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사전]/[가]

김유순 [金裕淳, 1882~1950] 감리교 목사, 납북

by [수호천사] 2024. 8. 21.
728x90

김유순 [金裕淳, 1882~195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감리교 목사, 납북

 

【1882년】

  • 12월 17일,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 하와이에서 목회하는 아버지(김영식)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6년】

  • “1906년에 하와이 한인교회의 청함을 입어 하와이에서 6년간 전도에 종사하였다.”
  • 그는 지방전도사로서 1906년에 오아후섬의 에와교회를 섬겼다.

 

【1907년】

  • 에와교회 외에도 아이와나교회도 목회하였다.

 

【1908년】

  • 하와이 지방회에서 와이파후교회, 와히아와교회, 아이에아교회에 파송되었다.
  •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존 W. 와드맨 목사가 교장이었던 한인기숙학교에서 교사, 도서 에이전트, 그리고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였다(1908~1909년). 1909년 첫 졸업생 6명 중 양유찬은 그 후 주미대사를 역임하였다.

 

【1911년】

  • 호항 밀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 미국 나성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바이올라대학으로 알려진 로스앤젤레스성경학교(BIOLA)에 입학하였다.

 

【1912년】

  • 7월, 로스앤젤레스성경학교(BIOLA)를 졸업하였다.
  • 9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3년】

  • 귀국하였다.
  • 1913년 8월 15일자 〈신한민보〉는 ‘김씨 환국’이라는 제하에서 “로스앤젤레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김유순 목사는 특별히 성신의 인도함을 받아 한국에 돌아가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수월 전에 상항을 떠나 하와이로 행하였더니 그곳에서 동포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일을 많이 행하고, 금월 1일 천양환(Tenyo) 선편에 귀국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 귀국후에 순회부흥목사로 활약하였다(1921년까지).

 

【1914년】

  •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 “3월 23일부터 10일 동안 평양 남산재 교당에서... 매일 밤에 평균 800여 명이 모여... 은혜를 받았으며 당일 기도회와 성경강론회를 행한 후에 전도사 1인을 더 두기로 작정하고... 심히 가난한 자는 밥 지어 먹던 옹달솥까지 팔아 드린 고로 당일 연조가 3백수십원에 달하였다 하며... 새로 믿기로 작정한 교인이 300여 명”이었다.
  • 8월 13일 자 〈신한민보〉는 ‘도덕상 열심’이라는 제하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롬폭에 있는 동포들은... 김유순 씨의 봉급을 도와주며 장차 전도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교우들이 고본금을 모집한다는데 벌써 고본에 응한 자가 13, 4인에 달하였는데 그 고본금은 매고에 25달러로 작정하였으나... 자본을 많이 얻은 후에 내지에 전도를 매득하여 전도 사무의 기초와 교육의 기관을 만들겠다더라”고 보도했다.

 

【1917년】

  • 11월,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전도하였다.

 

【1918년】

  • 9월 4일에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상항에 도착하였다.
  • 9월 7일,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김유순 목사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 뉴저지 드루신학교에 입학하였다(1920년까지 2년간 공부하였다).

 

【1920년】

  • 10월 12~13일, 개성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모인 제4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회계로 피선되었다.

 

【1921년】

  • 평양 남산현교회를 담임하였다.

 

【1923년】

  • 충남 홍성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26년】

  • 황해도 해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 9월 21일, 경성 정동미감리회예배당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통계표서기에 피선되었다.

 

【1929년】

  • 해주지방 감리사 겸 백천구역을 담임하였다.

 

【1930년】

  • 천안지방 감리사 겸 천안읍교회를 담임하였다.

 

【1935년】

  • 4월, 서울 만리현교회에서 시무하였다(제5대 담임목사).

 

【1946년】

  • 북아현교회(현재의 아현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8년】

  • 4월, 해방후 감리교 제9대 감독으로 피선되었으며 재건파와 복흥파가 대립된 교단을 통합시키는 등 감리교단을 이끌어갔다.
  • 중립에 선 화해론자였던 그가 감독으로 피선되어 다음과 같이 ‘주의 작은 종’ 된 자세로 새롭게 출발하는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천만 뜻밖에 금번 우리 총회에서 이 무능한 사람을 우리 교회의 감독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진실로 두렵고 떨립니다. …… 여러분의 종으로 피선된 이상에 여러분의 좋은 의견과 편달을 기쁘게 받을 작정입니다. 저 인력거꾼처럼 가자시는 길로만 가렵니다. 우편으로 가라시면 우편으로 좌편으로 가자시면 좌편으로 또 서라시면 서랴는 마음뿐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거룩하고 옳은 길인지 분명히 알고 꼭바로 지도하시옵시오. 그렇게 하여 주시면 교제는 주의 도우시는 대로 성심으로 쫓아 시행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조선감리회보>, 1949. 5. 15)

 

【1950년】

  •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공산군들은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구내에 있는 총리원본부를 점거하고 사용하였다. 김유순 목사는 이때에도 교단을 지키고 교인들을 돌본다는 의지 아래 총리원을 폐쇄치 않고 종로 인사동에 있는 중앙교회를 빌어 임시본부로 사용하였고 매일같이 북아현동의 집에서 이곳까지 출퇴근하였다.
  • 8월 23일,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내린 교역자 납치 및 사살령에 의하여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간 후 생사를 알 수 없다.
  • 납치되던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기타】

  • 그의 동생 김유택(金裕澤, 1887~?)도 감리교 목사가 되었고, 삭도(새크라멘토)한인감리교회, 나성(로스앤젤레스)한인감리교회 등을 섬겼으며, 에모리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로 하와이에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