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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 방법론 2] - [3] ‘상징’으로서의 계시 : 폴 틸리히 2.
2. ‘상징’으로서의 계시 :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머리말 : 이성론은 계시의 질문
- 틸리히의 변증신학의 상황의 방법의 결과는 계시의 개념이 ‘위’에서부터, 즉 계시의 현실에서부터가 아니고 ‘아래에서’, 즉 실존적, 인간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계시는 이성의 실존적 갈등 속에 포함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다. 이성은 질문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이성의 구조를 분석하고 거기에서 계시에 대한 ‘질문’을 찾는다. 계시의 해명에 있어서는 계시의 실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계시의 현상학적 접근을 찾아 계시의 실재에서 대답하는 방식을 취한다. (111)
1) 계시의 질문으로서의 이성
(1) 이성의 구조
- 틸리히는 이성이란 말의 개념을 첫째로 존재론적 이성과 기술적 이성으로 구분한다. 존재론적 이성은 로고스, 즉 실재를 파악하고 변화시키는 ‘마음의 구조’이고, 기술적 이성은 ‘추리하는 능력’, 즉 인식 능력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성’을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주관적 이성은 마음의 합리적인 구조이고 객관적 이성은 실재의 합리적인 구조이다.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의 관계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표시할 수 있다. (1) 실재론이란 주관적 이성을 객관적 이성의 창조로 보는 때, (2) 관념론은 객관적 이성을 주관적 이성의 창조로 보는 때, (3) 이원론 또는 다원론은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이 상호작용할 때, (4) 일원론은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의 통일을 주장하는 때이다. (111-112)
(2) 이성의 깊이
- ‘이성의 깊이’는 이성에게 주어져 있는 것, ‘궁극적 관심’, ‘존재의 본체’, 또는 ‘존재 자체’, ‘존재의 근거’, 또한 어떠한 창조로써도 다할 수 없는 ‘심연’으로서 이성의 뒤에 숨어 있는 요소이다. 그것은 유한 속에 있는 무조건적 요소이다. (112)
(3) 실존적 이성
- 이성(마음과 실재의 구조로서)은 존재, 실존, 삶의 과정에서 실재화한다. 이성의 본질은 유한이다. 이 유한의 구조는 칸트의 ‘비판’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험의 카테고리들은 인간의 이성이 실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게 나타나는 형상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유한의 주요한 카테고리들은 시간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시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은 시간성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제일 원인, 절대 공간, 우주적 본체 같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과성, 공간, 실재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한의 감옥이 열려 있는 유일한 요소는 도덕적 경험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여기는 어떤 무조건적인 것이 시간적, 인과적 조건들의 전체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칸트의 카테고리론을 받는다. 이 칸트의 카테고리론은 (다만 인식론적 이상주의나 윤리적 형식주의가 아니고) 인간의 유한론이다. 단언적 명령론은 실천적 깊이 속에 있는 무조건적 요소론이다. (112-113)
- ‘실존 이성’은 자기 분열된 이성이다 : 그것은 자율과 타율의 충돌이다. ‘자율’은 자기의 법이라는 말인바, 이성이 그 깊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 구조를 긍정하고 실재화하는 이성은 자율적이다. ‘자율’은 개인이 자신에게 대하여 법이 되려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합리적 이성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113)
- ‘타율’은 타와 법으로 된 말로서 이성의 한 직능 또는 모든 직능에 타율, 타와 법을 부과한다. 이 타(他)는 단순히 ‘밖의’가 아니라 이성 자체 안에 있는 한 요소, 즉 이성의 깊이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성의 자율적인 실재화에 대하여 이성, 즉 이성의 깊이를 대표하는 것을 주장하는 권위의 문제이다. 자율적 이성이 이성의 법(이성의 구조 속에 있는)에 복종하는 데 대해도 타율도 이성의 자율적인 복종(실재화)에 대하여 존재의 근거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무조건적이고 궁극적인 양식으로 말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타율은 흔히 자율이 그 깊이를 잃고 공허하고 무력하게 될 대에 자율에 대한 반문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적이다. 그것은 이성에 대해서 자율적 권위를 부정한다. 이러한 ‘타율’은 종교의 탈선에서 볼 수 있는 데 카라마조프의 대심문관에서 볼 수 있는 경우과 같다고 한다. (113)
