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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 세계의 교회와 신학자들이 20C의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자로 꼽고 있는 바르트가 왜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졌을까?... 바르트는 20세기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고 이를 기초로 그의 전체 신학을 체계화했고... 수많은 유럽의 학문적 신학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찬생을 강조했던 신학자였다. (309)
- 한국 장로교회는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심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거대한 교회 분열이 일어났고 이 분열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310)
- 한종회...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이라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오류가 많은 비판서 저술... 2002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부에서 출간... 한종회는 바르트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신학자로 규정하고 비판... 코넬리우스 반틸이 바르트를 잘못 비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르트의 주 저서인 「교회교의학」도 읽어보지 않고, 또한 읽어볼 필요도 없다고 언급하면서 바르트를 비판했다. (310)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으로서의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 1951년 장로교 고신측의 분열... 1953년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 기장측의 분열... 1959년의 장로교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311)
-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알려진 신신학에 대한 논쟁이 1953년 기장측의 분열과 1959년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311)
- 미국 장로교회 안에 있었던 신학적 논쟁과 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 한국 장로교회에 그대로 파급되어 마침내 한국 장로교회가 크게 분열되는 비극... 미국 장로교회는 손실이 미비... (311)
-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그레샴 메이첸...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고 1936년에는 미국 장로교회에서 분열된 새로운 교단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세운 장본인... 1936년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개명... 근본주의 신학이 1920년대 중반부터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에의해 거부당했기 때문... 개인적으로는 그의 독선과 분파성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변증학 정교수로의 인준이 미국 장로교회 총회에서 계속 보류된 것과, 1937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가 분파주의적 행동을 했던 메이첸이 주도한 독립선교부에 소속된 성직자들을 메이첸과 더불어 목사직을 정지시켰기 때문... (311-312)
- 1934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로버트 스피어가 주도하고 있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던 해외선교부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1933년 독자적으로 독립선교부를 만들고 메이첸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메이첸의 독립선교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언... 1935년 3월 29일 메이첸이 소속된 뉴 브룬스윅 노회는 특별위원회를 열고 메이첸에 대해 유죄선고를 내리고 정직을 선포한 바 있었다. 메이첸은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312)
- 브래들리 롱필드... “이 기쁨은 오랫동안 그의 것이 되지 못했다. 6개월 안에 메이첸은 해외 독립선교부의 의장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어린 교단은 전천년설과 알코올음료 사용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다시 갈라졌다. 그러한 싸움에 지친 채로 그는 1936년 12월 소규모의 그의 추종자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노스다코타로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는 폐렴에 걸렸으며 1937년 1월 1일 비스마크에서 죽었다.” (313)
- 메이첸이 만든 정통장로교회... 군소교단으로 전락... 1965년 정통장로교회는 교세가 12,867명... (313)
- 미국 장로교회는 1910년대까지는 근본주의 5대 신학강령을 준수하는 구파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교회... 유니온 신학교에서 당시 최고이 성서학자로 명성을 갖고 있던 찰스 아우구스투스 브릭스를 고등비평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891년 총회에서 브릭스 교수직에 대한 지명을 거부했고, 1910년과 1916년 총회에서 근본주의 5대 신학강령을 계속적으로 채택했다. (313-314)
- 1921년 구파 칼빈주의 신학자의 거장이자 미국 장로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의 지도자인 워필드가 사망... “근본주의는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로 유명한 해리 에머슨 파스딕 목사의 재판... 근본주의자 맥카트니가 총회에서 승리했으나 파스딕이 속한 뉴욕노회는 헨리 코핀을 중심으로 총회 결정에 불복했다. (314)
- 1925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분수령이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실천신학 교수인 찰드 어드만을 총회장으로 당선시키면서 신학적 방향을 근본주의에서 신학적 관용과 통합으로 바꾸기 시작... 근본주의로는 더 이상 변화하는 시대의 정신을 지도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 (314-315)
- 세기의 재판으로 알려진 스콥스 재판에서 근본주의의 대표자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스콥스 진영의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우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가’ 같은 단순한 질문에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미국 장로교회 내의 상당수 교육받은 지도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스콥스 재판 5일 후에 이 재판의 실질적인 패배자(법적으로는 스콥스가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음)이 근본주의자 브라이언이 사망... 근본주의 운동은 교육받고 도시적인 문화의 진전과 더불어 사라질 농촌적인 현상이자 사회적 후진 지역의 정신이라는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315-316)
