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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토마스 뮌처의 윤리사상” - 권진관(1991)

by [수호천사] 2021.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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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관(1991). 토마스 뮌처의 윤리사상. 기독교사상, 35(10), 95-112

 

I. 토마스 뮌처의 생애

 

  • 츠비카우의 예언자, 특별히 슈토르크의 영향을 받았다. (96)

  • 츠비카우에 머무르는 동안 뮌처는 루터의 구속의 중심 원리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오직 믿음만으로부터 성령의 임재 전()에 주어지는 예비적인 인도자로서, 신비스러운 개인적인 십자가로 전환하였다. (96)

  • 슈토르크와 함께 뮌처는 프란치스코 파의 수도사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바, 그들은 가난한 민중들을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겠다는 그들 자신의 서약에 대한 반역자들이라고 비난했다. (96)

  • 프라하야말로 자기의 개혁의 확실한 중심지이며, 개혁의 시기가 왔다는 확신이 서자 뮌처는 1521111일에 프라하 선언을 제시한다. (96)

  • 알슈테트 체류기간 결혼하고, “모든 개혁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설교를 했다. ‘선민연맹이라는 비밀 단체 조직. (97)

 

II. 뮌처의 혁명 신학

 

  • 뮌처의 혁명적이고 신비적인 성령주의는 플로라의 요아킴(중세 이탈리아의 유명한 성령주의자), 요한 타울러(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 니콜라스 슈토르크(츠비카우의 예언자), 그리고 요한 후스(체코의 혁명적인 개혁자)의 영향을 받았다. (98)

  • 뮌처는 역사에 대한 요아킴의 급진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 , 지금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시기이다. (98)

  • 뮌처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힐 때 타울러와 같은 용어를 쓴다. 타울러는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으로서 내적 고난을 강조했다. 이것은 뮌처의 구원 교리에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얻기 위한 신비적 체험의 주된 구성 요소가 된다. (98-99)

  • 뮌처는 니콜라스 슈토르크의 신비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슈토르크는 예언자의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다처제, 성인세례, 경제적 공산주의, 그리고 모든 정치ㆍ경제 구조의 전복을 옹호했다. 조지 윌리암스와 에릭 그릿쉬는 슈토르크의 영향이 뮌처의 신학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데에 동의한다. 슈토르크의 성령주의 아래서 뮌처는 루터의 신학을 극복했다. (99)

  • 후스 파의 급진적인 단체, 특히 타보르 파는 사도적인 순수함을 따르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 쓰는 무력을 정당화했다. 후스파와 타보르파의 이러한 면을 뮌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99)

  • 1. ‘오직 성서만의 교리에 대한 대조로서 성령 성령은 성서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를 초월한다. 터키 족들이나 이교도도 경건한 자들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뮌처의 성령주의는 계시에 대한 기독교의 전매 특권을 깨뜨렸다. “성서 자체는 그 자체를 능가한 것을 가르친다. 성서의 저자들은 성서가 없었는데도 믿음으로 충만했다. 성서 그 자체는 계시가 아니다. 성서는 성서 저자들의 믿음과 그들의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99-101)

  • 2.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대한 대조로서 제자도(그리스도를 본받음) : 뮌처의 구원 교리는 루터의 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특히 타울러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신자는 내적으로 거룩해진다. (101)

  • 조지 윌리암스의 뮌처의 내적 정화 세 단계... 1) 선택된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버리는 영혼의 비참함과 절망의 심연을 알아야 한다. 2) 은혜로운 막대기인 각 개인의 십자가를 받는다. 3) 성령을 받음과 더불어 선택된 자는 성서를 열 수도 있으며 영들도 분별하는 다윗의 열쇠를 얻게 된다. (102)

  • 뮌처에게 있어서, 제자도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은 매우 중요하다. (102)

  • 뮌처는 루터가 그리스도의 고난만으로 족하다는 이유로 꿀 같이 달콤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 보았다. 뮌처에게 있어서 루터에 의한 대속의 교리는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뮌처는 그 대신 쓰디쓴 그리스도를 설교했다. (102)

  • 뮌처의 신학은 제자도에 초점을 맞춘다. 신실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자들이 된다. 뮌처의 신학에서 죄 사함은 본질적으로 중심이 아니고 제자도의 없어서는 안될 기초이며 전제 요건이다. (102)