- ‘신율’은 신과 법을 의미하는 말로서, 최고의 권위에 의해서 이성 위에 부과된 신적인 법의 수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깊이와 결합된 자율적인 이성을 의미한다. 신율적 상황에서 이성은 그의 구조적 능력에 대한 복종에서, 그리고 그것 자체의 다할 수 없는 근거의 능력에서 스스로를 실재화한다. 하나님은 이성의 구조와 이성의 근거에 대해서 법칙이기 때문에 이 양자(이성의 구조와 근거)가 그에게서 결합되어 있고, 그리고 이 양자의 결합이 신율적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실존의 상황 아래서는 완전한 신율은 없다. 양자는 서로 투쟁한다. 그리고 서로 서로 파괴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분열되어 있는 것의 재결합에 관한 질문은 이성에 반해서가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일어났다. 이 질문은 계시의 질문이다. 자율과 타율의 갈등은 교회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자율은 합리주의, 유명론, 르네상스에서, 신율은 중세기(타율화로 타락) 종교개혁에서, 타율은 타율화된 중세기, 신교정통주의, 심지어는 부흥운동에서도 볼수 있다고 틸리히는 본다. 공허한 자율과 파괴적인 타율에 대한 반항은 새로운 신율의 문제를 일으킨다. 자율이나 타율은 대답을 줄 수 없다. (113-114)
2) 계시의 의미
(1) 계시의 표식들
① 현상학적 방법
-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이해에 있어서 특수한 것은 신학의 전통적인 용어들에 새로운 철학적 해석을 준 것이다... 그는 신학의 기초 개념들에 대해서 현상학적 접근을 취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그 실재 문제를 무시하고 어떤 개념의 타당성이 긍정이나 부정이 되기에 앞서서 그 의미를 먼저 밝히고 규정하는 것이다. 계시를 논하기에 앞서서 계시의 의미를 찾는다. (114)
② 계시와 신비
- ‘계시’(덮개를 제거하는 것)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정상적인 지식을 얻는 방법을 통해서는 접근될 수 없는 어떤 감추어진 것의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감추어 있는 것이 ‘신비’이다. (114)
- ‘신비’는 ‘눈을 감는다’ 또는 ‘입을 닫는다’에서 온다. 정상적인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는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열고,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과 교제한다. 그러나 단순한 ‘신비’에 있어서는 눈이 닫혀진다. 왜냐하면 순수한 신비는 보는 행동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입이 닫혀진다. 즉 정상적인 언어로서 신비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신비가 정상적인 언어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된다. 즉 그것은 다른 차원으로 환원되었다. ‘신비’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신비한 것은 그것이 계시될 때에도 그 신비성을 잃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만 신비하게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계시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시가 그 나타남에 있어서서 신비 그대로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종교와 신학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이는 패러독스이다. 신이 자기를 계시하셨다는 것과 신은 그가 계시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비라는 두 가지 주장이 주장되는 때에, 패러독스가 암암리에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패러독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본질적으로 신비한 것의 계시의) 경험의 정상적인 컨텍스트를 초월하지만은 정상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실재가 경험이 일이 되고, 그 실재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경험사가 된다. 이 두 가지는 인식의 요소들이다. (114-115)
- 계시의 인식에 있어서 신비는 지식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정상적인 지식의 전체에 대하여 어떤 것을 직접으로 부가해 주지 않는다. ‘신비’란 말의 본래의 사용을 보호하기 위해서 잘못되고 혼돈된 사용을 피해야 한다. 1) 신비는 계시된 후에도 신비한 것이 없어지는 어떤 것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방법적 인식 접근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신비’라고 불리워질 수가 없다. 합리적 지식이 되는 대상은 ‘신비’가 아니다. 2) ‘순수한 신비’는 이성이 자체를 넘어서 그 ‘근거’와 ‘심연’에 직면하는 때에 나타난다. 가령, 비존재의 위협에 직면하는 때 마음을 파악하는 충격은 신비의 부정적인 면인데 이것은 존재의 근거의 ‘나락의 요소’를 나타낸다... 이것이 없이는 신비는 신비가 아니다. 이사야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의 경험이 없이는 신은 경험될 수 없다. 신비에는 부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또한 적극적인 면이 있다. 신비는 다만 ‘심연’으로서만이 아니라 근거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상징들과 신화들에서 표현된다. 이것들은 이성의 깊이와 그 신비를 가리킨다. (115)
③ 계시와 엑스타시
