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김승태(2018)

by [수호천사] 2021. 2. 20.
728x90

김승태 (2018). 의주에서의 3 1운동과 유여대 목사. 기독교사상, 715, 108-119

 

의주 3ㆍ1운동

 

191931일 오후 2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108)

 

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백 수십 매도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를 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동경의 2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그날 새벽에 등사판으로 등사한 선언서를 낭독하려 할 때 마침 서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40-150매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108-109)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담아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09)

 

<독립창가>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天帝)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109)

 

시위대는 점점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헌병경찰은 유여대 목사 이하 주동자 7인을 헌병대에 구속했다. (110)

 

32일 시위부터는 천도교측이 가세... 그날 오후에는 기독교인과 주민 3,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30명이 체포됨... (110)

 

33...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 진압에 격분한 군중은 결사항전을 다짐... 3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6일까지 계속되었다. (110)

 

의주의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 목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에는 참여하지만 서울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의주 지역 일대의 독립선언식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약속했다...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 목사가 주도한 의주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 (110)

 

의주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김병조 목사는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날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111)

 

의주 인민의 독립선언

의주는 유여대, 김병조, 김승만, 장덕로 등 4인이 음력 정월 10일(양력 2월 10일)에 평북로회 축하차 선천에 가서 양전백의 집에서 10여 명의 동지와 더불에 국사의 광복을 공의한 후, 의주 일경(一境)의 일은 4인이 분담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중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서울)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하였으므로 즉시 이원익, 김창수, 안석응 3인으로 하여금 선언서를 도청과 군청 및 경무국, 헌병대에 전치(轉致)하고 시민에게 고루 선한(均傳) 후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가 헌양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 김이순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 숙운에 놀란 학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수 시간이 지나 일본군이 급히 이르러 유여대 이하 6인을 헌병대에 구류하였다가 그날 밤에 내보냈다. (111-112)

 

191956일 유여대 목사는 31운동참여 동기를 묻는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년(1919년) 2월 10일경 선천 평북노회가 끝나는 날에 나는 선천으로 갔다. 의주 방면의 노회는 의산노회라고 부르는 데, 전에 평북노회에 속하여 있었는데 작년에 위 노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작년까지의 전도회가 남아 있어서 이번에 분리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의산노회의 회계를 담임하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인데, 선천에서 양전백의 집에서 동인을 만났던 바 동인이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독립선언서의 대표자로 되면 어떻겠느냐고 하므로 나는 원래 조선독립의 의사가 있었으므로 거사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였던바, 양전백은 독립선언은 경성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찬성은 하겠으나 경성으로 가는 것은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의 일은 (내가) 담임하겠다고 말하여 두었다.” (112)

 

그가 실제로 선천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 장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날은 213일이었다. (112)

 

“선천에서 의주로 돌아왔으나 비밀인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월 17, 18일경에 의주면 서부동 과부의 집 숙박업소에서 정명채, 김두칠에 대하여 선천에서 양전백과 함께 약속한 사실을 전하고 위 두 사람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의주군 주내면 용운동교회에 동월 23,4일경부터 27,8일경까지 사경회가 개최되어 나는 성경을 가르쳤으나 그간에 나는 양전백으로부터 무엇인가의 통지가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2월 27일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주의 사람인 선천교회의 영수 도형균이 나를 찾아와서 독립선언은 3월 1일에 경성 및 각 지방에서 발표하기로 되었으므로 의주에서도 동일을 기하여 행하라. 그 방법은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보내올 터이니 그것을 낭독하고 발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는데, 2월 2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날 밤 정명채, 김두칠 등과 의주면 양실학교에 모여서 독립선언의 발표에 관하여 협의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20인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에 관하여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내일의 일에 관하여 순서를 상의하고, 내가 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더니, 누구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다른 곳에서 발표한 선언서(2ㆍ8독립선언서)가 있다고 하면서 한 장의 선언서를 내놓았으므로, 그 선언서를 등사하여 준비해 놓고, 만일에 경성으로부터 선언서가 오지 않을 시는 그 등사한 것을 배포하기로 결정하고, 정명채, 김두칠에게 그것을 등사하도록 명하고, 또 내일 오후 2시 반경 서교회당의 공지에 집합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안석응에 대하여 내일은 도청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명하고, 그날 밤은 서로 헤어지고, 그 다음날 3월 1일 오후 2시경 안석응에 대하여 어젯밤에 명령한 바와 같이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라고 말하고, 나는 오후 2시 반경에 상의한 장소로 갔었는데, 그때 양실학교 교사에 대하여 생도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교사는 생도를 데리고 그 장소로 왔고, 생도의 부형들도 참가하여 7-8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있던 중, 선천으로부터 약 200매의 선언서를 보내왔으므로 등사판으로 만든 것은 중지하고 그 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고 나는 그것을 낭독하고 일동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던 차에 헌병이 와서 우리들을 체포하였다.” (113-114)

