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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루터와 뮌처의 종말론 비교연구 –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 박종균(2018)

by [수호천사]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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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균(2018). 루터와 뮌처의 종말론 비교연구. 신학연구, 73, 341-368

 

I. 서론

 

  • 종교개혁운동은 신앙갱신운동만이 아니라 정치운동 - (341)

  • 종말론 사상이 종교개혁이나 혁명적이었던 독일농민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 (341)

  • 블로흐가 신학과 혁명의 상관성의 관점에서 뮌처를 연구한 이후 혁명의 추진력을 종교적 신앙에서 찾는 것은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 (342)

  • 슈타인메츠 :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기 부르주아 혁명으로,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을 1517년에서 1526년까지의 하나의 혁명적 과정의 일부로 평가 - (342)

  • 힌릭스 : 루터의 정치적 입장이 그의 독특한 신학적 근거를 찾는 것처럼 뮌처의 급진적 태도 역시 신학적 논리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 - (342)

  • 루터는 루터 방식의 종교개혁과 정치적 노선을 밟았고 뮌처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종교개혁운동과 정치적 행동을 전개해 나아간 것 - (342)

 

II. 루터의 종말론

 

  • 1516세기 정치 운동에서 종말론적 예언은 전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 (344)

  • 12세기 요아힘 이래로 신학자나 설교가들은 선악간의 우주적 전쟁을 포함한 최후 심판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예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에서부터 자신의 시대까지의 교회 역사를 해석하고자 했다. - (344)

  • 루터의 말과 글에서 종말론적 색채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 (344)

  • 루터 :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특히 1514년 교황의 면죄부 판매가 종말의 확실한 징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 (345)

  • 루터는 교황 제도와 같은 것은 오직 주 그리스도 자신만이 그것을 죽이고 파괴하실 것이며, 종말과 같은 우주적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오직 임박한 재림을 위해 최후의 나팔 소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믿었다. - (345)

  • 루터는 인간을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 (345)

  • 요한계시록과 에라스무스 : 형식적인 이유, 즉 계시록의 사도적 기원과 정경에서의 그것의 위상에 관한 의심 - (346)

  • 요한계시록과 루터 : 계시록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복음적으로 모호하다는 이유에서 정경성에 의문을 품었다 - (346)

  • 루터는 계시록의 천년왕국에 대한 성서 자체의 명료성보다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관점을 따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시대(20:1-10)를 지상의 교회로 이해했기에, 원시 그리스도 교회 이래로 임박한 종말론에 의한 천년왕국의 대망은 급격히 후퇴하고 그것은 교회 주변부의 비밀집회와 분파주의 운동 따위에서나 고대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 (346)

  •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시대를 종말론적 미래로 본 것이 아니라 교회사적 과거로 해석했다. - (346-347)

  •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에 관한 유명한 논쟁은 농민전쟁에 대한 생생한 인상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347)

  • 에라스무스가 루터에서 비롯되는 폭동, 분파주의, 중상비방 같은 것에 우려를 표한 것과 달리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말과 규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맞서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348)

  • 온건한 에라스무스의 눈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사회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스런 사상으로 비취진 반면, 루터의 시각에서는 에라스무스가 사회적 안정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투쟁에 과감하게 참여하지 못하는 비겁한 인물로 각인된 것이다. - (348)

  • 루터의 적그리스도 : 하나는 칼슈타트와 뮌처의 노선을 추종하는 광신도들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로마가톨릭교회였다. - (348)

  • 루터의 이념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동과 반란을 정당화하는 혁명적인 잠재력을 심는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혼합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잃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목적을 성서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라는 우려 내적인 심령적 확신보다는 외적인 말씀, 즉 성서를 우위에 둔 신학적 논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 (349-350)

 

III. 뮌처의 종말론

 

  • 농민전쟁 와중에 나온 멤밍엔에서의 ‘12개조항은 유럽 역사에서 등장한 보편적 자유의 권리를 선포한 헌장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 (350)

  •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부나 광부들의 입장에서는 봉기가 정치적 행위이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종교적인 행위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 (351)

  • 초기의 여러 종교개혁운동이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거칠게 말해 로마서 13장의 해석에서 세속 당국에 대한 저항권 문제, 그리고 종말론을 현재의 역사적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방법론에 놓여있다 하겠다. - (351)

  • 루터가 로마서 13장의 1, 2절의 해석에서 신민의 복종을 강조한 반면 뮌처는 3, 4절 해석을 통해 시민의 저항에 대해 강조했다. - (352)

  • 뮌처는 특히 가난한 자들과 사회정의에 관련될 때 내적 일관성이 작동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로워 질 수 있다는 루터의 칭의론적 사고에 반대하고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만 성취되고 현실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 (352)

  • 뮌처에게서 칭의는 신앙의 고백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그리고 개인적 삶에서의 구체적인 정의로운 행위로 인도된다. (352-353)

  • 뮌처의 종말론 사상이 농민전쟁을 추동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353)