- 틸리히에 있어서는 ‘계시 일반’은 없다. 계시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인 신비의 계시로서 언제나 관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어떤 구체적인 사람에게 대한 계시, ‘계시적 사건’이다. 따라서 계시는 항상 주관적인 사건과 객관적인 사건의 엄밀한 상호 의존 속에 있다. 이 계시의 사건의 객관적인 면을 전통적으로 ‘기적’이라고 하고 주관적인 면은 ‘엑스타시’라고 한다. 틸리히는 이 두가지 말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한다. (116)
- ‘엑스타시’(자기 자신 밖에 서 있는 것)는 마음이 그 정상적인 상황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비상한(특수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엑스타시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 자신을 넘어서 있는 마음의 상태, 즉 그 주체-객체 구조를 넘어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자체를 초월하는 것에 있어서 이성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엑스타시는 다만 마음이 신비에 의하여 붙잡혔을 때, 즉 존재와 의미의 근거에 의하여 붙잡혔을 때에만 일어난다. 또한 엑스타시가 없이는 계시는 없다. 엑스타시라면 대개 특수한 종교적 경험, 개인적 영감, 비상한 영의 은사, 비밀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그룹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그러나 틸리히는 엑스타시는 이들의 전용어가아니고 ‘계시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엑스타시’는 심리학적인 ‘흥분’이나 ‘영광’과는 다르다. 소위 마음의 흥분은 신의 영의 현재 또는 계시의 사건과 혼돈하는 위험 속에 있다. ‘흥분’의 상태에서는 주관적인 어떤 것만이 일어난다. 때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열광’은 자기 자신 안에 신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열광적인 마음의 상태는 엑스타시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엑스타시와 열광은 본래의 의미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열광’은 이 개념, 가치, 인간 존재에 대한 정열적인 지지에 적용되고 종교적 함축을 잃었다고 한다. 엑스타시도 물론 ‘흥분’, ‘열광’의 면을 가지고 있지만 심리학적인 면을 초월한다. (116)
- ‘충격’은 마음이 그 정상적인 균형으로부터 떨려서 그 구조에서 흔들려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계시와 계시가 받아지는 엑스타시적 경험에서 존재론적 ‘충격’이 보존되고, 동시에 극복된다. 하나님의 현재는 ‘두려운 신비’(멸절시키는 권세)와 ‘매혹의 신비’(높이는 권세)로 경험된다. ‘두려운 신비’에서 존재론적 충격은 보전되고, ‘매혹의 신비’에서 그것은 극복된다. (116)
- ‘엑스터시’와 ‘사귀 들림’. 계시가 일어나는 엑스타시적 상태는 마음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의 엑스타시적 경험은 ‘사귀 들림’에서 구별된다. 사귀에게 홀리는 것은 마음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만 신적 엑스타시는 그것(마음의 합리적 구조)을 초월하고 보전하며 높인다. 사귀에게 홀리는 것은 이성의 윤리적, 논리적 원리를 파괴하지만 신적 엑스타시는 그것을 확인한다. 실천 이성의 원리로서의 정의가 침해되는 계시는 계시라고 주장된다 해도 신적 계시에 반하는 거짓이다. 악마적인 것은 분별의 눈을 어둡게 하고, 사귀에게 홀린 상태에서 마음은 참으로 ‘마음 밖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합리적 자아의 중심을 파악하고, 전 마음이 되려고 하는 자체의 요소들의 능력 속에 있다. ‘엑스타시’와 ‘사귀 들림’ 사이의 동일성은 모두 정상적인 마음의 주체-객체 구조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엑스타시는 합리적인 마음의 전체를 침해하지 않고, ‘사귀에게 홀리는 것’은 그것을 약하게 하든가 파괴한다. 그러므로 엑스타시는 이성의 산물은 아니나 그것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117)
- ‘엑스타시’와 ‘감정’. 엑스타시가 강한 감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엑스타시를 감정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엑스타시적 경험에서 이성의 모든 능력(인식적 능력, 윤리적 능력)들이 그것 자체를 넘어서 재촉될 때에 그 속에는 감정도 포함된다. 엑스타시적 경험은 이성의 감정적인 것 자체도 넘어간다. (117)
- 엑스타시와 ‘영감’, ‘조명’. 엑스타시적 경험의 인식적 능력을 표시하는 말로서 틸리히는 ‘영감’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때 영감이란 엑스타시적 경험에 있어서 인식적 이성의 순수 ‘수동성’을 강조한다. ‘영감’이란 엑스타시적 경험의 인식적 면의 이름이다. 틸리히는 ‘영감’과 ‘조명’을 구별한다. 영감은 ‘원계시’를 말할 때에 사용되고 ‘조명’은 종속적 계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④ 계시와 기적
