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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8권] 2장. 1910년 전후 친일세력의 동향과 일제의 육성책
제1절. 러일전쟁과 승리에 대한 전망
1.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 러시아... 벌목에 유리한 조건과 남하정책... 압록강 건너 백마산성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용암포에 병참기지 구축을 위한 작업과 의주지역의 토지ㆍ가옥의 매입을 추진... 만한 국경지대에서 러ㆍ일간의 긴장 고조... (35-36)
- 대한제국 정부는 당시까지 추진하던 열강의 승인을 통한 영세중립국 대신 독자적인 국외중립 선언을 서둘렀다... 일본은 무시, 러시아 방관...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나가서는 ‘합병’을 지지하면서도 국외중립 선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정부는 ‘경성중립’을 모색...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해 2월 8일 인천해전에서 승리하고, 서울에 입성한 후 2월 10일에 공식으로 선전포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압박해 2월 23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 (36-37)
- ‘한국은 일본세력하에, 만주는 러시아의 보호하에’ 두자는 ‘만한교환론’... (37)
2. 일본의 승리 전망
- 동학교단 제3대 교주 손병희... 일본의 승리 예측... 이 기회를 이용해 전쟁에 참여하면 전승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강화회의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손병희는 망명객으로 동학에 입도한 권동진, 조희연 등과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이들의 소개로 일본 군부의 실력자와 정계인물들을 접촉하면서 무력을 동원해서도라도 친러세력을 몰아낸 후 정부를 개혁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권동진은 회고담에서 당시에는 대한제국 내의 친러파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동학교인과 독립협회를 규합해 민당(民黨)을 조직하고, 일본의 원조를 통해 친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38)
- 『황성신문』은 러일전쟁이 무르익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만주뿐만 아니라 한국ㆍ중국, 나아가 일본의 존망도 위협하는 것이므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황성신문, 1903년 10월 1일 논설... (39)
- 『황성신문』의 입장은...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ㆍ중국의 독립과 영토를 지켜주기 위해 일으킨 “一大義旗(일대의기)를 거(擧)”한 것으로 판단... 인종론의 입장에서 동양의 연대를 주장... (39)
- 1904년 7월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침략적 속성을 지적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배반’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러한 의도가 있었던 것인데, 한국인들이 오히려 러일전쟁 초에는 일본의 승리를 희망하다가 이제야 그 실상을 알게 된 것이라고 진단... (39-40)
- 일본이 전쟁에 이겨야 한국의 독립이 유지된다는 주장... 1904년 2월 중순 이준, 정순만, 이현석, 유종익 등이 발표한 취지서에 나타나 있다... (41)
- 유길준... ‘조선의 운명은 일본과 러시아에 있고, 두 나라가 만일 조선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망할 것이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국상책’... 전쟁을 벌이더라도 만주방면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며, 이때 조선은 마땅히 일본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 (42)
- 박영효의 1900년을 전후로 두 차례 쿠데타 시도... 고종과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의친왕 이강을 추대하려는 계획... ‘혁명일심회’의 쿠데타 계획과 방법론에서 동일... (42)
- 박영효, 혁명일심회, 유길준 등의 쿠데타 시도는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러시아나 친러정권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공유... (43)
- 인종론적인 측면에서 한ㆍ청ㆍ일 삼국동맹론... 당시 독립협회의 반외세운동에서 계승된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의식은, 일본의 승리를 지지하던 미국과 영국을 배후로 한 이승만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43-44)
3. 러시아의 승리 전망
-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전망...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II세에게 보낸 비밀서한... 일본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한 반면 러시아는 우호적인 군사동맹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44-45)
- 러시아는 자국의 이해관계가 침해당하지 않는 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관망하면서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 1907년 7월 30일 일본과 비밀협약을 체결... (46)
- 헤이그특사에 대한 고종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외무성은 자국 대표이며 헤이그국제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에게 대한제국 특사의 회의참석을 거부하도록 전문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러시아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사전에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46)
