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련(2012), 신학과 현장 제22집
1. 서언
-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와 관련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근본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압박하였다. (31)
-
칼 5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요, 교황에게 가톨릭 신앙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기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분쇄하려고 시도하였다.
-
농민전쟁과 관련하여 루터에 대한 로마교회의 날카로운 책임 추궁은 루터로 하여금 아래로부터의 개혁에서 제도적이고 국가교회적인 개혁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32)
-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인간의지에 대한 논쟁 (32)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가 로마교황청의 전위부대가 되어 개신교의 박멸을 시도 (32)
2. 교황 레오 10세
-
“95개조 논제 해설”(1518년) : ‘95개조 논제’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독립성을 띤 중요한 종교개혁적, 신학적 논설 – 그리스도인의 계속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십자가 신학’에 중심을 둔 이 해설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33)
-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나소서’ : 루터에 대한 파문협박장 (34)
-
“일어나소서, 오 주여! 당신의 소송 사건을 심판하소서. 한 마리의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오 베드로여! 당신의 피로 성별된 모든 교회의 어머니 되는 거룩한 로마 교회의 형편을 살피소서. 일어나소서. 오 바울이여, 당신의 기르침과 죽음으로 이 교회를 밝히셨으며 지금도 밝히시는 분이여! 당신네 모든 성자들이여! 그리고 모든 세계의 교회들이여! 이 교회의 성경해석이 공격을 받고 있나이다. 우리는 그 옛날 여러 이단이 오늘날 독일 땅에서 다시 실이 나는 것을 보니 슬픔을 금할길 없도다. 우리가 그렇게 상심하는 것은 독일 이 끊임없이 이단 박멸에 앞장 서 왔기 때문이도다. 우리의 목회 사역에 비추어 볼 때 날뛰는 다음의 41개 오류의 독소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도다(이아서 41개 조항이 열거 된다). 우리는 그 뱀이 주님의 포도원에 기어 다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도다. 이단 사상이 들어있는 루터의 책들은 조사되어 불태워져야 한다. 괘씸하도다, 마틴 루터 자신만 해도 그렇지, 그의 잘못을 취소하게 하는 데 우리는 아버지 같은 사랑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과 여행경비를 제공하지 않았던가?(그러한 제안이 루터에게 한 번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선임자 피우스 2세와 율리우스 2세가 교회회의의 개최 호소를 이단 의 처별로 위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뻔뻔스럽게 앞으로 교회 회의를 열도록 호소하는 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마틴에게 복종하도록 이 교서가 그의 지역에서 선포되는 날로부터 60일을 주노라. 누구든지 우리의 파문과 저주를 어기면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살 것이다. 1520년 6월 15일” (34)
-
로마교회가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41개 항목은 오히려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것이다... 1)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형식적인 회개보다 참된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이다. 2) 강요된 통회가 아니라 마음 중심의 통회가 중요하다. 3)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4). 교황이나 감독이 죄의 용서를 선언할 권리가 없다. 5) 성찬에 있어서 믿음이 중요하고 2종 배찬을 허락해야 한다. 6) 면죄부는 구원과 전혀 관련이 없고 구원의 효과도 없다. 7) 일반적으로 파문은 부당하고 기독교인은 파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8) 교황이나 공의회의 결정이 구원이 불필요하다. 9) 아담 이후 자유의지는 다만 명목뿐이다. 10) 모든 판단의 최종적인 시금석은 성경이다. (35)
-
루터에 대한 청문회 및 이단 재판이 개시된 때부터 교황의 파문 교서가 발표될 때까지 거의 2년이라는 기간이 있었고 이러한 시간적 여유는 루터 재판에서 이점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적 여유는 루터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35)
-
교황 레오 10세, 말라리아로 사망(1521년 12월) - (36)
2. 칼 5세(Karl V)
-
종교개혁 당시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약 300명의 봉건 영주가 지배하는 제후국가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착취의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36)
-
신성로마제국인 독일은 7선제후에 의해 뽑힌 스페인 출신의 카톨릭 교도인 칼 5세가 황제로 다스리고 있었다. (36)
-
칼 5세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낀 교황 레오 10세는 원래 프레데릭 선제후를 통해 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37)
-
칼 5세는 피렌체와 교황의 집안인 메디치 가문을 보호할 것과 가톨릭 신앙의 적을 분쇄할 것을 교황에게 맹세하였다. 그래서 레오 10세는 칼 5세의 선출을 인정하고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정식 책봉하였다. (37)
-