- 틸리히에 있어서 ‘엑스타시’는 계시의 주관적인 면을, ‘기적’은 계시의 객관적인 면을 말한다. ‘기적’이란 정상적인 정의에 따르면, 자연법칙에 모순되는 사건을 말한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정의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입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그르치게 하고, 신학적 사용에 있어서 위험을 초래했다고 본다. 신학에서 기적은 ‘표적’(Sign)이라 하여 기적의 종교적 의미를 가리고 있는데 ‘표적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한다. 기적의 본래의 뜻은 ‘놀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계시적 경험이 ‘주는 면’을 서술하는 말(상징)인데, 자연적 구조를 파괴하는 초자연적 간섭이라는 자연법의 파괴의 사상 때문에 ‘기적’은 오해를 받는다고 틸리히는 본다. 틸리히에 의하면 존재의 신비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기적’이란 말은 가령 과학적 발견, 기술적 창조, 예술, 정치의 인상적인 일들, 개인적 성취 등과 같이 얼마동안 놀라움을 만들어내는 사건들에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이 놀란 다음에 놀라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없어진다. 비록 그것들에 대한 깊은 감탄은 남아 있고 또 그것을 증거까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감탄’에는 놀라움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본질적 놀라움’은 아니고 그것은 ‘기적’을 가리킨다. ‘엑스타시’가 마음 속에 있는 비존재의 충격을 전제로 하는 것 같이 표적사건들은 실재 안에 있는 비존재의 징후를 전제로 한다. 기적은 자연과학 과정에 있어서 초자연적 간섭의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이렇게 해석되는 경우에는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신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기적은 ‘악마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파괴의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 속에 ‘사귀에게 홀린’ 상태와 일치한다. 그것은 마법(Socery)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초자연적 기적론은 신을 마술사로 만들고 ‘사귀에게 홀리는 것’의 원인으로 만든다. 그것은 신을 마음과 실재 속에 있는 악마적 구조와 혼돈하게 한다. 순수한 기적은 틸리히에 의하면 1) 실재의 합리적 구조에 반하지 않고(모순되는 것 없이) 놀랍고, 우주적인, 흔들리는 사건이다. 2) 기적은 일정한 방법으로 우리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면서 존재의 신비를 가리키는 사건이다. 3) 그것은 표적사건으로서 엑스타시적 경험에서 받아지는 사건이다. (118)
- 예수의 기적은 기적들이 그들에게 기적-사건들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즉 그것을 신앙으로 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객관적 기적은 없다. 기적의 객관과 주관은 상관 속에 있다. 틸리히에 있어서 계시는 이성의 깊이와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이다. 그것은 실존의 신비와 우리의 궁극적 고나심을 나타낸다. 이성은 계시를 엑스타시와 기적에서 받는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고, 계시는 이성에 의해서 공허하게 되지 않는다. ‘엑스타시’는 마음의 기적이고, ‘기적’은 실재의 엑스타시라고 할 수 있다. (118)
(3) 계시의 역학
- 틸리히는 계시를 원계시와 종속적 계시로 구분한다. ‘원계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좌 안에서 일어나는 계시를 말한다. 가령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는 그의 원계시적 엑스타시에서 그리스도라 불렸던 ‘예수’이고, 후의 사람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받아진 ‘예수’를 만났다. 교회의 역사에는 계속적인 계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속적’ 계시이다. 교회의 역사는 원계시의 부가인 원계시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계속적인 ‘종속적’ 계시의 장소로서 이 종속적 계시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일의 한 면이다. ‘조명’이란 ‘새로운 존재’를 실제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식적 요소를 가리킨다. 그것은 ‘엑스타시’의 인식적인 면이다. ‘영감’은 전통적으로 ‘원계시’로 부르고 있는데 대하여 ‘조명’은 ‘종속 계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종속적 계시의 상황은 신의 영이 인간의 영을 붙잡고, 흔들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계시는 원계시이든 종속적 계시이든, 계시의 상관을 갖고 있다. 원계시는 개인을 통해서 그룹에 주어졌다. 계시는 다만 인격적 삶의 깊이에서, 그것의 투쟁들, 결단들, 자기 포기에서만 받아질 수 있다. (121)
(4) 계시의 지식
- 계시는 인간 이성의 인식적 기능에 대한 존재의 신비의 나타남이다. 그것은 엑스타시와 기적을 통해서 계시적 상황에서만 받아질 수 있는 ‘지식’을 전달한다. 이 상관은 ‘계시의 지식’의 특수한 성격을 가리킨다. 계시의 지식은 계시의 상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상적 지식의 컨텍스트 속에 부가될 수 없다. 계시의 지식은 자연, 역사, 인간의 구조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만일 지식에 대한 주장이 이 레벨 위에서 세워졌다고 하면, 그 지식은 실험적 검증들에 종속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계시의 이름으로 주장된다면 그것은 무시되어야 하고, 거기에는 연구와 검증이라는 정상적인 방법들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계시된 지식이 정상적인 지식에 간섭했다고 하면 그것은 과학적 정직과 방법론적 겸손을 파괴할 것이다. 그것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귀신에게 홀린 것을 나타낼 것이라고 틸리히는 본다. (121-122)
