 교회가 수난받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교인들을 구출하였다.

 

【1907년】

  •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김찬성이 인도하는 300여 학생들이 참석한 숭덕학교 기도회에서 솔선하여 통회자복하였다.
  • 스스로 부흥집회를 인도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학생들 사이로 부흥운동이 확산되게 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911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중화읍교회에 부임하였다.

 

【1912년】

  • 김관근 목사와 함께 구식 철자법으로 된 성서의 문체를 현대식으로 고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오늘의 성서문체를 확립시킨 선구자적 일면을 보였다.

 

【1918년】

  • 황해도 곡산읍교회로 옮겨 1년간 시무하였다.

 

【1919년】

  • 중화군 풍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던 중 3ㆍ1운동이 일어났고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3년간 피신하기도 했다.

 

【1921년】

  • 황해도 수안군 남정교회에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 중화군 상원면 신읍교회에 부임하여 10년간 목회하였다.

 

【1934년】

  • 은퇴하고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어 일선 목회에서는 떠났으나 보수신앙을 수호하는 글을 통해 활동을 계속하였다.
  • 1934년 8월 22일 『기독신보』에 채정민 목사가 “정통의 교회도 속염(俗染)은 가외(可畏) : 여자에게 언권 없다”라는 글을 기재하자, 최영혜는 1934년 9월 5일 『기독신보』에 “채정민 목사의 ‘여자에게 언권 없다’에 대하야”라는 반박글을 실어서 그를 비판하였다. 이 글에서 최영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치리권을 가져야 하는 이유 네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주님의 사명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장로교인 26만 명의 3분의 2 이상이 여성이므로 이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여성강도사가 필요하고, 셋째는 여성을 치리할 때는 여성을 잘 아는 여성 장로가 치리회에 참석하여야 하며, 넷째는 여성이 각기 받은 성신(성령)의 은혜를 표현하려 해도 강도권(설교권)이 없어 이를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1938년】

  • 신사참배문제가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 앞장 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고 이 때문에 70노구에 평양경찰서에 두 차례 검속되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주기철ㆍ이기선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

 

【1947년】

  • 해방후 1947년 월남하였다.

 

【1948년】

  • 선거가 주일에 실시될 계획임을 알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펴 결국 선거일자를 바꾸게 했다.

 

【1949년】

  • 국기경례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펴 역시 국기경례를 철회케 하였다.

 

【1950년】

  • 12월 한국전쟁 당시에 대구로 피난하였고 이후 조국 및 교회의 통일을 위해 사회와 교회에 대한 충고로 바쁜 생활을 보냈는데 그는 편지를 통해 지도급 인사들에게 경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던 노선지자”로 말년을 지냈다.

 

【1953년】

  • 3월 31일 대구에서 별세하였다.

 

【기타】

  • 강직한 신앙의 소유자로 특히 교회의 속화(俗化)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평양노회에서 마펫의 동상을 건립하려 할 때 직접 마펫을 찾아가 충고하였고 노회 안에서 투쟁하여 결국 기념관을 건립케 하였으며 해방후에는 신사참배 및 미소기하라이를 행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엄중한 회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 아들 기은(基恩)도 목사가 되어 〈기독신보〉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교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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