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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8권] 제1부 제3장. 1930년대 이후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의의
제1절. 1930년대 전반기 기독교인의 민족운동
1. 농촌계몽운동
- 기독교인들은 1928년 중반 이후에 기독교계의 실제화와 민중화라는 목표하에 농촌운동과 절제운동을 전개... 한국교회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에 따른 것... 1928년 중반을 전후로 한국교회는 기존의 자선사업이나 구제사업과 같은 사회봉사적인 차원에서 머물던 사회의식에서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차원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57)
- 1928년 부활절에 앞서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2주간에 걸쳐 개최된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 김활란, 신흥우, 양주삼, 정인과, 노블, 마펫이 참여... 한국교회에게 “교회의 사회화는 필수적이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해 주는 하나의 이정표... 교회가 사회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58)
- 한국교회의 민중화와 실제화에 대한 인식 전환은 1929년 모트(Mott) 박사의 내한을 기회로 개최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회에서 나타남... 연합공의회 내에 사회사업위원과 농촌사업위원이 신설... 기독신우회 결성... 기독교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기독교 농촌연구회도 조직... (59)
- 1932년 이후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정책으로 쇠퇴... 1932년 7월 우원일성(宇垣一成)이 총독으로 부임한 후 입안ㆍ발표된 농업정책...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농업공황을 맞이한 일제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개한 농촌정책... 조선총독부의 농촌운동 방해로 기독교인들의 농촌운동은 쇠퇴... 대공황의 여파로 한국교회에 지원되던 선교비도 감소... (59-61)
2. 절제운동
- 1928년 중반 이후 다시 전개된 사회주의자들의 제2차 반기독교운동과 1930년대 초반 신비주의적 소종파 운동의 발흥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사회신조’를 채택... (61)
- 제2차 반기독교운동... 1928년 7~8월 동안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6차 대회 ‘결의서’의 결과에 따른 것... 36항... 한국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적 단체 속에 들어가 정력적으로 혁명적 계몽활동을 하여 민족개량주의 지도자를 고립시키고, 그 단체에 속해 있는 근로대중으로 하여금 민족개량주의 지도자로부터 떨어져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 (61)
- 일국일당주의... 과거 조선공산당은 파벌투쟁으로 운동역량이 부족하므로 승인을 취소하고 해산을 결의... 1928년 12월 중앙위원회 정치부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취소하고 해산결정서을 발표... ‘12월테제’... (62)
- ‘12월테제’에 따라 한국공산주의자들은 좌경화 노선을 걷기 시작... 이러한 노선은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연장선상에서 전개... 1929년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자 혁명이 도래했음을 보다 더 확신... 코민테른의 국제정세 인식... 세계대공황은 주기적 공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의 붕괴과정이며, 자본주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공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 (62-63)
-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와 일련의 국제적인 정세에 따라 민족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주의자들의 비혁명성을 폭로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 (1) 종교본질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종교존재 의의’를 근본적으로 부정... (2) 반종교투쟁을 정치투쟁의 일환으로 전개해야 하며, (3)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할 때 반종교운동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써 기독교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3)
- 1차 반기독교운동 때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아예 사회주의자로 전향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제2차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를 단호하게 반박하는 입장...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는 것을 강조... (63)
- 신비주의적 소종파 운동을 주도한 인물... 이용도, 황국주, 유명화, 한준명... 세상의 현상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면의 세계에 강조를 두며 경건에 이르는 강력한 훈련이 주된 관심사... (64)
- 이용도의 부흥회는 1931년에 절정에 달함... 절대적인 가난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던 한국인들은 현실도피적인 경향으로 나아갔다... 자기 혼자 영혼 구원에만 몰입하는 현상... 유명화의 접신극사건, 황국주의 예수자처사건... 이러한 소종파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좋은 빌미를 제공... (64-65)
-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과 신비주의적 소종파 운동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 천명이었다... 반유물주의를 채택하고 오로지 기독교만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표명하명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동참하자고 주장... 당시 농촌계몽운동이 쇠퇴하자 이를 대신하여 절제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연결.. (65)
- 절제운동은 기독교 여성들의 주도 이루어짐...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가입... 1932년 조선기독교절제회가 창립됨... 금주금연운동ㆍ공창폐지운동ㆍ합리적인 소비절약운동... (66)
3. 적극신앙단운동
- 1932년 6월 중순경부터 1933년 여름 사이에 결성... 적극신앙단이라는 명칭은 전필순의 제안에 따른 명명... 단체 결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신흥우... 1928년 예루살렘 대회 직후... 정인과에게 제안...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 5개조 신앙선언과 21개조의 실천강령을 채택... 악의 세력, 즉 경제적 이기주의,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폐습, 정신적 황폐 등을 기독교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타파해야만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66-67)
- 적극신앙단에 참여한 인물들은 흥업구락부 계열의 신흥우, 정춘수, 유억겸, 김영섭, 이동욱, 박용희, YMCA 계열의 구자옥, 이건춘, 정성채, 엄재희, 김태원, 기독신보 계열의 전필순, 최석주, 박연서, 심명섭, 김수철, 기호지역 장로교 계열의 함태영, 박용희, 권영식, 홍병덕 등... (67-68)
- YMCA조직을 중심으로 전개... 일부 외국선교사들, 교회 지도자들, 서북기독교계 인사들은 이 운동에 반감을 표시... 신흥우를 지지하던 윤치호와 양주삼까지 적극신앙단을 배척... YMCA 원로 김정식의 ‘재경기독교유지회’ 명의로 신흥우의 YMCA 총무 사임과 적극신앙단 배격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감리교화 장로교에 제출... 신흥우의 YMCA 총무 사임... 193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될 수 없었다... (68)
제2절. 신사참배 반대운동
