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북간도 기독교의 변화
- 일제의 탄압 및 사회주의 유입 과정에서 -
김동춘(2018), 성경과고고학 제96호, 156-191.
김동춘 박사
SFC 대표간사
중국 연변대 역사학박사(만주사)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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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인들은 교육, 의료사업, 애국계몽운동 등을 통하여 조선 근대 말 사회에 큰 희망을 던져 주었다. 개화 및 근대와의 노력과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은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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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선교사들과 일제의 타협... 기독교는 점차 민족과 사회 문제에서 멀어졌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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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조가 북간도에 왜 그렇게 빨리 유행하였고,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심취하고 심지어 기독교를 떠나는 경우가 발생... (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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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 사조에 경계심을 가진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이 중도주의 노선을 걷게 되는 과정과 마주국이 설립된 이후 기독교계는 점차 민족의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기독교 내적인 영역에만 치중하게 되는 과정... (157)
2. 3ㆍ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 국면에서 기독교의 변화
1) 3ㆍ1운동 이후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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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과 연해주 지역의 독립선언서는 당시 기독교에 대해서 일제가 기독교를 얼마나 싫어했을까를 웅변적으로 설명해준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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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조선에서 기독교는 거의 국민적 종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국민을 위한 기독교의 가치는 위대하다. 기독교는 서구의 민주적 사상인 자유와 동포주의 이상의 최량의 수입자이니 조선에 기독교도가 압박을 받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로서”(1919년 3월 17일 니콜릭스 위스리스키에서 - 조선국민의회-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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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소교는 우리 민족문화사 일생명이거늘 일본은 이를 증오하여 박멸시킬 음모수단을 강구하여”(1919년 3월 - 대민국의회-)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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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북간도 기독교에 대하여 강력하게 핍박... 함북노회 제4회 모임(1919년 9월 13일, 와룡동교회)... 총회록... (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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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대토벌”... 기독교학교가 있거나 기독교가 활발한 반일 성향의 마을이 피해가 컸다. (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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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대참변으로 피해를 받은 교회... 청산리교회, 장암동교회, 양무정자교회, 금당촌교회, 훈춘남별리교회, 명동교회, 장은평교회, 합마당교회, 구세동교회, 청산리 백운평교회...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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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현 장암동교회, 훈춘의 남별리교회의 피해... 《연변조사실록》 1920년 10월 31일 일본군 70여명에 의해 저질러진 화룡현 장암동의 참사... 장암동 참사를 접한 명동마을은 1920년 11월 10일 마을의 피해를 줄이고자 마을 대표 다섯 명을 모아 일본에 자수하기로 하였다. 명동교회 담임목사 최선택, 국민회 동구회회장 김정규, 국민회 경호부장 김강이, 명동학교 대표 김석관, 국민회 동구회서기 겸 독립신문 기자 문재린이 뽑혔다... 이들 중 김강이와 이들을 뒤에서 밀어 준 명동교회 장로의 아들 일본영사관 경관이었던 남보라가 처형을 당했다. (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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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일본군 37여단의 73연대장이 인솔한 토벌부대... 청산리전투의 첫 전투인 백운평에서의 실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두 개 촌의 30여채 민가와 교회당 전부를 불사르고 “불령선인가속”이라하여 70여명의 군중을 살해하였다... 대부분이 기독교마을인 화룡현 구세동에서 이사하여 왔고 다수가 기독교를 신앙하는 빈농... 청산리전투의 승리 배후에 기독교 민중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반증...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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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통계... 일본군이 북간도에서 체호한 인구는 155명, 3,664명을 살해... 민가 3,520호, 학교 59개교, 교회당 19소를 불살라 버렸고, 태워버리고 짓밟아버린 농작물은 53,993석이나 되었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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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참안 이후 기독교는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교회당 재건을 위해 노력... (161-162)
2) 북간도 기독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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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이후 “문화통치”... 북간도에서도 적용... 사립학교 내에 일본어교육을 실시... 1921년 일본인 일고병자랑(日高丙子郞)은 일본어를 정규과목으로 넣는 조건을 달아 명동학교 재건축을 지원하여 일본어가 명동학교의 정규과목이 되게 하였다. 또한 일고병자랑은 1924년 경영난에 처한 기독교학교인 영신학교를 사서 친일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광명학교’... 이후 중학부, 고등여학부, 소학교, 유치원의 4학교로 구성된 ‘광명학원’으로 발전하였는데 일본문무성의 ‘재외지정학교’로 될 정도로 북간도에서 대표적 친일학교가 되었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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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광명학교에 대하여, “우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용정에 들어가서 편입한 학교는 한국인의 황국화를 위해서 새워진 광명학원 중학부였다.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었다. 