  • 중세 천주교의 인간 중심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를 반향하고 있다. (103)

  • 3. 혁명적인 성서 해석... 뮌처는 자기를 포함하여 성령을 받은 경건한 자들만이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103)

  • 뮌처는 그의 영주들에게 드리는 설교에서 바울의 로마서를 급진적인 혁명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에게 있어 로마서 13장은 항거의 권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반면에, 루터는 복종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103)

  • 뮌처의 로마서 131-4절 해석 (103-104)

 

III. 토마스 뮌처의 윤리사상

 

1. 금욕적인 거룩함

 

  • 뮌처는 성령 체험을 위한 선제조건으로서 십자가를 말한다. 뮌처에게 있어서 의롭고 참된 신자는 더 이상 육적이지 않은 새로운 기질을 가진 변화된 사람이다. 이러한 자의 윤리적 특성은 금욕적인 거룩함이다. 다른 재세례주의자들처럼 뮌처는 내적인 거룩함은 외적인 거룩함에서 분명해진다고 주장한다. 왜나하면 성령의 열매는 그들의 거룩함(즉 금욕적인 거룩함)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룩한 금욕주의는 급진적인 혁명을 위한 격동적인 힘으로 바뀐다. (104-105)

  • 금욕적인 거룩함은 신자로 하여금 고통의 세상적인 뿌리의 멸절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뮌처의 금욕적인 거룩함은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라는 극단적인 이원론으로 나타난다. 공존불가능. (105)

 

2. 종말론에 대한 대망

 

  • 그의 목표는 초대교회의 회복이 아니라 이 땅 위의 삶이 하늘나라의 삶으로 변형되는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참 자유에 있다. (106)

  • 영주들에게 드리는 설교와 다니엘 2장의 해석 (106)

 

3.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회ㆍ종교의 혁명과 선택된 자들의 폭력권

 

  • 뮌처의 혁명적인 사상은 제자도(그리스도에 대한 본받음)에 근거한다. 믿음이 내적인 삶 가운데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고 이기는 힘이라면, 믿음은 동시에 죄의 결과인 현존하는 권위체제를 공격하는 혁명의 원리이기도 하다. 제자도은 안으로는 신비적이며 겉으로는 혁명적인 행동이다. 뮌처의 제자도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람 안에서, 사람을 통하여, 사람과 함께행동하신다. (107)

  • 뮌처는 의지와 자유를 강조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협력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인간이 의롭게 행하길 원한다면 천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108)

  • 뮌처에 따르면 정부와 왕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정부가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에 검을 빼앗기 위한 혁명의 권리가 있다. (108)

  • 뮌처에 의하면 경건한 자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109)

  • 가난에 대하여 뮌처는 미가서 3장을 언급하면서 사회의 현실을 사악한 것으로 그렸다. 뮌처의 사고에서, 가난한 자들만이 불경한 자들을 대항하는 싸움에 나갈 하느님의 도구로 미리 정해진 자들이다. (109)

 

IV. 재세례파 전통에 끼친 뮌처의 영향

 

  • 16세기 재세례파의 세가지 부류 : 1) 남부 독일과 중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재세례파, 2) 스위스와 스와비 지방에 있는 스위스 형제단, 3) 저지대 나라(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 있는 멜키오프 파라고 하는 재세례파 (110)

  • 콘라드 그레벨이 이끄는 스위스 형제단 (110)

  • 급진적인 뮌스터 왕국의 몰락 후에 평화적인 메노 시몬즈 가 나왔다. (110)

  • 뮌처와 재세례파 사이의 관계는 아마도 토마스 뮌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을 한스 후트, 한스 뎅크, 그리고 멜키오크 링크가 이끄는 남중부 독일의 재세례파주의 단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되고 있다. (110)

 

V. 맺는 말

 

  • 뮌처는 위대한 신학자(또는 종교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위대한 혁명가였다. (111)

  • 뮌처는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의 길을 열기 위한 종교-사회 혁명을 원했다. (111)

  • 뮌처는 어떤 종파나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트뢸취의 유형학의 분류대로 소종파주의자라기보다는 신비가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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