-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민족파의 일부 및 엄귀비파’도 마찬가지였다... 친러세력들도 정작 일본의 승리가 가까워지자 재빠르게 일본에 편승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주력했다... (47)
제2절. ‘이등박문추도회’와 친일세력의 동향
1. 이등박문 사망과 대응
- 초대 통감(1905.12~1909.6) 이등박문은 시정개선을 통해 한국인 스스로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점진적인 병합정책을 추진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등 저격과 사망은 큰 충격... (49)
- 양기탁은 10월 31일 서부 약현 자신의 집에서 이등조난축하회를 개최하려다 사장 맨함의 경고로 중지한 일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사회단체나 개인이 추도회를 준비하거나 추모단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줄곧 비판했다. (50)
- 『황성신문』... 전현직 사장 남궁억ㆍ유근 등이 모두 ‘국민대추도회’ 발기인과 위원으로 참여했다. (50)
- ‘겉으로는 애도의 마음... 이면에는 모종의 계획’ (51)
- 한성주재 일본계 신문기자단은 10월 26일 경성호텔에서 회의를 개최해, “이등공작이 한인의 손에 죽은 것은 배일사상의 표현이며, 장래의 화근을 단절하기 위해 차제에 대한정책에 대한 최후의 해결을 정할 것을 기대하고, 한국 황제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상하에 사죄할 것을 희망한다”는 결의서를 채택... (51)
- 순종은 일본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 위문하고 시종원경 윤덕영을 위문사절로 결정... 고종은 승녕부총관 조민희를,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 위문사절로 결정... 10월 27일 한국 황실과 정부 대표, 통감부 파견원, 한성부민회장 유길준 등이 대련으로 출발했다. 일본 유학 중인 황태자는 시종무관 김응선을 보내 이등의 부인을 조문하게 하고 곧바로 만주로 파견했다. (52)
- 대한협회 회장 김가진은 10월 27일 통감을 방문해 위문하는 한편 유족에게 전보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대한협회는 이번 일이 한국민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52)
- 일본 정부는 이등의 공식 사망을 10월 26일 오전 10시로 하고, 11월 4일 국장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순종은 “우리나라의 흉수(兇手)에게 사망한 고로 온 나라가 진해(震駭)함을 이기지 못해 이에 추도”한다는 전문을 보내고, 이등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53)
- 순종은 11월 4일 내린 조칙 서문에서, “이등공은 일본의 원훈(元勳)될 뿐 아니라 동양평화의 지보자(持保者)이며 또 실로 우리나라 개발의 일대 은인”이고, ‘일본의 보호에 의지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며... 이러한 황실과 정부의 대응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지난번 황족 완평군의 서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특별히 이등공에게 이러한 조처를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54)
2. ‘이등박문추도회’ 참여계열
- 1910년 초까지 확인된 각종 이등 관련 행사... (55-56)
1) 관민추도회 계열
- ‘관민추도회’는 대한제국정부와 내각이 주도하고 한성부민회가 보조해 개최한 대규모의 추도회였다... 추도회 절차는 “사례편람을 준용”해 총리대신 이완용의 제문에 이어 각 대표들의 제문낭독과 분향, 황족ㆍ관리ㆍ사민과 각 학교 직원ㆍ학생 등의 참례로 이어졌다. 추도회 당일 한성의 분위기도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관민추도회에 참여한 단체와 인물은 정부 관리이거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결국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가 관민추도회를 통해 의도했던 것은 이 행사를 통해 한성부민 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민들이 이등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56-60)
2) 국민대추도회 계열
-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 주최로 각 단체ㆍ인물들이 연합해 추진되었다...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제국)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되었다. 1908년 5월 8일에는 유길준이 주도해 전국적 지방자치제도 실시를 목적으로 하는 ‘한성부민회’가 새로이 조직되었다... 이 추도회는 정부가 주도한 관민추도회와는 다르게 대한제국기 자치단체인 한성부민회가 주도하고, 대한협회 및 일진회와 협의하거나 기타 사회 여러 단체의 인물들이 모두 망라되어 추진한 행사였다... (60-63)
- 국민대추도회 참여 인물의 주요 행적... (64)
- 일진회는 합병 동조세력을 규합회 정국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계열과 대립했다... 일본이 이등사건을 계기로 무력을 앞세운 대한정책을 전개할 것으로 판단하고, 각자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도회를 준비... (65)
3. 일진회와 이완용계열의 대립
- 이등에 대한 조문ㆍ추도ㆍ추모 관련행사... 1) 단일단체에서 주최한 행사... 2) 행사주체가 ‘친일성향’의 단체... 3) 이등의 덕을 기린다는 명분... 본격적으로 ‘친일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조직되는 계기가 된 것... (65)
- 일진회는 1909년 12월 4일 회장 이용구가 100만 회원 명의로 ‘합방성명서’를 발표해 주도권 장악에 나섰고, 이에 대해 이완용게열은 일진회를 비난하며 세력을 규합하면서 일본정부와 정치ㆍ외교적인 타협을 모색했다... (66)
1) 일진회 계열
- (1) 한자신문사추도회 : 국민신보사 사장이자 일진회측 정견협정위원인 최영년은 한성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사와 함께 연합추도회 개최를 추진... 11월 14일 동대문밖 원흥사에서 국민신보사, 대한신문사, 한성신보사 등 3개 신문사만 참석한 가운데 한자신문사추도회가 열렸다... 대한매일신보사 처음부터 제외... (66-67)
