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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선구적 3ㆍ1운동” - 김승태(2019)

by [수호천사]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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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2019).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선구적 3 1운동. 기독교사상, 722, 7-19

 

  • 19193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경기도 한성부(오늘날 서울)와 고양, 평안북도 의주와 선천,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함경남도 원산, 그리고 황해도 해주 모두 9곳이다. (7)

  • 이 지역 최초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동하였고, 교회의 조직과 인맥이 동원되었으며, 교회가 인근 지역 31운동 확산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7)

 

의주, 선천에서의 3ㆍ1운동

 

  • 의주에서의 31운동... 유여대 목사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한 길에 그곳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 장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1919213일부터 시작되었다. (7-8)

  • 양실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정명채, 김두칠... 김병농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북하동교회 영수 황대벽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 김이순이 독립선언서 취지를 담은 연설을 하였다... 김두칠, 정명채, 김이순, 김창건, 강용상은 독립선언서를 배포... (8)

  • 선천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선천북교회를 담임하던 양전백 목사가 1919213일 이승훈 장로,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전백 목사와 함께 선천 31운동을 주동한 사람은 당시 신성중학교 성경교사로 있던 홍성익이었다. 105인 사건의 동지이기도 한 그는 선천남교회 장로였으며, 이승훈과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동기였다... 홍성익은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의 김석창 목사와 신성학교 동료 교사 김지웅, 양준명 등과 준비 모임... 신성학교 학생들의 준비는 김지웅에게 맡겼다. 김지웅은 226일경 장일현, 고병간, 박찬빈, 김봉성 등 학생에게 28독립선언서 한 장을 주며, 등사판을 사용하여 등사하도록 하였다. 31일 오후 2시 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여 남천동 시장에 이르자 일반 주민이 가세하여 1,000여 명이 넘게 모였다. 그러자 김지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방향으로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당황한 일본 군경이 발포까지 하여 기수 강신혁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고, 교사 정상인과 학생 김하현 등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교사, 학생 등 50-60명이 검거되었다. 32일에도 기독교인은 선천북교회에서, 천도교인은 선천교구실에서 국장 봉도식을 갖고, 만세 시위에 나서 1,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이 출동하여 30여 명을 검거하고 예배당과 교구실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평양, 진남포, 안주에서의 3ㆍ1운동

 

  • 평양에서의 3ㆍ1운동 준비는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이 191929일 이승훈 장로의 소개장을 가지고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를 찾아가면서 시작... 그 자리에 장대현교회 부목사 변린서, 평양 예수교서원 안세환도 동참... 변린서 목사는 서문외교회 김선두 목사,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장대현교회 이덕환 장로, 윤원삼 장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도인권, 김성택 목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0)

  • 212, 13일경 윤원삼, 황찬영(숭덕학교 교사), 김제현, 곽권응(숭덕학교 교사) 등이 예수교서원으로 안세환을 찾아가 조선독립선언(28독립선언)으로 성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논의를 함... 215일 이승훈이 기차로 아침에 평양에 도착하여 기흘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서울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중국으로 떠나는 손정도 목사를 만나 평양 남산현교회 신흥식 목사를 소개받았다. 다음날 이승훈은 기흘병원에서 신흥식, 길선주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 참여를 확답받고, 저녁 기차로 상경하였다. 219일 신흥식 목사가 서울에 올라가 220-21일 이승훈, 박희도, 정춘수, 이갑성, 오기선 등 기독교 진영 대표 모임에 참석하고 222일 평양으로돌아왔다. 이후 신흥식 목사는 남산현교회 부목사인 박석훈 목사와 함께 평양 감리교계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11)

  • 191931일 장로교계는 숭덕학교 운동장, 감리교계는 남산현교회, 천도교계는 설암리 교구당에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하고 만세시위에 합류... (11)

  • 장로교계...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 담임 김선두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교회 전도사로 있던 정일선 장로가 독립선언서 낭독, 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 윤원삼의 만세 삼창... (11)

  • 일제 헌병경찰이 3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가 38일까지 검거한 인원만 400명이 넘는다. 그중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처분,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12)