- 1926년의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 때부터 미국 장로교회는 압도적으로 근본주의 정신과 결별을 고하기 시작... 미국 장로교회는 진리의 핵이 일치하는 곳에서의 견해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관점을 채택했고 이러한 관점에 기초한 총회보고서를 작성한 후 총회는 일어서서 3분간 박수갈채... 메이첸을 프린스턴 신학교의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 교수로 임명하자는 동의안을 무기 연기시킴... (316)
- 1925년 이후 프린스턴 신학교... 학문적인 관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복음적인 신학교의 모습으로 변천하기 시작... 1930년대로 이어지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적인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신학교가 되었다. 1937년 존 맥케이(학장)... 오토 파이퍼와 엘머 홈릭하우젠과 같은 신정통주의 교수진... (316)
- 1925년을 분수령으로 미국 장로교회가 근본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것은 변화하는 시대를 바르게 지도하기 위한 바른 신학적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사회와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신학정신이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근본주의는 점차 약화되었고 낡은 옛 정신을 반영하는 신학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316-317)
- 메이첸... 1929년 프린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움... 오스왈드 알리스, 로버트 윌슨, 반틸...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 (317)
- 박형룡은 메이첸의 시학에 심취... 메이첸의 근본주의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놓은 한국의 메이첸... 박형룡의 비판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로 나타난 첫 번째 사건은 1953년의 기장의 분열... 김재준은 성서의 고등비평학을 인정했지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 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적 특징이 강한 사람이었다. (318)
-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삼천만환 사건과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이견... 근본주의 신학을 파수하고자 하는 박형룡측과 세계교회와 신학의 흐름에 개방적이고 보다 폭넓은 신학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318-319)
- 메이첸의 근본주의 운동은 명백히 실패했다. 그렇다고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이 절대적인 신학은 아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신학적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의 잘못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근본주의 신학이나 성서무오설이 아니면 같이 일할 수 없고 교단 분열도 불사하겠다는 메이첸 식의 편협한 분파주의적 정신은 교회의 일치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된다. (319-320)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권위
- 한국의 장로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신학적 이유의 중심에는 성서관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은 17C 칼빈주의 정통주의에 의해 형성된 사상으로 19C 말엽부터 20C에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320)
- 축자영감설의 붕괴...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전성기(19C)... (321)
- 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스승이자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 하르낙으로부터 “학문적 신학을 조소하는 자”라는 질책을 받음... 신정통주의... 17C의 옛 정통주의 신학을 20C에 다시 회복했다는 의미... (322)
- 옛 정통주의자들... 기계적 영감설... 근본주의 신학자 워필드... “성서 원전의 무오”... 바르트는 성경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말이 아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강조...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이 말씀에 대한 인간적 증언... 성서 안에 인간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 :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구유와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관의 근본적인 오류는 성서속의 인간적 약점에 기인한 일부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성경의 본질을 뒤엎은 데 있다. (323-325)
- 바르트의 성서관은 17C 옛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과는 차이가 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성서관과는 매우 유사하다... 루터에게는 오히려 성경에 대한 비판적 특징이 존재하고 있었다... (325)
-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복음이었다. 그리고 성서가 바로 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326)
- 칼빈은 성서의 저자인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조금씩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서를 성서되게 하는 것은 문자적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성서가 갖고 있는 내면적 권위에 있었다. (327)
- 20C의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바르트의 성서관은 종교개혁자들의 성서관의 20C적 부활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오늘의 시점에 있어서 세계교회의 신학에 가장 큰 위험과 도전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과연 방어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21세기에도 계속적으로 우렁차게 선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328-329)
폭넓은 개혁신학에 기초한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
- 20C의 개혁신학...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니버 형제들, 독일의 몰트만, 마이클 벨커, 스위스의 루카스 피셔와 얀 밀리치 로흐만, 스코틀랜드의 톰 도란스, 네덜란드의 베르꼬프와 베르까우어, 미국의 다니엘 밀리오리나 거스리 등에 의해 가르쳐지고 계승되고 있는 신학 속에 개혁신학의 중심 전통이 존재하고 있다. (330)
- 개혁신학이란 어떤 한 사람의 신학을 절대화하는 그런 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이란 시대와 역사의 변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신학을 개혁하는 신학으로 21세기에는 또 다른 개혁신학을 개혁교회는 형성해야 할 것이다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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