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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가]

김동원 [金東元, 1884~1951?] 장로교 장로, 정치가, 실업가, 독립운동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독립운동가

by [수호천사]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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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金東元, 1884~1951?]

 

장로교 장로, 정치가, 실업가, 독립운동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독립운동가

 

【1884년】

  • 평양에서 대부호 김대윤(金大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그의 아우는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이다.
  • 어려서 조만식과 함께 평양 관후리에 있던 유명한 유학자 장정봉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

  •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 법과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 신병으로 중퇴 귀국하였다.

 

【1911년】

  •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되어 출감한 후에도 독립운동과 산업진흥에 전력을 다했다.

 

【1913년】

  •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1910년 8월 28일에 장로로 장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8년】

  •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조직될 때 장로교 총대로 참석하여 초대 규칙위원이 되었다.

 

【1919년】

  • 3ㆍ1운동 당시 길선주 목사 등과 함께 평안남도지구 「수뇌회의」를 구성하여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내의 평양지구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밀송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가 창설될 때 그 발기회 회장이 되어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고 독립운동도 계속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평안도책임직을 맡는 한편 항일단체인 청년학우회 총무을 역임하였다.
  • 8월 24일, 조만식을 총무로 하는 조선물산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거족적인 금주ㆍ금연 및 물산장려운동으로까지 확산되게 했으며 신간회 운동으로 연결되게 하였다.
  • 이와 더불어 사업에 투신하여 평안고무ㆍ평안섬유ㆍ태안양행ㆍ평안농사주식회사 등 기업을 경영하여 실업가로서도 괄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축적된 재산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위해 투자하였다.

 

【1921년】

  • 9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모인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계로 봉사하였다.
  • 9월 22일, 평양 남산현교회당에서 모인 제5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회계로 피선되었다.
  • 선교사 마펫(S. A. Moffett)과 협력하여 숭덕학교ㆍ숭현여학교ㆍ숭인학교를 설립, 지원하고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922년】

  • 7월, 평양에서 김성업 등과 함께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23년】

  • 2월, 조만식 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실행위원로 선임되었다.
  • 평양의 숭실전문과 서울의 세브란스의전 등 연합교육기관의 이사직을 역임하였다.

 

【1925년】

  • 동우구락부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개편하였다.
  • 평안고무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 평양상업회의소 평의원을 지냈다.

 

【1928년】

  • 8월, 평안양말공장 대표로 취임하였다.
  • 9월, 제17회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계에 선임되었다.

 

【1930년】

  • 수양동우회를 동우회로 개편하였다.
  • 평양고무공업조합 이사장, 평양상공회의소 부회두를 맡았다.

 

【1931년】

  • 만우 송창근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청빙할 당시에 산정현교회 당회원(조만식, 김동원, 변홍삼, 박정익, 오윤선, 최정서, 김찬두)이었다.

 

【1933년】

  • 1월, 조선일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창립 위원과 창립발기위원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6월 조선일보사 취체역을 맡았다.

 

【1934년】

  • 조선소년척후대 평남연맹의 간부로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종사하였다.
  • 조선일보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1935년】

  • 11월 평안농사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12월 평양의 유지들과 함께 만주 잉커우 방면에 40만원을 투자하고 동포 300호를 이주시켜 대농장을 창설했다.

 

【1937년】

  • 수양동우회 사건에 관련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 11월, 경성지방법원에 이광수, 주요한, 정인과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 1939년 12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검사가 판결에 불복하여 항고하여 1940년 8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 이 사건은 1941년 11월 17일, 경성 고등법원이 무죄판결을 선고함으로 종결되었다.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다.
  • 중일전쟁발발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한 행적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지역유력자 부문에 포함되었다.

 

【1940년】

  •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양부연맹 자문위원을 지내면서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3년】

  • 해방을 확신하고 송진우 등 선각자들과 함께 그후의 대책을 도모하면서 지도자의 분열을 막으려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1945년】

  • 8월 17일,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 9월, 조선고무동업협회 위원(평양 대표)을 맡았다. 이내 곧 소련군이 북조선지역에 입성하자 월남하였다.
  • 10월 5일, 미군정 장관의 행정고문에 임명되었고, 한국지사영접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 12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이 되었다.

 

【1947년】

  • 9월, 한국민주당 상임위원을 맡았다.
  • 10월, 한국민주당 기획부장과 국제연합조선협회 이사를 맡았다.
  • 12월, 국제연합조선준비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48년】

  • 한국민주당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서울 용산)되었고,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국회의장은 신익희였다)

 

【1949년】

  • 10월,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 상무집행위원을 맡았다.

 

【1950년】

  • 6월, 2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 용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납북 후 북한은 정치적 이용가치가 높다고 판단하여 김동원을 포함한 49명을 수용소에 넣어놨다. 이때 수용소 생활이 열악하여 동상에 걸렸다고 한다. 이후 49명과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에 있는 농가로 이동하여 생활하던 중 위독한 병과 함께 복막염을 얻어 위독해지자 북한은 김동원을 딴 곳으로 격리시켰다. 또한 북한은 김동원에 대한 문병을 철저히 막았으며, 오직 조소앙만이 문병이 가능해 가끔식 찾아와 위로를 하였다고 한다.
  • 북한 ‘재북인사들의 묘’에 묻혔으며, 비문에는 1951년 3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타】

  • 그의 사위로 김병기 화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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