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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슬러 [Francis Kinsler, 1904~1992]
권세열(權世烈),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신학자.
【1904년】
- 1월 1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독일계 이민자 집안의 아서 루터 킨슬러(Arthur Ruther Kinsler, 1870~1950)와 버사 캠벨(Bertha Campbell, 1968~1930)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 내한선교사 중 캠벨 가문은 그의 외가 친척이 되고, 캠벨 가문의 메리가 솔타우 선교사(Theodore Stanley Soltau)와 결혼했기 때문에 솔타우 가문과도 관계가 있다.
- 또한 두 누나 마리안(Marian Kinsler, 권수라)과 헬렌(Helen Campbell Kinsler, 권신라)은 그보다 먼저 내한해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
- 프란시스 킨슬러는 1920~1925년 메리빌(Maryville)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한경직 등을 만나 교분을 나누었다.
【1927년】
- 1927년부터 트렌턴(Trenton) 제3장로교회에서 설교자, 전도사, 청년부 지도자 등의 사역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조지 매큔(윤산온)을 만나 동아시아 지역 선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1928년】
- 5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받아 10월에 내한하였다.
- 입국 직후에는 서울에서 두어 달간 한국어를 배웠고, 겨울에 평양선교부에 합류했다.
- 초기에는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영문학ㆍ성경 등을 가르쳤다.
- 숭실학교와 남자성경학교, 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 미개척 지대였던 만주 내륙, 몽골 방면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되는대로 북만주나 몽골 국경지대를 여행했다.
- 1928년 겨울 만주에서 사역하던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 선교사를 방문하고 내륙지대를 둘러봤다.
【1929년】
-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몽골 여행을 하기도 했다.
- 1929년 2월에는 평양 광문서림 2층의 빈 공간에서 6명의 소년에게 따뜻한 장소와 먹을 것을 제공하게 된 것을 계기로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한 개척구락부를 시작하였다. 교육 기회가 없던 이들에게 성경을 바탕으로 한 4년 과정의 기초 학습을 시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인데, 숭실전문학교나 평양 장로회신학교, 여자고등성경학교의 학생들이 봉사자로 참여했다.
【1930년】
- 1월 강계로 가서 성경학교 강습을 하고 국경지대를 돌아보았다.
- 2월에는 쿡(Cook)과 핸더슨(Henderson) 선교사와 함께 북만주까지 들어가서 현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가르쳤다가 중국 당국에 의해 쫓겨났다.
- 9월 18일 트렌턴교회 사역 중에 알게된 도로시 우드러프(Dorothy Wehmann Woodruff, 권도희, 1907.6.20.~2001.3.14.)가 한국으로 와서 매큔 선교사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도로시 우드러프는 1907년 뉴저지 트렌턴에서 윌리엄 우드러프(William Woodruff)와 에텔 웨먼(Ethel Weh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모친 밑에서 어렵게 자랐으며, 그의 가족은 트렌턴제3장로교회에 다녔다. 윌손대학에 다니던 시절 트렌턴제3장로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프랜시스 킨슬러를 만났다.
【1932년】
- 만주사변 이후로 현장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1932년 초에는 이를 단념하고 평양 사역에 집중하였다.
- 그는 평서노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각지의 교회를 두루 다니며 섬겼는데, 초기에 26개이던 교회가 나중에는 50개로 늘어났다. 또한 기독청년면려회, 전도부인 사경회, 여자선교회대회 등의 행사 지원에도 힘썼다.
- 1932년 5월, 첫째 도로시 헬렌이 태어났다.
- 1932년 12월에는 만주 신빈선교부의 요청으로 6주간 남자성경학교 강습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3년】
- 1933년에는 성경구락부 연합대회(Club Conference)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총 13개 지역에 지부가 만들어졌으며 강습을 받은 학생의 수가 천 명 단위를 헤아리게 되었다.
【1934년】
- 모임이 활발해지자 일제의 감시 손길이 미쳐 1934년에는 개척이란 명칭 대신 성경구락부로 개칭하였다.
- 4월, 둘째 아더 우드러프가 태어났다.
【1935년】
- 11월에 프랜시스 로스가 태어났다.
- 잠시 안식년을 가지면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학위를 마쳤다.
