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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루터와 뮌처” - 김영한(2006)

by [수호천사]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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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2006). 루터와 뮌처. 서강인문논총, 20, 35-66

 

I. 머리말

 

  • 루터는 중세의 기독교 질서를 흔들어 놓은 개혁자, 뮌처는 중세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고자 농민봉기를 주도한 혁명가 - (36)

  • 루터 : 성서주의 주장.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공적과 선행을 부인하고 오로지 신의 은총만을 기대하는 신앙의 객관화 추구 - (36)

  • 뮌처 : 성령주의 강조. 성령을 통한 내적 경험을 중시하는 신앙의 주관화를 중시 - (36)

  • 루터의 두 왕국론(양자의 권위 존중), 뮌처의 천년왕국론(기존의 사회제도와 질서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 (36-37)

  • 루터는 압제가 반란의 명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농민반란을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뮌처는 불의와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확신하여 농민봉귀를 고취하고 직접 지휘까지 하였다. - (37)

 

II. 생애와 활동

 

  • 루터의 생애(37-43) : 에어푸르트 대학(37), 스토터른하임에서의 뇌우(38),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38), 비텐베르크 대학(38), 탑의 체험(39), 대사부 판매 문제(39), 95개조 반박문(40), ‘라이프찌히 논쟁’(요한네스 폰 에크와의 공개토론, 41), ‘주여 일어나소서’(교황의 칙령, 42), 보름스 의회 청문회(42)

  • 토마스 뮌처의 생애(43-46) : ‘악마의 화신’(43), 라이프찌히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대학(43), 신일합일의 신비주의 사상(성령주의 신학에 영향, 43), 루터의 추천으로 츠빅카우 설교사가 됨(15205, 44), 스토르히(천년왕국 신앙, 44), 보헤미아의 프라하(프라하 선언, 44), 루터와 결별(44), 튀링겐의 알스테트에 정착(45), 뮐하우젠으로 도주(45), 농민봉기에 참여(45)

 

III. 성서주의와 성령주의

 

  • 루터교리의 핵심 : 신앙주의, 은총주의, 성서주의 - (46)

  • 루터교리의 혁명성은 교리의 새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의 선행을 배격하고 교회의 의식과 관행을 도외시했다는 데 있다. (46)

  • 은총주의는 신앙주의의 일반화된 경우이다. 신앙주의가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칙이라면 성서주의는 형식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 (46-47)

  • 성서주의 : 1) 교황, 공의회 그리고 신학자들의 권위는 성서의 권위에 종속된다. 2) 교회 내에서 권위는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말씀에 의해 도출된다. - (47)

  • 1520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가톨릭교회는 개혁을 차단하기 위한 세 가지 장벽을 쳐놓았다. 1) 영적인 권력이 세속적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 2) 오직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 3) 교황을 제외하면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는 주장. - (47)

  • 루터와 달리 뮌처는 성서만으로는 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 성령이 필요하다. - (48)

  • 뮌처 : 믿음이란 성령을 통해 신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직접 전달될 때 나타난다.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한 내면적 경험이다. - (48-49)

  • 뮌처 : 진정한 신앙체험을 통해서 인간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바뀐 것은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이같은 내적 신앙체험의 혁명성이 바로 사회개혁의 원천이 된다. - (50)

 

IV. 정치사상 : 두 왕국론 대 천년왕국론

 

  • 중세의 두 신분론을 부정하고 나온 것은 루터이다. - (50)

  • 루터의 두 왕국론또는 두 정부론’ - (51-53)

  • 루터의 두 왕국론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내면화하는 데는 기여하였으나 세상에 진리를 전파하고 현실사회를 개혁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뮌처는 천년왕국을 앞당기기 위하여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 (53)

  • 뮌처의 천년왕국 신앙(54-56) : 스토르히, 타보르파(54), 선민동맹 결성(55), 평등(56)

 

V. 농민전쟁에 대한 태도

 

  • 강령 62- (56)

  • 강령 12- (56)

  • 강령 12조의 요구사항이 성서에 비추어 정당성이 있는지 판정해 줄 인물로 루터, 쯔빙글리, 멜란히톤 같은 종교개혁자들을 지명 - (56-57)

  • 루터, “평화를 위한 권고 : 농민들의 ‘12강령에 반대함” : 왕국의 멸망과 혼란을 막기 위해 영주들에게 호소, 농민들에게 호소(반란은 정당화될 수 없다) - (57-58)

  • 루터,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폭도를 규탄함” : 농민들이 세 가지 큰 죄를 지었다 - (59)

  • 루터, “농민들을 향한 거친 발언에 대한 변호” : 자신의 입장이 너무 과격했던 것에 대한 변호 - (59)

  • 최악(무정부)보다는 차악(폭정)을 선택한 루터 - (60)

  • 튀링겐의 봉기 : 종말론적 천년왕국주의의 특성 - (60)

  • 뮌처 : 싸움의 목적은 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다(뮌처의 종말론), 뮌처의 눈에 루터는 종말론에 나오는 괴수이며 바빌론의 매춘부였다. - (61)

  • 뮌처 : 루터의 가장 큰 죄는 불의를 정당화해 주는 것 - (62)

  • 루터의 글은 제후와 군주들에게 반란 진압의 명분과 정당성을 제공 - (62)

  • 농민군의 참패와 뮌처의 최후 - (62-63)

 

VII. 맺음말

 

  • 중세에서 지배적인 흐름의 한 축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면 다른 하나는 요아킴이었다. - (63)

  • 아우구스티누스 : 초기 교회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천년왕국론을 배격하고 역사는 신과 악마간의 끊임없는 투쟁과정이라는 비관론을 피력하였다. - (63)

  • 요아킴은 역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단계로 나아가는 일원적 과정으로 보고 성령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으로 낙관하였다. - (63)

  • 루터가 성서주의자라면 뮌처는 성령주의자이다. - (64)

  • 루터의 개혁은 종교적ㆍ이론적이며 위로부터의 개혁을 목표로 하였고, 뮌처의 개혁은 실천적ㆍ행동적이며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 (64)

  • 루터가 이원론적인 두 왕국론을 주장했다면, 뮌처는 일원론적인 천년왕국론을 주장하였다. - (64)

  • 루터는 폭력에 의한 현실개혁에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지지하였고, 뮌처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력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 (64)

  • 루터는 사회개혁적 측면에서 보수적이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중세의 정신질서를 무너뜨린 혁명아였고, 뮌처는 의식과 행동이 급진적이었으나 가시적인 역사적 변화를 초래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 (64)

  • 루터의 보수주의로 말미암아 루터주의에 내포된 민중의 능동성이 상실되고 민중운동의 주도권은 뮌처를 비롯한 재세례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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