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1990).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기독교사상, 33(10), 27-3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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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개혁 없는 종교개혁은 무의미하고 종교개혁 없는 사회개혁은 불완전하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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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가 당시 부패하고 오도된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헌신했다면 토마스 뮌처는 농민들의 봉기를 주도함으로써 사회개혁에 헌신했다가 ㅈ후들의 군대들에게 참패하고 수많은 농민군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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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게서는 상부구조인 종교개혁이 더 시급한 과제였고 뮌처에게서 사회개혁 없는 종교개혁은 무의미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27)
1. 루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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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개조 논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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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가톨릭의 공로사상에 대해서 절대 은총으로 응답하는 한편 즉 광신도들의 반율법주의에 대해서도 투쟁했다. 루터는 1520년대 종교개혁 문서들을 통해서 율법의 의에 바탕을 둔 공적주의의 대표적 상징인 면죄부 신학과 투쟁하고 그 다음 1535년대에 와서는 루터의 이러한 사상을 극단적으로 파악한 반율법주의자들의 논거에 대항해서 싸워야 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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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극단적 율법주의와 극단적 반율법주의 사이에서 매우 좁은 길 즉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히는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을 볼 수 있다.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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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목욕시키지만 그러나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루터의 비교적 온건하고 보수적인 성격이 이 농민전쟁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29)
2.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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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의 봉기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붕괴시키고 마침내는 혁명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농부들을 공격한다. 1) 농부들은 통치자들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어겼고 따라서 현세적 처벌을 감행했다. 2) 동부들은 약탈과 도적질 그리고 살인을 자행함으로써 몸과 영혼을 죽음에 굴복시켰다. 3) 이러한 범죄행위들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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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강경한 입장은 무엇보다도 그가 가졌던 정치적 권위에 대한 보수적 입장과 함께 농부들의 폭동이 가져올 무정부적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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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나 개신교 제후들은 이러한 패배한 농민들에 대한 살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를 루터에게서 찾았다. (29)
3. 토마스 뮌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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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루터의 권유로 츠비카우의 설교자가 됨(31), 1521년 “프라하 선언” 발표(31), 농민전쟁 가담(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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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시대경륜론을 통해 묵시문학적 사상을 펼친 요아힘 피오레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당시 타울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독일의 신비주의와 결합되었으며 이것이 결정적으로 개혁운동으로 표출되게 된 것은 체코의 개혁자 얀 후스와 재세례파 운동과 합치되면서였다.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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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루터의 신앙을 “문자의 신앙”이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영”의 신앙이라고 한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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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의 신비주의적 십자가 신학은 루터가 가르친 “달콤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쓴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올바른 제자직이 수행된다고 보았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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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단계의 신비적 삶의 경험을 거쳐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를 버리고 육신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투쟁적 삶의 모습을 세례 요한에게서 찾고 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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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후스와 그 후예들이 사는 곳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 “프라하 선언”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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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로운 공동체의 이상”은 전체 교회가 치리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예배 역시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 교회에 의해서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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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같은 초대교회가 창녀처럼 된 것은 성직자들의 타락에 기인한다고 보고 다시 초대교회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한다(프라하 선언).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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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교회의 심판의 칼이 “무법자들의 교회”와 “고리대금업자인 군주들”에게 내려져야 한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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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평등해져야 한다”는 요구를 뮌처는 하나의 “그리스도교 연맹”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었다. 이것은 그가 원시적 교회공동체의 재건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자명한 것이었다. 이 연맹에서 뮌처가 지향한 목표는 “모든 재산은 공동의 재산”이었다. 이 연맹의 재산공동체성과 형제애의 모델은 바로 처음 예루살렘 공동체였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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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의 ‘영주 설교’에서 블로흐가 말하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의 신학”을 경험하게 된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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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영주설교에서(롬 13장) 루터의 두 왕국론에 근거한 국가이론을 비판하고 민중들의 혁명적 저항권 및 민중의 존엄성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다. (3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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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강력한 사회혁명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만 사회적 조건들이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완성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의 내적 정화”가 뮌처의 혁명적 활동의 주된 내용이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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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뮌처는 인간혁명과 사회혁명의 통합을 시도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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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성의 혁명(거듭남) 없는 사회혁명에 대해서 등을 돌렸던 20세기초의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 라가츠가 거짓 혁명가들은 적들을 가두었던 감독에 다시 들어간다는 명언을 남긴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진정한 혁명은 자기와 모든 사람들의 단(斷)을 통해서만 성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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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사회혁명 없는 종교개혁을 이루려 했다면 뮌처는 사회혁명을 통해서 종교개혁을 완수하려고 했으며 또 종교개혁을 통해 사회혁명을 철저화하려 했다고 할 것이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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