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문화연구 제7집 2호, (2001) pp. 63-105,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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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성 형성은 일제의 이주 정책 및 중국 공산당의 민족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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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자국의 경제적 목적을 위해 가난한 소작농인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켰으며, 식민지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중국인과 구별된 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였고, 이로써 조선족은 여타 집단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종족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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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56개의 민족을 구획 짓는 과정에서 조선족을 하나의 소수 민족으로 규정하였으며,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및 그에 따르는 정책의 변화 속에서 조선족을 국가의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주변화 시켜왔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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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국가의 권위에 기댐으로써 ‘객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대에 거쳐 반복적으로 강조됨으로써 ‘원초성’을 획득하였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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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무엇보다 한족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이 소수 민족으로서 불이익과 차별을 경험해왔던 것과 연관된다...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차별’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한족에 대한 우월함의 형태로 그들만의 종족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중성화시키고 동시에 한족과의 불평등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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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취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은 ‘잘 사는 나라’ 한국에 대해 경제적 기대 및 ‘같은 민족’ 한구긴에 대한 문화적 기대를 갖게 된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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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규정은 결국 조선족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양산하는데, 이것은 자국 시장의 필요에 따라 양적 조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저임금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해 주며,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에게 ‘멸시되는’ 집단으로서 종족성을 부과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차별의 경험 속에서 한국의 조선족은 기존에 가졌던 ‘같은 민족’에 대한 기대 내지 동일시를 부인하게 되어 한국인과 구별된 조선족만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와 같은 공유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선족의 유대를 강화시킨다. (64)
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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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인류학의 중요한 과제로서 조선족 연구가 부각되기 시작... 1) 사회 구조적 변화에 따른 한국 내 조선족 인구의 급증... 2) 한국 인류학 경향의 변화... 한국을 단순히 한 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로 바라보기 보다는 내부의 다양한 종족 집단들로 인식하기 시작...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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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조선족 연구... 1) 해외 한인 연구의 맥락... 한상복ㆍ권태환 공저의 『중국 연변의 조선족』(1993)과 이광규의 『재중한인』(1997)... 『중국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시리즈(1996, 1997, 1998)... 직접 중국의 조선족 사회를 방문하여 얻은 자료에 근거하여 서술... 2)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한 연구... 조선족 노동자에 초점... 유명기(1995), 박충환(1995), 함환희(1995)... 한현숙(1996)과 노고운(2001)... 한현숙이 조선족이 한민족으로서의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어떠한 난관이 존재하는가에 주목하였다면, 노고운은 한국인과 다른 조선족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보다 강조하면서 이들이 시도하는 전략적인 대응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여성을 대상으로 조선족 이주에서 나타나는 성별 정치학적인 문제를 다룬 홍기혜(2000)의 연구...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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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다루고자 하는 시도로서 기획...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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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족’의 성원으로서 조선족과 한국인이 동일한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의 중국 이주 이후 이미 상당 기간 동안 두 집단이 각각 다른 생활 영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과정에 처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조선족-한국인 관계를 보다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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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대 일제 시대에 조선인이 중국으로 이주한 이래 일본 및 중국 국가의 민족 정책이 조선족의 종족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규정짓고 강화시켰으며, 이것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조선족 스스로에게 종족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본다... 2) 조선족 종족 정체성의 내용을 특히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과의 관계 속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고, 이러한 종종 정체성이 중국 개방 이후 등장한 ‘한국 바람’과는 어떠한 연관 관계가 있는지를 분석... 3) 1990년대 한국 사회 구조 내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조선족의 종족성의 문제를 살펴보고, 이것이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 및 일상 생활의 해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고찰해본다. (67)