【1936년】
- 가족들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킨슬러는 가을학기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필두로 다시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1938년】
- 성경구락부 학생 수가 5천 명에 달했다.
- 신사참배로 인한 일제 당국과의 갈등으로 1938년 3월초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숭실전문학교, 성경구락부가 전부 문을 닫게 되었다.
【1941년】
- 1940년 7월에는 다른 선교사 7인과 더불어 반대 성명을 내기도 하다가 1941년 4월 미일 관계 악화로 귀국하였다.
【1942년】
- 3월부터 1948년까지는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948년】
- 7월에 다시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에 내한하였다. 부인은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 1948년 재입국 직후부터 경기노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여러 교회를 돌보기도 했다. 선교사 중에서도 설교자이자 신학자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총회 등의 행사에서 개회예배를 진행하거나 설교를 맡아 하기도 했다.
【1950년】
- 1948년 6월에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에서 교수직으로 사역을 처음 시작했으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한국전쟁 개전 직후에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고 부산에 남았던 6인의 북장로교 선교사 중 하나였다. 이들은 곧바로 전쟁구호활동을 시작했는데, 부산의 창고에 남아 있던 기독교세계봉사회(CWS)의 물품에 대한 관리와 분배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 대구와 부산을 오가면서 신학교와 성경구락부 사역과 더불어 구호사업까지 활발히 하였다.
【1953년】
- 1953년부터는 월간지 「지도자(The Leader)」를 발간해서 지역에서의 교육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1953년 6월부터약 1년간 안식년을 지내면서 모교인 메리빌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 안식년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장로회신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 군목제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목연합회 주관의 각종 수련회와 집회에 강사로 참여했다.
- 1954~1960년 군목부장을 역임하였다.
- 성경구락부 사업은 급성장해서 1953년에는 300개 가량의 구락부에 총 3만여 명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았다.
- 해방 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제도가 제정되었으나 1950년대 한국 정부의 형편으로는 이를 실행하기 역부족이었다. 이때 성경구락부가 초등교육기관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서 기존의 성경 강습에서 더 나아가 농사법ㆍ목수ㆍ이발ㆍ재봉 등의 기술교육가지 교육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1950년대 말 이후 초등교육 의무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에는 성경구락부의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 과정으로 진학하는 학생이 늘어나기도 했다.
【1955년】
- 성경구락부 교육받는 어린이가 7만여명으로 확대되었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중등교육 과정과 고등교육 과정도 신설되었다.
【1957년】
- 1957~1959년 군목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 한국전쟁 이후 신학교에 몸 담고 있으면서 그는 신학적 저술 사업도 활발하게 했다. 장로회 총회에서 추진된 주석서 사업에서 요한복음과 로마서 주석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1957년에는 자신의 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출판하였다.
【1959년】
- 1950년대 후반 장로회 내부에서 WCC와 에큐메니즘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이 있을 때 선교사들은 대부분 에큐메니컬 측에 섰으며, 킨슬러도 같은 입장을 공유했다.
【1963년】
- 1950년대 후반에는 차츰 한국교회의 자립과 주체성 회복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선교사들도 여러 사업 영역을 한국교회로 이관하기 위한 준비단계에 착수하게 되었다. 1963년 연합장로회선교회 구역협동사업위원회가 구성되는데 킨슬러가 회장을 맡았다.
【1964년】
- 연합장로회선교회 구역협동사업위원회 조직은 1964년 5월에 상호약정서를 체결함으로서 성과를 얻었다.
- 1964~1965년 군목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5년】
- 『인간 예수와 유혹』을 출판하였다.
- 2월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교육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 7월부터는 6개월간 안식년을 가졌다.
【1966년】
- 안식년 후 다시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다.
【1970년】
- 9월 한국을 떠났다.
- 이후에는 1976년까지 롱아일랜드 센터 모리치스(Center Moriches)장로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한인 이민자들을 도왔다.
【1978년】
- 성경구락부 창립 50주년 행사를 맞아 방문하였다.
【1981년】
- 장신대 개교 80주년 기념식을 위해 방문하였다.
【1991년】
- 총회신학교 1회 졸업생의 40주년 재상봉회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1992년】
- 1월 9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89세로 별세하였다.
【기타】
- 부인은 2001년 3월 93세로 별세하였다.
- 유해는 2001년 9월 15일, 부부가 함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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