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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독일 농민전쟁(1524-1526)에 미친 Martin Luther의 영향” - 장수한(2015)

by [수호천사]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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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 (2015). 독일 농민전쟁(1524-1526)에 미친 Martin Luther의 영향. 복음과 실천, 55(1), 135-162

 

 

1. 서론 : “초기 시민혁명” 논제의 비판적 계승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연구는 종교개혁의 역사를 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했다 - (135)

농민전쟁 참가자 30만명, 사망자(7만 내지 75천명) - (136)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이중의 영향 - (136)

  •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 농민전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 - (136)
  • 강도와 도적과 같은 농민들을 타도하고 무찌르라!”(루터) - (136)

 

농민전쟁에 대한 평가

  • 빌헬름 침머만의 독일 대 농민전쟁(1841) - (136)
  • 프리드리히 엥겔스 : “독일 민족 최대의 혁명 시도”(농민전쟁) - (137)
  • 소련의 역사가 스미린 : 농민들의 빈곤화가 농민전쟁의 원인 - (137)
  • 슈타인메츠(동독의 역사가) : “초기 부르주아 혁명”(1961) - (137)
  • 귄터 포글러(동독의 역사가) : 농민전쟁에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평가 - (138)
  • 레오폴드 폰 랑케(실증주의 역사 연구가)
  • 퀸터 프란츠(실증주의) : 농민전쟁은 정치적 저항 - (138)
  • 토마스 니페르다이(서독의 역사가) : 종말론적으로 표현된 위기의식의 정신사적ㆍ신학사적 배경 연구 - (138)
  • 1960년대 농민전쟁사 연구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사학을 고려 : 니페르다이, 에리히 마쉬케, 베른트 뮐러, 한스 크룸비데, 하트무트 레만, 프란츠 페트리 - (139)
  • 사회사적 연구 가능성 : 라이너 볼파일의 종교개혁인가 초기 부르주아혁명인가?, 한스 울리히 벨러의 독일 농민전쟁 1524-1526- (139-140)
  • 페터 블리클레의 1525년의 혁명(1975) : 종교개혁의 농민전쟁에 근본적인 동기 제공 - (140)

 

농민전쟁과 종교개혁 사이의 깊은 관련을 인정하는 추세는 종교개혁 연구에서 배타적인 신학적 관점을 버림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 토마스 브래디 : “종교개혁의 재역사화기대 - (140)
  • 하이코 오버만 : “기본적으로 종교운동으로 받아들임 - (140)
  • 베른트 뮐러 : 종교개혁의 역사를 거의 전적으로 신학의 역사로 보려는 경향과 거리를 두기 시작 - (140)

 

독일 농민전쟁에 미친 루터의 영향을 검토하고 농민전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루터의 사회교리를 확인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서 봉기한 농민들이 내건 ‘12개 요구사항과 농민전쟁 과정에 나타난 루터의 사회교리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 (141)

 

2. “12가지 요구사항”에 나타난 루터의 영향

 

  • “12개 요구사항” : 1(목사 선출해임권) , 2(십일조), 3(농노해방) - (142)

  • “12개 요구사항” : 4,5(공유지 사용), 6,7,8,9(지나친 부역 감소, 공평분배, 공정한 법 집행), 10(교회 부지 공동사용), 11(차지 상속세 폐지), 12(성서에 근거한 요구) - (143)

  • “12개 요구사항에서 우리는 동독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부르주아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적인 법을 들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 (143)

  • 게르만인들에게 법은 신이 창조한 세계질서의 일부였고 따라서 누구도 이 법을 헤쳐서는 안 되는 절대 권위를 갖고 있었다. - (144)

  • “12개 요구사항에 나타난 바대로 농민전쟁은 하나님의 법과 그 구체화로서의 복음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 (144)

  • 평민들로 확장되는 농민전쟁 - (145)

  • 블리클레는 1525년의 운동을 평민 혁명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 - (145)

  • 농민전쟁 : 설교자들이 도시에서 시골로 신적 권리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농민전쟁은 실제로 일어났던 운동 혹은 전쟁으로 발전했다. - (146)

  • 1520년 말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2대 명제, 만인사제주의 확인 - (147-148)

  • 1520년 여름 기독교가 처한 상황의 개선을 위해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호소함: 세속적인 직업들에 의미를 부여 - (148)

  •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 - (149)

  • 루터의 자극은 농민들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베른트 뮐러(부정적), 그러나 독일 농민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12개 요구사항) - (150)

  • “12개 요구사항에 나타난 목표와 주장은 고지 독일(남부 독일)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토프 샤펠러(츠빙글리의 추종자), 제바스티안 로처(샤펠러의 제자) - (151)

  • 츠빙글리는 믿음을 내면에 가두어 둔 루터와 달리 사회 개혁적이었고 그래서 농민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151)

  • 농민전쟁에 미친 루터와 종교개혁의 영향 : 상징효과 - (152)

 

3. 농민전쟁의 과정에 나타난 루터의 사회교리

 

  • 슈바벤 농민들의 12개 요구사항과 관련하여 평화를 권고함”(15254월 중순) : 제후와 영주들의 양심에 호소, 농민들의 반항에는 부정적 - (154)

  • 루터의 자유는 순전히 영적인 자유에 지나지 않았다 - (155)

  • 농민들을 비난하는 루터 : “도적질과 살상을 일삼는 농민 폭도들에 반대하여”(봉기한 농민들에 반대하여) : 1) 농민들이 공권력에 대한 충성와 우호의 서약을 저버렸다. 2) 농민들이 수도원이나 성을 공격해 약탈하고 신체와 영혼을 피폐하게 한 책임을 저야 한다. 3) 농민들이 복음을 남용하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 - (155-156)

  • 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농민 폭도들에게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는 한편 영주들에게는 폭도로 드러난 농민들을 찌르고 쳐부수고 목을 매달아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봉기한 농민들을 죽이는 일이 가련한 이웃들을 악마로부터 건져내는 선한 일이라고 못 박아 버렸다. - (155)

  • 가톨릭에 루터를 비난할 근거 제공, 비텐베르크의 동료 신학자들조차 달갑게 여지지 않았다. - (155)

  • 농민들이 영주들의 칼과 창에 죽어가는 상황에 루터는 1525613일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 (155)

  • 농부들에 반대한 엄격한 소책자에 대한 편지”(15257) :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농민들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을 영주들에게 호소. 그러나 늦었다. (156)

  • 루터의 두 왕국론” : ‘신민은 어떤 경우에도 세속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저항권은 허용될 수 없다, 수동적 저항 - (156-158)

 

4. 결론 : 농민전쟁에 나타난 루터의 이중성

 

  • 영주들의 탄압에 정당성을 부여 - (158)

  • 농민전쟁 이후부터, 국가의 도움으로 루터주의 교회의 제도화를 이루는 것이 최선의 목표로 자리잡음 - (158)

  • 개혁운동의 시기가 끝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시기가 시작됨 - (158-159)

  • 루터는 재침례파 운동을 비롯한 대안의 개혁운동을 막기 위해 가톨릭과 통일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권체제와 도그마의 건설이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의 실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후 독일교회의 실체가 되었다. - (159)

  • 독일의 근대화가 병리적 근대화가 될 개연성이 루터의 사회교리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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