 

유여대 목사의 법정 투쟁

 

유여대는 187812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사숙하여 18세 되던 해인 1895년 자택에 한문사숙을 열고 훈장을 맡았다. 안승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의주 서교회에 출석하면서 20세 무렵인 1898년 미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위대모)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5년 서교회에서 운천교회가 분립하고 부설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서교회에서 양실학원(양실중학교)을 확장할 때 최광옥, 이성하 등과 함께 교원으로 있었다. 1910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의주 동교회 영수로 있다가 1911년 그 교회 조사를 맡았다. 19148월 동교회 장로로 장립되고, 19156월 장로회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여,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모교회인 동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31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무렵동교회 교인은 300여 명이었다. (114)

 

유여대 목사는 31일 오후 독립선언식 직후에 안석응, 김창건, 김두칠, 장창식, 강용상, 정명채 등과 함께 헌병경찰에게 체포되어 의주헌병분대에서 신문을 받고, 34보안법 제7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 이송되었다. 37일 유여대 목사는 신의주지청 검사 신문에서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의 지휘자임을 인정하고, 민족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피력하였다. (114-115)

 

검사는 38일 이들 모두를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청에 기소하였으나, 사법부 장관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재판을 경성지방법원에서 취급하라는 총독의 명령이 있으므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하라는 전보를 받고, 325일 경성지방법원에 이송하였다. 이 사건을 인계받은 경성지방법원은 48일 이들의 공판을 당시 예심계류 중인 손병희 등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의 예심종결에 이르기까지 이를 정지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116)

 

유여대 목사는 5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참고인으로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을 때에도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토로하였다... 공화정부 언급... (116)

 

81일 손병희 등 47인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자, 경성지방법원은 유여대 목사를 비롯한 의주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을 재개하여 814일 민족대표였던 유여대 목사와 안석응, 김창건 등 6인의 재판을 분리하여 판결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손병희 등 47인의 예심 결과와 같이 관할위’(해당 사건을 담당할 수 없음)로 판결하여 이후 고등법원에서 손병희 등 47인과 함께 병합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117)

 

그리하여 고등법원 검사국은 826일자로 유여대를 손병희 외 46명에 대한 내란 피고사건과 병합심리하도록 고등법원에 예심청구를 하였다. 19203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이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에 다시 배정된 이 재판은 같은 해 89공소불수리’(공소 기각) 결정을 하였다.

 

920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공판 3일째인 922일 유여대 목사에 대한 판사의 법정 신문이 있었는데, 여기서 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그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노라라고 대답하였다... 1030일 경성복심법원은 징역 2년에 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을 형기에 산입하도록 판결했다. (118)

 

상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 서대문형무소에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천도교의 홍기조 도사와 함께 1921116일에 만기로 출소하였다... 1921117일 자 동아일보 보도... (118)

 

출옥 후 의주 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31운동으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52월에 그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120여 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18)

 

1934년 신병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 후학들을 위해서 계몽적인 저술 활동에 힘써,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등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113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19)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