칼 5세가 당면한 세 가지 임무 : 1)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프랑스와의 패권 싸움, 2) 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을 보호하는 일, 3) 철저한 카톨릭 신자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분쇄하고 로마교회의 단일 체제를 유지하는 것. 그러나 칼은 앞선 두 가지 세속적인 전쟁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적절히 막지 못하였다. (37)
-
칼 5세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의 경쟁 (37)
-
칼 5세와 오스만 제국의 술탈 슐레이만 5세와의 경쟁 (38)
-
1536년과 1542년에는 숙적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오스만의 슐레이만 황제가 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칼 5세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38)
-
카톨릭 신봉자인 황제는 루터를 저주받을 이단자로 생각하였으나 그를 처형해 독일 국민의 감정을 상하고 싶지 않았다. (38)
-
보름스 제국회의(1521년 4월) 이후, 황제는 루터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루터의 체포와 처형, 그리고 그의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그 선고는 루터가 죽을 때까지 유효했으나 교황도 황제도 이 독일국민의 영웅을 감히 처형하지 못하였다. … 작센의 프레데릭 선제후는 루터의 후원자로 보름스 칙령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바르트부르크로 피신시켜 종교개혁을 성사시켰다. (39)
4. 토마스 뮌처
-
뮌처의 오명 : 루터와 대립하여 정반대의 종교개혁 추진하고 종교혁명적 사회개혁을 시도했기 때문. (40)
-
사회적 불의에 대한 뮌처의 반발심은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라는 종교적 열정과 일치되어 마침내 열광적인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뮌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아세례보다 신앙적 자의식을 가지게 하는 성인세례(재세례)를 주장하였다. 그는 신앙적이고 역사적인 자의식을 가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명인 사회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뮌처의 신앙적 이상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었다. (40)
-
뮌처는 “나는 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한다”라는 강한 자의식과 함께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령의 지시를 받았음을 주장하였다. (41)
-
뮌처는 루터파인 에그라누스와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주제로 신학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뮌처는 참된 신앙이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행동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41)
-
선포나 설교의 내용도 루터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달콤한 그리스도”가아닌 경고와 심판을 강조하는 “쓰디 쓴 그리스도”라는 신비주의적 가르침을 전개하였다. 뮌처에게는 그리스도 고난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칭의를 얻는 전제조건임을 역설하였다. (41)
-
뮌처는 후쓰파가 있는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로 들어가서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에 버금가는 종교혁명의 신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것이 곧 프라하 선언이다. (41)
-
프라하 선언 : 1) 기존 교회의 죽은 문자신앙에 반대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령신앙을 주장, 2) 종말론적 역사관에 입각한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촉구, 3) 묵시론적-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자의식을 피력, 4) 교회와 당국의 사악한 자들과의 종말론적 싸움을 촉구 (42)
-
뮌처의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민족저항운동과 연합함으로 그의 신학적 이념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났다. (42)
-
뮌처가 요하킴의 종말론에 의거하여 그의 시대를 마지막 묵시적 종말의 시대로 보았기 때문에 “벌써 적그리스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하였다. (42)
-
뮌처는 그가 조직한 군대조직체의 한 모형인 선민연맹을 “하나님의 주권의 도구”라고 표현하였다. (43)
-
뮌처의 혁명적 종교개혁의 최종 근거지는 뮐하우젠이었고 곧이어 농민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 결정적으로 프랑켄하우젠에서 대패한 농민군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파이퍼와 뮌처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후에 1525년 5월 27일에 처형당했다. (43)
5. 에라스무스
-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아주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켰다”라는 말처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길라잡이 중 하나로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44)
-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인간교육과 도덕적 갱신을 통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고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은총을, 그리고 하나님의 의한 인간변화와 교회개혁을 강조하였다. … 에라스무스는 다만 스콜라학의 결점을 폭로하고 종교의 외형화와 교의의 강요를 비판했을 뿐 시종 로마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44)
-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구체적인 갈등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44)