  • 김선두 목사... 징역 12개월... (12)

  •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계 시위 주동자들은 그대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불복 공소하였다. 7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같은 판결을 받게 되자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은 929일 이들의 상고를 기각... 박석훈 목사는 1116일 옥사하여 1118일 장례를 치렀다. (12-13)

 

  • 진남포에서의 3ㆍ1

    운동 준비... 1919218일 진남포 삼숭학교 교장이자 신흥리교회 전도사인 홍기황이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목사 신흥식을 만나면서 시작... 222일 노윤길, 최병훈, 이겸로, 송영환과 함께 하기로 찬동을 얻음... 225일 다시 평양에서 신흥식을 만나 거사일이 31일 오후 2시라는 것을 듣고, 26일 진남포에 돌아와 노윤길의 집에서 담당할 일을 나누어 맡았다... 28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받아오도록 노윤길을 평양에 보냈으며, 노윤길은 31일 첫 열차로 선언서 500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날 오전 중 삼숭학교 교사 조두식에게 선언서를 발췌하여 1,000장을 등사판으로 찍고, 태극기도 등사하여 300개를 만들게 하였다. (13)

  • 31일 오후 2시 삼숭학교 남학생 100여 명, 여학생 5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이 신흥리감리교회당에 모여 고종 추도회를 갖고, 그 자리에서 홍기황이 독립선언서에 기재된 내용을 설명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나와 함께 지금부터 시내를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면서 행진하자라고 연설하자 모두가 만세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무명 베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 두 개를 앞세우고 600여 명의 시위대가 진남포경찰서 앞으로 몰려갔다... 홍기황 등 주동자들을 검거하였다. (13)

 

  • 안주에서의 3ㆍ1운동

    ... 191931일 읍내교회를 담임하던 김찬성 목사에게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전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찬성 목사는 안주에서도 그날 거사를 하기로 결단하고, 아들 김화식을 비롯한 교회 간부급 청년들을 자택에 소집하여 선언서를 등사하게 하는 등 준비를 하고, 교인들을 긴급히 동원하였다. 김화식 등 청년들은 오후 5시경 서문 밖에 모여든 교인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이들은 읍내로 진출하여 건인리, 청계리 방면에서도 모여든 군중에게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연설을 하였다. 300-400여 명이 참여... 일제 헌병대는 김화식, 박의송, 김희주, 김병제, 김병건, 전성걸, 전예순, 김영원 등 주동자 10여 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김찬성 목사는 피신하였다가 만주 길림 방면으로 망명하였다. (14)

 

원산에서의 3ㆍ1운동

 

  • 원산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원산부 남촌동감리교회(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 목사가 19192월 중순경 미남감리회 선교100주년 기념행사의 일로 상경하여 4-5일간 남대문 밖 신행여관에 유숙하면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열린 백년기념회에 참석하던 중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준비 소식을 듣고 참여한 데서 비롯... 종교교회를 담임하던 친구 오화영 목사의 부탁으로 216일 종교교회에서 저녁예배 설교를 하고 다음날 숙소인 신행여관으로 오화영 목사와 함께 찾아온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였다. (14)

  • 221일 원산에 돌아온 정춘수는 원산 중리교회 전도사 곽명리, 원산에서 약종상을 운영하며 장로교회인 광석동교회에 출석하던 이가순, 광석동교회 장로 겸 전도사 이순영을 포섭하여 비밀리에 원산에서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하였다. 226일 서울의 이갑성이 보낸 김성국을 만나 31일 거사 사실을 듣고, 원산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5-6명의 서명 날인서를 그에게 주어 이갑성에게 전하게 했다. 정춘수는 227일 곽명리를 서울에 보내 오화영 목사를 만나 확인해보게 했다. 곽명리는 오화영 목사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듣고, 그가 준 독립선언서 300여 장을 받아 228일 밤에 원산에 돌아왔다. (15)

