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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金永耈, 1887~1928]
장로교 목사, 승동교회
【1887년】
-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 일찍이 부모를 잃고 전도사인 외숙 신정균의 집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1895년】
- 한문의숙(義塾)을 거쳐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일어학교ㆍ영어학교ㆍ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 대한제국 탁지부 주임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1910년】
- 한일합방이 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이동녕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 열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동녕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귀국하였다.
- 만주 용정에서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아버님인 문재린 목사님의 결혼 때 축사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 잠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전북 김제와 고창에서 한국인을 위해서 헌신봉사하던 일본인 장로 마스도미 야스자이몽(枡富安左衛門)의 도움으로 양태승ㆍ윤치병과 함께 일본 코오베신학교에 유학을 하였다.
【1918년】
- 8월 16일(음), 장남 김종수 출생하다.
【1919년】
-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스도미 장로가 세웠던 고창군 부안면 오산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윤치병은 교회를 담임하였고, 양태승은 집사로 교회봉사를 하면서 학교일을 했다. 김영구는 기숙사의 사감과 외부전도, 주일학교를 맡았다.
【1921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을 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 승동교회 제5대 위임목사가 되었다.
- 10월 26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6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 피어선성경학원과 연희전문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 명설교가로 이름이 높아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학생이 많이 모여 설교를 경청하기도 하였다.
- 자신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들이나 고학생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 중에는 당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중이던 이환신 등도 있어 기도로 도와주고 의지하는 정을 지니기도 했다.
- 장공 김재준 목사가 김영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5년】
-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쿄오신학사(東京神學社, 현 東京神學大學)와 코오베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27년】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표로 함태영 목사와 같이 종교법안을 반대키 위해 일본기독교 및 각 종교단체와 연합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 국회와 또 일본 문무대신을 만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 한편 〈기독신보〉의 논설위원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복음전도에도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1928년】
- 미국에 유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4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 5월 20일(주일) 밤 예배시 요한복음 14장 1~3절까지를 본문으로 설교하였고, 다음날 새벽에 서재에서 주무시다가 별세한 것이다.
【기타】
- 아들 김종수(金宗洙)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서울 영세교회를 설립하여 부친의 대를 이었다.
- 손자 김충열도 목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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