2. 이주, 그리고 국가의 종족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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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역에 조선인이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81년 청나라가 ‘봉금령’(封禁令)을 철폐하기 훨씬 전인 약 130여 년 전부터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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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현재와 같은 조선족 마을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30년대의 일제 이주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도홍렬 1992). 1936년 한반도 지역에 흉년이 들자 조선인 중 만주로의 이주를 보다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재만조선인지도요강’에 합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선만척식회사를, 만주국은 만선척식회사를 설립했다... 금액 3천만 원을 가지고 15년 간 조선농민 16만 호, 인구 1백만인을 중국으로 이주시킬 계획에 착수(현구환 1967: 162)... 풍원촌(豊源村)... 1938년 1월 14일 일본군의 인솔 아래 경상도 지역에서 총 100가구가 이주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한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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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무상으로 배분해 준다는 일제의 약속...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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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난한 조선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킨 데는 1932년 만주국 설립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수전으로 만들고, 더불어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야기된 조선 농민운동의 심각성을 외부로 돌리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수전 농사의 경험이 풍부한 조선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 내부의 격화된 갈등을 완화시키고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확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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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은 청 태조의 발상 성지로 보존하기 위해 1714년부터 봉금령에 따라 만주로의 이주를 금지해왔으나, 1867년 중국 동북지방의 농업개발목적으로 한족의 이주를 서둘렀으며, 1878년에는 산동성 사람들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또한 1878년 이후부터는 한족 여자에게도 가족 이동을 통한 만주 정착과 개발을 권장하였다(박영석 1982: 66~67). 이러한 한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1911년 신해혁명 및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 1921년의 공산당 창당과 국민당 정부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중국에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 대홍수, 기근, 재난 등으로 인해 계속 증가하였으며, 중국 내에서 만주로 이동한 인구수는 만주의 3성인 봉천성, 길림성, 흑룡성의 경우 1907년에 1천 6백 70만 명이었던 인구가 10년 후인 1917년에는 2천 1백만 명으로 팽창하여 26%라는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였다(고승제 1972: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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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경우 대부분이 소작인으로서 농업에 종사... 중국인은 이주해 온 한족이라고 하더라도 청국의 정책적인 혜택으로 지주, 산주(山主)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외국인인 조선인 집단보다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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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종족 집단 구분이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1) 조선인이 처음부터 조선인 부락의 형태로 이주되었고, 그에 따라 중국인과는 지속적으로 구별되는 생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2) 일제는 중국인과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처음부터 일본인을 1등 국민, 조선인을 2등 국민, 중국인을 3등 국민으로 정하여 각기 다른 종족 집단으로 분류했다는 것...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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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조선인 및 중국인 소작농들은 대부분 중국인 지주의 토지를 얻어 소작하였지만, 지주 대 소작인 7:3 비율의 엄청난 세금은 사실상 거의 일본군에게 납부되었으며, 조세를 독촉하러 오는 일본군의 앞잡이는 대개 ‘2등 국민’인 조선인이었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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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인에게만 수확량이 높은 수전(水田)의 기회를 차별적으로 부여했기 때문에 같은 소작농으로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심한 적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2차대전이 종료되고 일제가 마을에서 떠남과 동시에 중국인들의 보복...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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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중국 공산당은 1953년 제1차 전국인민대표회에 참석할 각 민족대표를 선거하기 위하여 민족식별사업을 벌였다... 총 55개의 민족이 확정(현재는 56개)... 1) 각 민족에게 고유의 언어를 부여하였다... 2) 각 민족에게 그들만의 지역적 경계를 부여하였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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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로서의 조선족은 ‘민족’에 관한 국가의 담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왔다... 1950년대 초와 같이 중국 공산당이 비교적 소수 민족에 대해 호의적인 시기 동안에 공산당은 조선족의 자치와 권익을 적극 존중해 주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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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이후 중국 공산당은 반우파운동, 인민공사운동, 나아가 1966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전개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해서 이전의 공존과 융합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동화를 강요하였다... 소수 민족의 자율성은 중국 전체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으로서 부정되었고, 각 학교에서 조선어 학습 시간은 축소되었으며 조선족 출신의 고위 간부들은 비판되거나 제거되었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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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가난한 소작농으로 단지 생계를 보장받기 위해 멀리 떠나온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편으로는 이들이 갖고 있는 수전경작과 같은 ‘독특한’ 능력을 독려하고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자국의 경제적ㆍ문화적 자원으로 활용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주변 집단과 ‘다르다’는 규정을 법적ㆍ정치적으로 마련함으로써 조선인들을 고립시켰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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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조선족이 공산주의 혁명 당시 높은 참여를 보였다는 것을 이유로 이들에게 여타 소수 민족에 비해 우수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이후 극심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사실상 조선족에게 일관되지 않은 정책을 펴 왔으며, 그러한 정책들은 반복적으로 한족과의 분리를 강화시킴으로써 조선족을 중국 중심으로부터 주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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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국가의 ‘구획하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기화하는 과정, 즉 ‘인정’과 ‘동의’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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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성과 우수성...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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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정체성은 국가가 부여한 종족성의 경계 내에서, 그러나 그 중에서 주민들이 ‘선택하고’ ‘증류된’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일단 종종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부터는 세대에 걸쳐 반복ㆍ전수됨으로써 점점 더 객관적인 사실로 고정된다. 따라서 중국 내에서 조선족이 타 집단과 경계짓도록 만든 특정 내용의 선별 및 그와 관련된 종족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국가 권력에 의해 규정되고 객관화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종족 정체성이란 원초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에 근거한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74-75)