일인 선생들은 눈알이나 제대로 박힌 학생들이면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학교였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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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학교의 출신들 다수가 친일파로 한국의 1공화국, 3공화국 때 요직에 앉았다. [서병욱, 〈박정희와 만군인파〉, 《월간조선》, 1986.8, p.406]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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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이후 다양한 교파가 북간도에 진출하면서 기독교는 교회 내부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으로 점차 변화되어 갔다... 동아기독교(침례교)... 1920년에 연길현 대마록구, 종성동, 상의향, 상관도구, 삼합향, 송암동 등 본격적 전도를 시작, 감리교는 1920년 이후 중국 동북 및 시베리사 선교 재개를 결정하고, 1920년 5월에 개최된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중국 동북에 양주삼과 정재덕을 관할 목사로 파송... 1923년 6월 북간도 감리교회는 32개, 교인 1,353명으로 성장, 1924년에는 이화춘 목사가 북간도지방 관리자로 부임한 뒤 이듬해 도인권, 신광현, 이호빈, 한국보 등도 파견하였다. 성결교는 1926년 용정교회를 시초로 북간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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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지역에 여러 교파들이 진출하자 갈등이 발생... 점차 종교 내적 문제에 집중해 가면서 현실참여보다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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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조선기독교 총회에 제출한 ‘간도노회’의 보고문... 1923년 보고... 노회장 김내범... 열성적인 반일운동가로 국민회의 중견간부... ‘편안’, ‘재미’라는 표현을 한 것은 북간도 기독교계의 변화의 전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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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5일에 있었던 ‘간도노회’에 대해 언론에서 비판적으로 묘사... 현대 사회의 요구에 배치되는 미신적 신앙의 경향, 학교경영의 자주성 상실을 보여주었다고 비판... 북간도 교회가 점차 교육 및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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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후 북간도 기독교는 소수의 지도자 및 청년들이 반일투쟁에 가담하였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았다... 1922년을 고비로 무장독립군의 군사활동이 유격전 형식으로 굳어지면서 기독교는 점차 항일투쟁과는 멀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점차 내세지향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166)
3. 사회주의 유입과 신속한 전파로 인한 기독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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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의 러시아의 혁명과정은 조선의 독립에도 접목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며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하였다.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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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 사회주의는 급속하게 전파... 이동휘는 1918년 4월에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건립... (167)
1) 북간도 민중의 경제적 빈공으로 인한 신속한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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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계열은 ‘조선독립’이라는 민족의 문제를 접근하면서 민중의 경제적인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제반봉건을 주장하면서 피지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사회주의사상의 전파는 정착한 한족보다도 한인 소작농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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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말 북간도 인구는 대략 43만 명... 한인은 80.36%인 346,194명... 한족은 19.14%인 82,472명... 북간도 한인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그들의 절반 정도가 소작농...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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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착취에서의 해방, 반봉건 토지혁명을 주장하며 피지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는 절반 정도가 소작농인 한인에게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북간도의 사회주의자들은 북간도의 한인이 압박과 착취를 받는 것은 그들이 한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라는 계급적 처지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이러한 문제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및 전 세계의 문제이므로 단순히 ‘조선독립’의 차원을 넘어서 중국의 토지혁명의 승리가 선결과제이며, 중국의 혁명은 곧 조선의 혁명과 조선의 토지를 회복해 준다고 전파하였다.... 한인 2세대...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주의 사조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작용하여 사회주의는 급물살을 타고 북간도에 전해졌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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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운동 계열은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진작시키는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과중하게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민족주의 계열보다는 민중들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준다는 사회주의 사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170)
2) 《독립신문》 및 청년들의 선전활동으로 인한 신속한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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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부터 근대적 교육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자들이 북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 1926년 1월 25일 용정촌에서 조직된 “동만청년총연맹”의 설립과정을 주도했던 이주화와 이인구는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동흥, 대성중학교 및 기독교 계통의 은진중학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울파의 김사국, 방한민, 박원희 등이 1923년 용정과 영고탑에 각각 ‘동양학원’과 ‘대동학원’을 설립하여 사회주의 사상 전파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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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선전문건의 발행 부수가 민족진영을 크게 능가...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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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간도 지역에서 구독하였던 상해의 《독립신문》에 게재된 사회주의에 대한 글들이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광수의 《독립신문》의 사설... (172)