-
자유의지에 대한 어거스틴의 입장 : 인간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의지의 능력이 전혀 없다 (45)
-
자유의지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입장 : 인간에게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지의 능력이 있다 (45)
-
자유의지에 대한 반(半)펠라기우스 입장 : 인간의 자유의자가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한다. (45)
-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수용하고 있는 어거스틴파의 예정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고 인간을 신의 영원한 노예로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45)
-
루터와의 인간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전적 타락의 교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에라스무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창조 때부터 선택의 자유가 필수적으로 주어졌으며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 구원에 있어서 최소한의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르치게 될 때, 그 결과에 있어서는 인간의 무책임성과 반율법주의를 지지하는 결과를 범하게 된다고 보았다. …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의지의 행동 자체도 일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자가당착의 모순점이다. …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력설에 해당. … 에라스무스는 그의 특유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끈질기게 고수하였고 인간의지가 자유선택의 능력을 지녔다고 결론지었다. (45-47)
-
루터의 노예의지론 : 모든 결과는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원인의 결과이다. … 인간 자신의 의지는 공허한 것이고 영원불변한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였다. (47-49)
-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사건들을 미리 아시며 미리 작정하신다는 것과, 그의 예지에는 실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예정을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과 또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인간이나 천사나 모든 피조물에게는 어떠한 자유의지도 있을 수 없다” (49)
-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예정론적 견해를 숙명론적이고 부도덕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종교개혁을 하나의 비극이라고, 혹은 결혼으로 끝을 맺는 희극이라고 말했다. 또 예술과 문학을 파멸시키고 교회를 무질서한 상태로 이끈 재앙이라고 간주했다. 그에 대해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지독한 적”이라고 비난하였다. (49)
6.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
-
반종교개혁이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확산을 저지하고 카톨릭 교회의 세력회복을 목적으로 했던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을 가리킨다. 이 반종교개혁의 근본 원리는 트리엔트 종교회의에 의해 작성되었고 예수회는 이 원리를 실행하는 투쟁 전위단체로 활동하였다. (49-50)
-
로욜라 : 귀족으로 태어나 무사로 활약, 1522년 몬트세라트의 마리아 성지 순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묵상, 1529년 37세 때 파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움, 1534년 예수회 창립, 로욜라는 ‘예수회 헌장’에서 예수회가 ‘그리스도의 군대’이며 ‘하나님의 병사’라는 것을 분명히 했고 교황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다짐하였다. (50)
-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르 3세는 ‘교회의 전투부대’라는 칙령으로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인정 (51)
-
예수회는 영적 훈련, 곧 자기 관조, 명상, 자기의지 죽이기 등을 통해 하나님과 로마교회에 대한 무조건의 복종을 가르쳤다. (51)
-
예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재판을 주도하여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학살하였고 많은 나라에서 로마 가톨릭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신교도들이나 그리스정교회 신도들을 고문하거나 강제로 개종시켰다. (52)
7. 결언
-
루터는 많은 그의 대적자들과의 논쟁과 투쟁 속에서 종교개혁을 완수하였고 복음적 개신교 신학을 이룩하였다. … 만약 루터에게 대적자들이 없었다면 엄청난 양의 논문과 주석과 복음적 설교는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루터는 그의 대적자들과의 논쟁과 투쟁을 통해서 대성(大成)하였다. (54)
'[기타 자료실] > [논문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터의 개혁 운동의 정신적 동력 : 묵시적 종말사상과 예언자적 사명의식” - 김선영(2017) (0) | 2021.03.03 |
---|---|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 손규태(1990) (0) | 2021.03.03 |
“마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 신학적 배경과 한계” – 나학진(1986) (0) | 2021.03.03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토마스 뮌처” – 최재호(2011) (0) | 2021.03.03 |
“토마스 뮌처의 영성과 사회변혁의 신학/윤리” – 정경호(1996) (0) | 2021.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