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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가]

김종우 [金鍾宇, 1883~1940] 감리교 목사, 감리교 감독, 정동교회, 상동교회, 수표교교회, 하기아동성경학교 개설

by [수호천사]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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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金鍾宇, 1883~1940]

김종우 목사  [ 출처  :  상동교회 홈페이지 ]

 

감리교 목사, 감리교 감독, 정동교회, 상동교회, 수표교교회, 하기아동성경학교 개설

 

【1883년】

  • 9월 21일,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홍천에서 유학자인 김철교(金喆敎)의 아들로 출생했다.
  • 어려서부터 엄한 유교적 가르침과 훈련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부친이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으며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1898년】

  •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사립 보창학교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01년】

  • 9월, 스크랜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7년】

  • 아펜젤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받았다.
  • 졸업 후에는 관리등용의 길을 버리고 사업가가 되고자 만주로 갔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같이 같 친구가 마적단에 피살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1911년】

  • 피어선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15년】

  • 피어선성경학원을 졸업하고,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5회).
  • 동대문교회에서 2년간 시무하였다.

 

【1920년】

  • 정동교회로 옮겨서 1927년까지 시무하였다.

 

【1922년】

  • 10월 26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6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 국내에서 최초로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시작했고 이를 국내 모든 교회에 보급시켰다.

 

【1924년】

  • 9월 2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1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

  • 1천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증축, 재적교인 1천명이 넘은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1927년】

  • 정동교회를 사임하였다.
  • 경성지방 감리사가 되었다(1929년까지).

 

【1929년】

  •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1929~1932년).

 

【1932년】

  • 수표교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1932~1934년).
  • 9월 16~17일, 평양 서문외신학교에서 모인 제9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 다시 정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1934~1938년까지).

 

【1938년】

  • 양주삼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감리교 감독에 선출되었다.
  • 1938년 10월 12일에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차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총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의 뒤를 이을 감독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후보자가 8명이 나와 이틀간 21회에 걸친 투표를 하였는데도 재적회원 3분의 2를 넘는 당선자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셋째 날, 이날은 마침 총회 기간 중에 별세한 벙커 부인(A. E. Bunker) 장례식이 있어 총회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인 11시 30분에 총회가 재개되었다. 그때 조그만 해프닝이 벌어졌고 감독 선거의 판도가 바뀌었다.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아펜젤러(H.D. Appenzeller)의 증언이다.
    “총대들은 마루바닥에 앉았다. 모두들 기력이 쇠진해서 피곤해 있었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해서 비둘기 한 마리가 투표장 안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그러더니 그 비둘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상에 잠겨 있는 김종우 목사 바로 앞으로 내려앉았다. 김 목사가 조용히 손을 펴 내밀자 비둘기는 다시 날아 올라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벙커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심히 우울해 있던 상태에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표장 분위기가 바뀌어 김종우 목사에게 표가 몰리기 시작해 쉽사리 3분의 2 다수표를 얻을 수 있었다.”(The Korea Mission Field, Nov. 1939, p.241)

 

【1940년】

  • 9월 17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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