- (2) 신령군 추도회 : 경상북도 신령군 보통학교에서 군수 이종국 주최로 농회장 박상기와 농회 회우너, 지방위원 황응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다... ‘도일사죄단’을 발기할 것을 주문... (67)
- (3) 사죄단 : 1909년 10월 29일에 일진회 경북지부 총무 윤대섭, 평의원 김영두, 회원 강영주 등이 사죄단을 조직했다... 이등 사건이 결코 전 국민의 뜻이 아님을 사죄하기 위해 대표를 조직해 일본에 파견하자고 주장... (67-69)
2) 이완용계열
- (1) 국민연설회
이완용은 한국 정부의 총리대신 자격으로 이등박문으로 조문하고, 관민추도회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결집했다. (69)
11월 27일 탁지부대신 고영희를 대판의 조폐국 화폐시찰을 명목으로 일본에 파견해 수상 계태랑에게 5개조의 합방안을 제출... (69)
국민연설회는 이완용계열이 국시유세단, 대한상무조합본부, 신궁봉경회 등 친일단체를 규합해 일진회의 ‘합방청원’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명의로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어용단체... (70)
국민연설회는 한성을 시작으로 전국에 유세위원을 보내 일진회를 고격하고, 내부와 경시청에 글을 보내 일진회의 성명서를 압수하도록 촉구... (71)
국민연설회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소극적인 대응, 무엇보다 병합정책에 대한 일본정부의 방침결정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게다가 1909년 12월 22일 종현의 천주교회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다녀오던 이완용이 이재명의 저격을 받았다. (71) - (2) 한자통일회추도회
이완용 주도로 개최된 반일진회 성격의 행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72)
제3절. 1910년대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
1. 조선귀족의 ‘창출’과 이용
1) 수작자 선정과 현황
- 합병이 정식공포된 8월 29일 황실령 제14호로 공포된 「조선귀족령」... 1910년 이전 각종 매국 조약에 동조한 이른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구적 등은 모두 「조선귀족령」이 규정한 제2조의 3개 조항에 따라 작위를 받았다. (73)
- 조선귀족의 선정 결과를 보면 ‘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가 무엇보다 비중있게 고려되었다... (74)
- 대한제국 황실과 종친 및 인적으로 작위를 받은 인물... (74-75)
- 일본의 「화족령」에 따른 공작은 없지만, 그 변형으로 공족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냄... 구한국 황실 예우... (76)
- 조선귀족 선정은 한일합병 직후 시작... 조선측은 농상공부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앞장선 조중응이 참여... 이완용이 이재명의 피습으로 치료중... 1910년 10월 7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작위수여식에서 확정된 조선귀족은 76명... (76)
-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77-78)
- 최초 수작자 중 작위 거부와 반납자... 김석진, 조정구, 민영달, 유길준,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 (79)
- 일제는 조선귀족을 특별 관리하면서 늘 현황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중 1925년 10월 작성된 「조선귀족약력」에는 작위 거부ㆍ반납자를 포함한 수작ㆍ습작자 개개인에 대한 내력과 행적, 일본에 대한 공로, 성품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80)
- 김석진은 수작 사실이 알려지자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함으로써 상속신고불이행에 따른 특권상실이라는 「조선귀족령」 제20조가 적용... 조정구는 작위를 거부하고 자살시도 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80-82)
- 최초 수작자 중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로 작위 실작자와 습작불이행자... 82-83)
- 김사준은 의친왕 이강의 장인으로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1915년 7월 1차 세계대전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성낙형을 만나, 성낙형이 19개 조항으로 작성한 「중한의방조약안」을 받아 의친왕 이강을 거쳐 고종에게 전달하도록 부탁을 받았다. 김사준은 의친왕에게 조약안을 전달하려다가 발각ㆍ체포되어 같은해 10월 30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작위를 잃었다. (83)
- 김윤식과 이용직은 1919년 3ㆍ1운동 때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19년 7월 17일 작위를 잃었다... 김윤식은 1910년 8월 22일 중추원 의장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약 체결에 동조하고, 자작 작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ㆍ경학원 대제학 등에 임명되었다. 이용직은 합병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배제되었으나, 자작 작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83-84)
- 김가진... 1919년 3ㆍ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냈다... 작위를 박탈할 마땅한 조항이 없어서 ‘습작신고 불이행에 따른 습작 불능’으로 처리... (84)
- 백작 민영린... 아편흡입죄로 징역 3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1919년 7월 「조선귀족령」 제16조에 따라 작위를 잃었다... 조희연은 남작 작위와 함께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나 재산을 모두 탕진해 빚으로 쪼들리다가 1915년 5월 사막 직전에 작위를 반납... 백작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예우 정지와 회복을 몇차례 반복하면서 근근이 작위를 유지하다가 손자 이해충이 습작... 자작 이기용과 후작 이해승 두 명은 해방될 때까지 최초 수작자로 작위를 유지하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85-86)