3)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한 신속한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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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지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에 대한 기대감, 일본 자본주의의 불신 등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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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회회의(1919년), 워싱톤회의(1921.11-1922.2)에 대표를 파견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노력에 대한 실망감...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이 소수민족을 지원한다는 소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들게 하였다... “제1회 동양제민족대회”(1920.9.1-8)... 피압박민족의 저항운동을 지지... “극동인민대표자대회”(1922.1.22-2.2)에서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천명... (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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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코민테른은 한인들에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국제적 지원을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였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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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정보분석에 의하면, “조선인 적화운동이 점차 왕성하게 된 것은 간도토벌 이후, 특히 워싱톤회의 전후부터”라고 하였는데 당시 북간도가 경신년대참안과 워싱톤회의 이후, 사회주의 운동으로 경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75)
4. 기독교 진영의 다양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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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우파적 경향...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좌파적 경향... 사회주의 계열을 민족 독립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중도파적인 모습으로 분화...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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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우파적 민족주의계열이 우위를 차지하였고, 북간도에서는 초창기엔 좌파적 민족주의계열이 주류를 형성하다가 점차 우파계열이 일제와 결탁하여 그 세력을 넓혀나가게 되었다. (176)
1) 반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우파적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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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지도자들은 종교단체로서 신도들의 실존적인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하며, 개방적인 조직체로서 합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였고, 이후 사회주의가 반기독교운동에 돌입하자 반사회주의적 우파적 경향을 띠게 된다.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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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적 원칙과 내세지향적 경향,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비폭력주의, 도덕주의, 점진주의적 방법론을 기독교 내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문제는 우파 기독교인 가운데 다수가 점차 친일파적인 경향을 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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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목사 김창덕... 사회주의는 물론 민족주의 운동까지 싸잡아 비판... “...공산주의 같은 것은 기독교 정신과 상용치 못하는 것이니까 말할 여지도 없거니와 민족운동 같은 것도 기독교인의 평화적 정신과 배치되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다수 기독교인은 반대의향을 가진 이가 많았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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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훈...《민족해방운동과 나》... ‘3사를 경계하라’... 목사, 교사, 의사... 가면을 쓰고 적의 염탐군 노릇을 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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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적인 변화는 당시의 식민지적 상황과 하층민들 더구나 타국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는 농민 등의 현실 문제를 점차 외면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를 배경으로 민족운동을 하던 여러 지도자들과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178)
2) 사회주의로 전향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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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원인...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선민족의 교회에서 나타난 내세주의적 신앙과 신비주의적 부흥회의 확산, 그리고 일제의 회유에 의한 선교사들의 친일적 총독부 유착 등으로 인한 기독교에 eog나 실망감의 반작용 때문...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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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 원인... 러시아의 정교회가 짜르 체제와 강하게 유착했으며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짜르 체제의 타도 뿐 아니라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 1) 국제 환경에 대한 강한 수용성. 러시아의 공산혁명 과정에서 러시아정교회에 대한 타도의 양상과 중국과 조선에서의 반기독교운동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확산... 2) 새로운 역사인식의 작용성. ‘민족모순’을 넘어서 전 세계의 ‘계급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는 이상론... 3) 기독교의 보수성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한 새로운 이념에 대한 기대감... 3.1운동 후 기독교가 현실도피적이 되어가는 양상은 점차 교회 내의 청년층으로부터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다. (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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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한인사회당’ 조직... 1919년 8월말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 ‘고려공산당’ 1935년 1월 13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사망...