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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가]

김응태 [金應泰, 1890~1971] 감리교 목사, 감리교 호헌파

by [수호천사]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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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태 [金應泰, 1890~1971]

감리교 목사, 감리교 호헌파

 

 

【1890년】

  •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 장진학교를 졸업하고 보흥학교에서도 공부하였다.
  •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의 기독청년회관내의 삼류(三留)의숙 중학과를 마쳤다.

 

【1916년】

  • 일본 국민(國民)중학과를 졸업하였다.
  • 귀국후 수원 삼일(三一)학교와 충남 논산의 진광(眞光)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9년】

  • 교역자로서 견습을 받았다.
  • 충북 음성에서 목회하였다.

 

【1920년】

  • 진천에서 목회하였다.

 

【1921년】

  • 10월 2일, 집사목사로 연회에 입회하였다.

 

【1922년】

  • 만주 길림에서 목회하였다.

 

【1923년】

  • 하르빈에 파송되어 시무하였다.

 

【1925년】

  •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11회).

 

【1926년】

  • 6월 21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시무하였다(1926~1931년).

 

【1928년】

  • 9월 14일, 제5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통계서기를 역임하였다.

 

【1930년】

  • 9월 19일, 제7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서기에 피선되었다.

 

【1931년】

  • 일본에 파송되어 토오쿄오에서 시무하였다.

 

【1934년】

  • 공주에서 순회목회하였다.

 

【1937년】

  • 대전에서 교역하였다.

 

【1938년】

  • 인천내리교회에서 제14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1938~1941년)

 

【1941년】

  • 창영교회로 옮겼다.
  • 3월, 혁신안이 채택되고 연회 해산 뒤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통리자:정춘수)에서 경기남교구장을 맡았다.

 

【1943년】

  •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조직될 때는 전도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 7월 19일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완전 통합하였다. 초대 통리에 김관식 목사, 부통리에 김응태 목사, 총무에 송창근 목사였다.
  • 해방후 인천의 창영ㆍ화도ㆍ숭의교회와 인천성경학교에서 시무하였다.

 

【1955년】

  • 3월 감리교 제3회 총회에서 류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재선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분열하여 ‘호헌파’를 형성하였다. 호헌파는 그 동안 교권 세력에 의해 소외되어 온 남한 출신, 특히 충청도 출신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추태”를 “그대로 좌시 묵과”할 수 없어 ‘호헌’(護憲)을 주장한 것이다. 김응태 목사는 호헌파가 1955년 3월 별도로 조직한 총회에서 감독으로 추대되어 호헌파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1959년】

  • 다시 감리교가 하나로 통합되기까지 호헌파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김응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감독 취임 소감을 발표하여 호헌총회의 영속성을 명시하였다.
  • “서로 평화를 노력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조직 안에서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싸우느니보다는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적게 하는 것이 되리라고 믿어 부득이 새로이 총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미 별개의 조직으로 나누어진 이상 피차간에 논쟁이 없이 지나기를 바라며 서로 상대편을 축복하는 중에서 지나기를 희망한다”
  • 은퇴하여 인천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며 율목교회를 도왔다.

 

【1971년】

  • 5월 2일, 별세하여 율목교회에서 김용욱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갖고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기타】

  •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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