-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2년 태평양전쟁...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려고 노력... 병참기지화 정책과 함께 ‘내선일체’를 표방하면서 황국신민화정책도 병행... (69)
-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고치고 천황중심주의, 즉 ‘국체명징’을 표방하여 황국신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일제는 신사를 중심으로 애국반을 편성하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근로봉사의 월례행사 등을 강요... 각 가정에는 강제로 ‘신붕’을 설치케 하였으며, 이세신궁의 부적을 강제로 배포... 감시대 조직... (69-70)
- 일제의 고심... (1)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유일신을 숭상하는 기독교와 조화ㆍ공존할 수 없었다. (2) 기독교인들이 사내총독암살사건, 105인사건, 3ㆍ1운동 등의 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기독교는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3)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매개로 영ㆍ미 등 서구제국과 연결되어 세계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걸림돌이었다. (70)
- 조선총독부는 분열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식민지정책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강압정책은 신사참배 강요로 시작... (70)
- 1924년 10월 충남 강경보통학교...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건... (71)
- 신사참배문제는 1925년 10월 조선신궁 진좌제를 전후하여 절정에 달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신사참배는 강경일변도로 나아가고, 그중 압력은 교육계에 일차적으로 강요... 기독교 학교들은 폐교를 불사하고 저항... (71-72)
- 1930년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1932년 1월 전남 광주에서 발생한 후 평양 및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 일제는 신사참배 불참에 대하여 강력히 경고하는 한편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사찰을 더욱 강화... (72)
- 1932년 9월 제21회 장로교 총회는 평양부 창동예배당에서 신사참배를 절대용납할 수 없다고 결의하고, 총독부와 교섭을 시도...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 교장의 신사참배거부사건이 발생하였다.... 1935년 11월 14일 평남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ㆍ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서 도지사가 평양신사 참배를 요구... 숭실학교 교장 매큔,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는 기독교인으로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부... 숭실학교 교장 매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는 이듬해 파면당함... (72-73)
-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대체로 거부하는 경향이었지만(숭실전문학교 매큔),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 교육을 위해 응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 1938년 5월 북장로교 선교부는 강경론의 우세로 교육인퇴(敎育引退)를 결의... 남장로교 선교부는 가장 강경하게 신사참배 거부 입장을 표명... 감리교계 선교사들과 캐나다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학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전후로 천주교,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 교파는 일제의 신사참배 논리에 굴복... (73)
- 교육계에 이어 한국교회에 대해 총독부가 직접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다... 교육계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자, 그들은 교회로 화살을 돌렸다...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대책’... 장로교단은 일제의 노골적인 위협 아래 1938년 2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 개최시까지 만주지역 4개 노회를 제외한 전국 23개 노회중 17개 노회가 부분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 신사참배 논리에 굴복한 한국 기독교는 급속도로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되었다. (74)
- ‘혁신교단’이 조직... 각 교파는 개별적으로 일본 기독교에 예속... 동아기독교, 성결교, 안식교 등이 교리상의 이유로 강제 해산... 한국 모든 교파 교단은 1945년 7월 19일 일본 기독교 한국교단으로 통합되었다... (74)
- 동우회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한국교회들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결국 황국신민화정책 논리에 굴복... 기독교인들은 소극적인 대응 속에서 일제의 국가의식이라는 논리에 굴복... (74-75)
- 여성기독교단체 중에서 끝까지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한 단체는 장로교 경남부인전도회... (75)
-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재직하고 있던 평양 산정현교회... 일제는 교회재건운동을 우려하여 1940년 7월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전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을 검거... (75)
- 기독교 여성들은 신사참배 거부운동 이외에 만국부인기도회라는 모임을 통해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반대... 1941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로 해체... (75)
- 경남 통영에서 조직적인 모임을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버린 주인공은 최덕지... 염애나, 조수옥 등이 동참... (76)
- 여학교 음악선생 안이숙... 신사참배 거부와 74회 제국의회에 들어가 일본의 국체를 비난하며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는 경고장을 뿌림... (76)
제3절. 기독교 민족운동의 성격
- 기독교 민족운동은 ‘토착화’와 더불어 진행... (77)
- (1) 일제강점기 기독교 민족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까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반서양ㆍ반기독교적 분위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변화... 당시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대부분 이유는 민족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2) 3ㆍ1운동 이전 기독교회라는 공간과 전국적인 연결망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한국인 정부를 대신할 수 있는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회는 전국적인 조직체를 갖춤으로써 국가적인 역할을 수행... 3ㆍ1운동 이전 한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은 기독교회 뿐이었다...
(3) 기독교회는 국회 민족운동가들과 국내 민족운동가들의 연락망 역할을 하였다... 국외 교회 조직은 사실상 국외독립운동의 ‘연락처’...
(4)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전반기 국내에서 기독교인들은 실력 양성을 통한 점진적인 독립운동을 추구하였다...
(5) 1930년대 후반 민족운동 단체들이 일제에 의해 모두 해산된 이후 민족운동 차원에서 단체를 조직하여 신앙운동을 전개한 것은 기독교 여성뿐이었다...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기독교 여성들은 학교ㆍ기독교여성단체ㆍ개인적인 투쟁 등을 통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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