3. 조선족의 종속 정체성과 ‘한국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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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동부 지방에 처음으로 벼농사를 도입하고 높은 수확률을 자랑했던 조선족이 1990년대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더라도 대부분 외부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농사일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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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주민들은 거의 유일한 삶의 대안으로 한국 취업을 고려하고 있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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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문 이후 갑작스럽게 부유해진 일부 사람들은 남아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상대적인 빈곤감을 유발시켰고, 빈부 격차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 취업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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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들은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돈을 모으고 결국 조그맣게나마 자기 소유의 가게를 열어 가구 경제를 늘려간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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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이 전체 인구 중 92%를 차지하는 중국 사회에서 한족 문화는 중국 문화의 주류이다... 중국에서 인맥은 개방 이후 개인 사업이 자유로워지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한족 조선족 할 것 없이, 친척ㆍ동창ㆍ민족 관계는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숫자상ㆍ권력상의 열세로 인해 한족만큼 풍부한 인맥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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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간부들이 한족 가게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고자 함... 조선족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에 비해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개인 사업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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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스스로를 한족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구별짓고자 한다는 것... 이것은 조선족이 갖고 있는 종족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민족정체성은 우선 한족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데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중성... 자신들이 한족보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믿고 싶어하면서도, 중국 사회의 지배 민족은 한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것...”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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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한족에 대해 스스로를 구별짓는 태도 및 감정, 혹은 이들의 종족 정체성은 일종의 ‘우월감’의 형태로 드러난다... 1) 한족은 ‘더럽다’고 규정되며 반대로 조선족은 ‘깨끗하다’고 이야기된다. 2) 한족이 ‘무식한’ 존재인 반면, 조선족은 ‘교양 있다’고 규정된다... 3) 한족은 ‘게으른’ 반면 조선족은 ‘부지런하다’고 규정된다... 최근에는 조선족 주민 스스로 과연 조선족이 한족보다 부지런한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 한국 바람 이후 적지 않은 조선족이 농사일을 기피, 오히려 한족이 그들이 내버린 땅을 경작하고 더 많은 수확을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 4) 한족은 돈에 ‘인색한’ 사람인 반면, 조선족은 ‘베푸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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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이들이 중국 사회의 맥락 속에서 부여받은 낮은 사회적 지위 및 이를 수행한 국가의 종족 정치학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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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중국 ‘국가 정책’ 수준에서의 평등이 ‘일상 영역’ 수준에서는 관철되지 않는 상황을 ‘모순’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별개’로 받아들인다. 조선족 주민들은 실제로는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차별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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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한편으로 ‘한족’에 대한 우월성의 형태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중성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한족과 조선족이 위계에 따라 배열될 수 없는 ‘원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쟁으로부터 벗어난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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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취업은 한족과의 직접적인 맞대결을 피하면서 한족을 앞설 수 있는 천혜의 기회로 조선족에게 나타난다... 이들이 한국에서 맡게 될 역할이 중국보다 낫지 않은 ‘최하층 지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한족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그들만의 독점적 자원이라는 점에서 한국 취업을 가장 선호하게 된다... 조선족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자신과 ‘동일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문화적으로 편안한 공간이다. (84)
4. 한국에서의 조선족 : 정치경제, 국가, 종족 정체성간의 상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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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78년 12월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기점으로 개혁 개방을 추진함에 따라 그동안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던 한국과의 교류 기회를 조금씩 확대하기 시작... 한국 또한 대외 시장 확보의 차원에서 중국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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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중국과 한국 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고 조선족이 법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은 조선족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꿈의 나라’로 등장... 한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중소기업체의 인력난을 맞아 1990년대부터는 정부의 주도 아래 동남아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추진... 사회문제 야기로 같은 민족인 조선족의 유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 (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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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족과 한국인은 부정적 감정을 서로에게 가지게 된 것일까? 한국인과 조선족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한국 정치ㆍ경제 맥락 속에서 조선족은 한국인과는 다른 종족 집단으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이때 조선족에게 부여되는 종족성은 다음 두 가지와 밀접하게 관련... 1) 출입국 관리 체계에 의해 국적 상 중국인이라는 것... 2) 한국의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저임금ㆍ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최하층의 노동자 집단이라는 것...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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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 1) 친적 방문... 2) 산업연수생의 자격... 