  • 농민전쟁의 동인으로서의 뮌처의 종말론이 갖는 특성 : 1) 종말은 수확의 때와 관계된다. 2) 종말의 시간은 예언적인 것이며 과거보단 미래에 정향되어 있다. 3)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주체는 루터처럼 하나님만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4) 선민들의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행전 244-46절에 나타난 사도들의 공동체처럼 새로운 사도공동체의 모습을 갖는다. 비밀결사, 폭력 사용 허용 - (354-355)

 

IV. 종교개혁과 혁명

 

  • 루터는 1525년 싸움이 격화되었을 때 농민들과 영주들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쉬바벤 농민들의 12개 조항에 답하는 평화를 위한 권고그러나 농민들을 질책 - (355-356)

  • 혁명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루터는 도적질하고 살상을 일삼는 농민 강도떼들에 대항하여를 통해 농민들을 정면 공격했다. - (356)

  • 루터의 혁명이나 봉기에 대한 인식은 중세말의 보편적 규범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에 대한 부정적 의미 - (356)

  • 루터에게 혁명은 단순히 영주에 대한 반란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란, 즉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었다. - (357)

  • 루터는 범법자를 죽이는 것은 영주의 의무사항에 해당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 (357)

  • 루터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악마의 자식들, 적그리스도라고 정의하는 순간 루터는 피에 굶주린 통치자들에게 마음 놓고 농민들을 학살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해준 셈이다. - (357)

  • 봉기의 무질서보다 훨씬 더 심한 무질서한 보복(징벌 또는 반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으로 십만 명에 이르는 농민이 학살되는 비극과 루터의 성공한 종교개혁은 무관할 수 없다. - (358)

  • 루터의 변명 : ‘농민들을 가혹하게 대적한 소책자에 대한 공개서한대량학살의 일차적인 원인이 농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속 당국의 무자비한 처벌이 냉혹하게 보이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일 수 있다는 식으로 자기 확신을 냉혹하게 드러내고 있다. - (358)

  • 묵시적 종말론의 대망이 혁명을 일으킨 농민뿐만 아니라 영주들 사이에서도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가 적들을 적그리스도라 보았다. - (358)

  • 농민이나 통치자나 공히 종말론적 신앙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묵시적 성서본문의 해석에서는 서로 극단적으로 정치화되고 이념화되었다 할 수 있다. 결국 양쪽 다 이념적이었기에 성서본문의 해석은 성서를 문자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상충하는 권력의 이해관계에 정최되는 경향이 농후했던 것이다. - (359)

  • 뮌처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 루터의 현실주의 - (359)

  • 현실적으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승리했으나 그 결과는 역시 불행했다 하겠다. 종교개혁을 영주의 권력에 기대어 성공한 종교개혁, 부르주아의 대변자이자 민중에 대한 배신자 루터, 영주의 하수인 루터 등의 불명예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 (359)

  • 성서주의자 루터의 약점은 요한계시록이 정경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끈질긴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 (359)

  • 루터는 계시록 본문의 해석을 자신이 주도하는 종교개혁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공격논리로 활용한 셈이다. - (360)

  • 뮌처는 시대를 앞서 정치적ㆍ종교적 폭력에 대한 당대의 경향성과 정치적ㆍ종교적 이념과 정의에 대한 희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실천을 미리 그려보았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평가를 요한다. - (360)

  • 엥겔스는 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뮌처의 인간해방 메시지에서 독일농민전쟁 이후에 일어난 모든 혁명의 선구자적 이미지를 읽어내었다. - (360)

  • 엥겔스의 해석에 따라 뮌처는 정치적 자유, 평등, 세상의 평화를 함의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근대 유럽에서 세속적으로 정치적으로 실현시키려 했던 최초의 실천가가 된 것이다. - (361)

  •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 해석은 사적 유물론과 지배ㆍ피지배계급간의 계급투쟁을 통한 변증법적인 역사발전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 (361)

  • 엥겔스의 과도한 뮌처 사랑은 뮌처의 영웅화 작업을 넘어 그의 정체성까지 흐리게 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 (362)

 

V. 나오면서

 

  • 루터의 종말론에서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종말의 표징이었으며 적그리스도는 종교개혁의 걸림돌인 교회의 타락과 타락한 교회의 수장인 교황 그리고 광신도들이었다. - (363)

  • 뮌처 : 종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루터와는 크게 다르다. - (363)

  • 루터는 세속당국의 통치자가 악하거나 불신앙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운 세속당국의 권위에 순복할 것을 강조하다. 루터는 농민전쟁 중에도 두 왕국의 교리를 고수하며 혁명을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사악한 행위로 간주했으며 뮌처와 농민군을 적그리스도라 규정했다. - (364)

  • 뮌처 : 통치자가 그 검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 선민들이 검의 사용권한을 상실한 통치자의 손에서 뺏을 수 있는 것이다. 칼은 악한 통치자나 그의 정권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무고한 백성을 탄압하는 악한 통치자를 제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 (364)

  • 루터는 혁명보다는 억압을 선택했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개인도덕과 공적도덕을 구분해 버렸다. - (364)

  • 루터는 독일의 종교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독일의 통치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었기에 통치자들의 탈선에 대해서는 공적인 질서의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직접적 마찰을 피해간 것으로 보인다.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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