2) 수작자에 대한 우대정책
- 일제가 조선 귀족을 ‘창출’한 것은 자신들의 표현에 따르면 ‘일본과 병합되기 원한’ 대한제국 황실과 공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이자, 이들을 우대함으로써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 일반 민에 대한 ‘지도’를 요구함으로써 일종의 간접 통치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86)
-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일반 민에 대한 솔선수범과 지도를 요구... (87)
- 은사금은 현금 일시불이 아닌 공채증서의 형식...실제로 은사공채는 조선귀족의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87-88)
- 일제강점 초에는 쌀값 변동이 크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은사금 2만 5,000원으로 약 1,515가마의 쌀을 살 수 있었다. 현재의 쌀값(20kg에 5만 5천원, 80kg에 22만원으로 환산)으로 1,515가마를 산다면 3억 3,330만원이 소요... 당시 1원은 현재 금액으로 약 1만 3,000원으로 환산할 수 있다.... 은사공채 총액은 약 806억원, 이자는 약 17억에 이자총액은 약 40억원... (89-91)
- 조선귀족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지배정책을 선전ㆍ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 창출해 낸 것이었고, 조선귀족으로서는 이민족의 지배하에서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친일파의 ‘원조’... (91)
3) 조선귀족 관련 법령
- (1) 「조선귀족령」(황실령 제14호, 1910.8.29)... (91-94)
- (2) 「조선에 재주(在住)하는 귀족에 관한 건」(황실령 제15호, 1910.8.29)... (94-95)
- (3)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회규정」(조선총독부령 제17호, 1912.3.1)... (95)
2.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설치와 이용
1) 중추원의 성격과 변화
- 중추원... 1910년 9월 30일자 칙령 제355호 총 11개 조항의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로 제정ㆍ공포되면서 설치... 일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는 식민 통치 하위파트너로서 “조선총독에 예속하여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하는” 기구... (95)
-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설치한 이유... (96)
- 초기 중추원의 구성... 중추원의 관제 개정 변화... (97-98)
- 1910년대 중추원의 조선총독의 자문을 위한 기구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대한제국기 상층부를 친일세력으로 우대하여 일제의 동화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음을 총독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98-99)
2) 중추원 역임자와 경제적 대우
- 초대 부의장은 김윤식이 임명되어 1919년 7월 실작으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재임... (101)
- 1910년대 중추원 부의장ㆍ고문에 임명된 자들... 1)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를 받은 인물.. 2) 통감부시기 이후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고위관직에 임명된 국가정책의 결정자 내지 참여자로서 왕족 혹은 외척이거나 세습적인 지배문벌에 속한 자들... 3) 대부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매국행위를 행한 친일반민족적인 인물... 4)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으로 인한 김홍집 친일내각의 붕괴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되어 도일ㆍ망명한경험을 가진 사람들... 5) 일본 유학 또는 정부관리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문물을 시찰한 경력이 있는 자들... 6) 초대 부의장 김윤식(75세)를 제외하고 대부분 임명 당시 40대에서 50대가 주류... (102)
- 1910년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된 자들... 1) 대한제국시기 대부분 주임관 이상의 관직에 있으면서 통감부시대 적극적인 친일관리로 변신을 꾀한 인물... 2) 찬의 가운데 4명이 작위를 받긴 했으나 중추원 고문과 달리 세습적인 문벌집안 출신이 드물었다... 3) 대부분 통감부시기 대한제국기 고등관 이상의 관리 출신자들... 4) 임명 당시 나이는 40대에서 50대가 주류... (102-103)
- 1910년대 중추원 부찬의 임명된 자들... 1) 찬의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기 고등관 관료들인데, 고문이나 찬의에 배해 그 직위가 낮은 편... 2) 연령은 50대에 임명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30대에서 40대에 해당하며 고문과 찬의에 비해 젊었다... 3) 부찬의 중에는 근대식 서구교육을 받았거나 일본에서 유학 혹은 문물시찰을 한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103)
- 중추원 의원 연수당 지급 현황... (104-106)
3.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련 법령
1) 「조선총독부 중추원관제」(칙령 제355호, 1910.9.30)... (108-110)
2)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사 규칙」(훈령 제65호, 1910.12.12)... (110-112)
3) 「조선총독부 중추원 사무 분장 규정」(훈령 제3호, 1918.1.19)... (112)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개정 비교...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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