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의 성공과 세계대전의 종결, 그를 이은 3ㆍ1운동 이후의 국내외 정국 격변 정세 속에서 당시 새로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음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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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면... “성리교”라는 독립교단을 만들어 목사로 활동... 3ㆍ13운동 후 그 교단을 바탕으로 훈춘에서 신민단을 만들어 무력항쟁을 벌였고 연해주에 들어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단체로 입당... 한인사회당의 부위원장과 군사부위원장을 맡음...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박진순과 대회선언서에 서명... 1920년대 후반에는 중국 북벌에도 참전... 기독교를 믿게 된 계기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 사회주의자가 되는 과정을 기록... (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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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우(1880-1959)... 이동휘의 비서로도 활약... 1910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를 만나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 이동휘를 따라 북간도로 망명... 독립군 양성학교인 광서학교(연길소재)에서 교사로 활동...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어수불망” 등을 편찬... 계봉우에 대한 일제의 기록... 1916년 11월 24일 이동휘 부인의 생일잔치에서 일제의 기습을 받고 이동휘를 보호하다가 잡혀 조선으로 압송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연해주로 껀너가 《권업신문》의 기자로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 1920년 상해에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 사이의 파벌투쟁에서 이르크츠크파에 밀려 ‘임시 고려군사혁명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면서 사회주의 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됨... 연해주의 이만에 정착하여 동포교육과 민족사, 국문학사 연구에 전념...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크즐오르다로 옮겨가 고려사범대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교육이 봉쇄당하자 개인학문에만 전념... (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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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김규면, 계봉우... 기독교 계열이던 국민회 구성원들이었고 민족해방의 방략으로 사회주의에 들어섰다. 대부분 공산당과 공산주의 이론도 접촉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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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 운동이 아주 유용했기 때문... 기독교가 민족독립을 위한 정신적, 사회적 기초로 여겨진 것과 같이 사회주의 또한 민족독립을 위한 현실적, 전략적 방편의 신사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84-185)
3) 사회주의에 대하여 중도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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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 1925년 이후 사회주의가 북간도 땅을 휩쓸고 있을 때 사회주의에 가입하지 않았다. 교장이던 명동학교가 사회주의 열풍에 휩싸이자 1928년 용정으로 떠나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명동교회의 목사로서만 활동을 하였다... 김약연이 사회주의에 대하여 거리감을가졌지만 일정 부분 배척은 하지 않았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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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초대 회장 구춘선...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톤군축회의 등에 실망하여 때마침 밀려오던 사회주의를 민족운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1921년 12월 돈화현 양수천자에서 총판부를 조직하여 기존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 조선국내에 진공할 계획을 수립... 자유시사변의 책임과 관련하여 ‘대한국민의회 문창범과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성토’하는 성토문을 발표... 1923년 5월 돈화현의 오지 사하연으로 이동... 액목현에서 국민회의 후신인 고려공산당 적기단이 조직될 때 마진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정현 백초구로 돌아와 다시 민족주의 운동에 뜻을 두고 1927년 국민회 동지들과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 1928년 11월에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국민회 조직을 명하였으나 실패하자 그후 교육운동에만 전념...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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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1872-1931)... 1911년 미국 북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해외에서 신앙운동과 독립운동을 아울러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12년 일경에 체포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 1918년 6월 “신한청년단”에 가입, 1919년 1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한동안 의정원 의장직을 맡다가 1922년 대한적십자 회장으로 당선... 10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무력항쟁을 담당할 군사인재양성의 사명을 띤 ‘노병회’를 조직하였다. 노병회가 해체되고 임시정부 내부 파벌투쟁이 심해지자 환멸을 느끼고 겨울 길림시로 왔다. 길림시에서 10여 년간 목사로 있으면서 반일민족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함... 1927년 1월 ‘길림대검거사건’으로 300여명의 한인이 체포되자 중국당국과 협의하여 이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 1927년~1931년 사이에 길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청년 김일성과 우호적 관계... 김일성의 손정도 목사에 대한 회고... (187-189)
5. 요약 및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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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ㆍ1운동과 봉오동 청산리전투 이후 북간도 기독교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민족 및 사회현실문제에 무관한 기독교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사조의 유입 후 북간도 기독교계는 큰 분화를 겪었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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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중도적인 기독교인들 다수가 점차 우파적 경향을 보이다가 친일파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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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의 기독교계의 분화는 앞으로 한반도의 미래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남북통일이후 기독교계는 엄청나게 많은 분화를 겪을 것이다... 북간도의 다양한 기독교의 변화과정을 통해서 과거사를 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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