  • 226일 정춘수로부터 거사일이 31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가순은 서울에서 작성된 선언서가 늦게 도착하거나, 제때 도착한다 하더라도 수량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이순영과 의논하여 독자적인 선언서를 작성 등사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가순은 선언서를 작성하여 이순영에게 전달하였으며 228일 밤 차광은 집에서 2,000매를 등사하였다. (15)

  • 정춘수와 이가순은 지도급 인물들을 228일 밤 진성여학교에 모이게 했다... 정춘수, 이가순, 이순영, 광성학교 교사 이진구, 보광중학교 교사 차광은, 보광학교 교사 차용운, 잡화상을 경영하던 김기헌, 고물상을 경영하던 오경달, 사립소학교 교사 김장석, 광석학교 교사 정연수와 이계술, 보광학교 교사 인이극과 함하은... 이가순 사회로 모인 준비모임... 정춘수 목사는 지금 우리 조선은 타국의 압력하에 있다. 우리 민족의 자유 행동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금번 구주전쟁의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치중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조선독립을 도모하려고 경성에 중앙부를 두고 조선 전도의 수뇌자 33명이 주동이 되어 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3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조선 각 도가 일시에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므로 여러분도 독립선언을 하고 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정춘수는 곽명리가 서울에서 가져온 선언서를 보고, 이가순과 곽명리에게 나는 내일 서울에 가니 이곳 일은 그대들 두 사람이 좋도록 처리해달라라고 부탁... (15-16)

  • 31일은 원산의 장날... 오전에 이가순은 곽명리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300매 중 50매를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하고, 이순영과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원산에서 자체적으로 제작 등사한 독립선언서 약 2,000매를 광성학교 학생들에게 주어 군중들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오후 2시 장촌동 시장으로 행진... 고물상을 운영하던 오경달은 북과 나팔을 학생들에게 나주어 주었다... 군중은 삽시간에 700-800명으로 불어났다.... 일본인 거류지를 지나 원산경찰서로 향함... 역전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 6시경 해산... 2,000명 정도 참가... 다음날까지 체포된 사람은 50... (16-17)

  • 체포된 50여 명 중 이가순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기소... 나머지는 태영을 집행한 후 석방... 기소된 이들은 19194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난 이계술, 김진완 2인을 제외한 11인 모두가 자신들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고... 7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17)

 

해주에서의 3ㆍ1운동

 

  • 해주읍교회를 담임하던 최성모 목사가 배재학당에 다니던 아들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박희도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단한 225일경부터 시작... 228일 아침 박희도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450매를 김명신에게 주며 미리 연락해 둔 해주남본정교회 오현경 목사와 옹진군 온천리교회 곽정숭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김명신은 독립선언서 300매를 최성모 목사의 편지와 함께 해주에 살던 교인 황학소에게 맡겨 오현경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28일 밤 황학소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편지를 전해받은 오현경 목사는 저녁 11시경 황학소, 임용화, 이동혁, 최명현 등 교인들을 집으로 불러 31일 오후 2시 교회에서 고종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새벽 1시 반경 헤어졌다. 그날 오후 2시 연락을 받은 교인들 170-180명이 모여 오현경 목사 주재로 봉도식을 마친 후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남은 선언서는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각 관청에 송부하게 했다.... 주동자인 오현경, 황학고, 임용하, 최명현, 이동혁 등은 그날로 해주경찰서에 구속되고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39일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봉영화, 최봉직, 정만기 등이 검거되여 먼저 체포된 주동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7-18)

 

북한 지역 3ㆍ1운동의 성격과 의의

 

  • 의주의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게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가 직접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고, 의주, 선천, 평양, 원산, 해주는 31민족대표를 배출한 곳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31민족대표의 영향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담임목사가 31민족대표로 참여한 경우... 의주 유여대 목사의 의주서교회, 선천 양전백 목사의 선천북교회, 평양 길선주 목사의 장대현교회, 신흥식 목사의 남산현교회, 원산 정춘수 목사의 남촌동교회, 해주 최성모 목사의 해주읍교회... (18-19)

  • 북한 지역의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는 기독교계 인맥과 교회, 학교 조직이 동원되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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