기본절차 비용과 비자 비용 및 알선 업체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마련해야 한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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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외국인’ 규정... 1999년 8월 12일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이하 「재외동포법」)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재외동포에 해당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에 국외로 이주한 자 중 대한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자와 그 직계비속 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자 중 외국국적 취득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은 자와 그 직계비속으로서, 실제로 조선족 및 구 소련의 고려인을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이 만일 국내에서 입국 이전에 계약한 업체 외의 다른 곳에 취업을 할 경우, 이들은 불법체류자로 간주되고 언제든지 한국정부의 추방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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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을 ‘동포’가 아닌 ‘외국인’의 영역에 배치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끊임없이 불법체류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조성하는데, 이를 통해 한국은 필요시에는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불필요시에는 언제든지 방출할 수 있는 자국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마련할 수 있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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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순수한 ‘인력’일 뿐이고, ‘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은 감추어진다(한현숙 1997: 35).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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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란 1) 경제적으로 한국 보다 가난한 중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2) 열악한 농촌 출신이며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하층 노동자라는 점에서, 3) 사회주의 국가의 성원이라는 점에서, 한국인과 구별된 집단으로 고정되며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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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첫 번째 계기는 한국인 친척들의 경멸과 무시이다... 조선족은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한국인과 구별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된다... 「재외동포법」과 같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 담론 및 작업장에서의 직접적인 차별 대우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이 한국인과 다른 종족 집단임을 인식하게 되고 조선족만의 구별된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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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오로지 돈만 알고 인간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거꾸로 조선족은 상대적으로 너그럽고 순진하며 인간적인 사람들로 인식된다. 한국인의 다양성이 무시되는 까닭은 실제적으로 이들이 만날 수 있는 한국인 집단 자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한국인의 특질이란 단지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독특한 것으로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만이 의미가 있고 강조되기 때문이다.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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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이제 더 이상 같은 사회의 성원으로 편입을 기대하기보다는 한국 사회 내의 엄연한 또 하나의 종족 집단으로 자리 매김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와 다른’ 그들을 포용하고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93)
5. 요약 및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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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종족성을 논의함에 있어 기존의 조선족 연구와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조선족과 한국인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왔다면, 본 논문에서는 두 집단이 상당 기간동안 다른 생활 공간에서 다른 문화적 과정을 겪어왔던 것에 주목하면서 두 집단을 서로 다른 ‘종족 집단’이라고 간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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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자국의 경제적 목적을 위해 가난한 소작농인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켰으며, 식민지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중국인과 구별된 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였고, 이로써 조선족은 여타 집단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종족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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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56개 민족을 구획 짓는 과정에서 조선족을 하나의 소수 민족으로 규정하였으며,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및 그에 따르는 정책의 변화 속에서 조선족을 국가의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주변화 시켜왔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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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일본 및 중국 국가에 의해 부여된 종족성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의 경험을 선별하고 의미를 전환시킴으로써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국가의 권위에 기댐으로써 ‘객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대에 거쳐 반복적으로강조됨으로써 ‘원초성’을 획득하였다.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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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갖는 객관적인 열등한 지위 뿐 아니라 스스로를 한족과 구별해 왔던 자신들의 종족 정체성으로 인해 개방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여 한족과 동일한 방식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에게 가장 유리하며 독점적인 자원으로 나타나는 한국 취업을 선호한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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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차별의 경험 속에서, 한국의 조선족은 기존에 가졌던 ‘같은 민족’에 대한 기대 내지 동일시를 부인하게 되며 한국인과 구별된 조선족만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와 같은 공유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선족간의 유대를 강화시킨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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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이란... 문화적 구성물... 2)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국가의 종족 정치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공식적인 담론을 통해 집단들을 구획하고 종족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3) 한 집단의 종족 정체성은 일단 형성되고 난 다음에는 원초성 내지 불변성을 그 특성으로 갖기 때문에, 각 집단이 행위를 선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4) 종족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두 집단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접촉하는 집단이 바뀌거나 관계의 성격이 바뀔 경우에는 그 내용이 변화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종족 정체성은 결코 어떤 특정 집단에 고유한 내재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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