- 계시의 지식은 존재의 신비에 대한 지식이고, 존재의 본질이나 존재들의 상관 관계에 대한 보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지식은 다만 계시의 상황에서만 받아들 수 있고 그것은 정상적인 지식에 반하여 이 상황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이 상황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같은 말들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122)
- 계시의 지식은 통상적 지식을 간섭할 수 없고, 통상적 지식은 계시의 지식을 간섭할 수 없다. (종교의 지식과 과학의 지식은 다르다!) ... 갈릴레오의 시대에서 다윈의 시대까지 신학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반항은 종교와 세속화가 분리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틸리히는 본다. (122)
- 계시의 지식은 비록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되지만 사실적 주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적 연구에 의한 비판적 분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진리는 계시적 지식의 차원 속에 있는 ‘표준들’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계시의 지식은 일반적 지식과 같이 그 자체의 ‘표준들’에 의해서 판단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123)
- 틸리히에 의하면, 계시의 지식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신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비적 또는 상징적이다. 이러한 지식은 신과 세계의 관계의 본질에 의존한다... 틸리히에 있어서 계시의 지식이 ‘유비적’이라는 것은 유한과 무한 사이의 고전적 ‘존재의 유비’론에 관한다. 이러한 ‘유비’가 없이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연신학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신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이 아니다... ‘존재의 유비’는 ‘종교적 상징’과 마찬가지로 계시 안에 잇는 인식적 직능에 내용을 주기 위하여 유한한 실재로부터 가져온 재료를 사용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계시적 지식의 인식적 가치를 감하지 않는다. (123)
(5) 실제적 계시
① 실제적 계시와 궁극적 계시
- 실제적 계시는 반드시 최후적 계시이다. 왜냐하면 계시적 경험에 붙잡힌 사람은 그것이 존재의 신비에 관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가 이 존재의 신비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에 대한 진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있는 계시를 ‘궁극적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틸리히에 있어서 ‘궁극적’은 ‘마지막’ 이상이다. 교회의 역사에는 계속적 계시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궁극적’ 계시는 ‘마지막’이 아니다. 다만 ‘마지막’이 최후적인 ‘참된’ 계시일 때에만 최후적 계시는 마지막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 계시는 ‘마지막’ 계시 이상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계시의 ‘표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있는 계시의 궁극성의 문제의 ‘표준’은 이것이다. 즉, “그것이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힘을 갖고 있을 때 계시는 ‘궁극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런 부정이다. 그의 십자가에서 예수는 권능과 의미에 있어서 제자들에게 메시아임을 드러낸 그 계시의 순간을 희생했다. 이와 같이 다만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 그는 ‘법’이 아니고 ‘은혜와 진리’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있는 계시의 궁극성을 이 기초 위에서만 주장할 수 있다. 어떠한 유사한 것을 그 자체의 권리 위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요구하는 것은 악마적이다. 예수는 이 가능성을 사탄의 유혹으로서 거부했다. 그러므로 궁극적 계시는 ‘타율적’이 되지 않고 우주적이다. 그리스도교의 무조건적, 우주적 성격의 요구는 타종교들에 대한 그것 자체의 우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써 궁극적이 되지 않고 궁극적 계시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궁극적이거나 우주적인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 그것이 궁극적이고 우주적이다. 이 의미에서 한 종교가 궁극성을 요구한다든가 우월성을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틸리히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을 받는다. 예수는 다만 ‘그리스도’로서의 종교적 또는 신학적 대상이다. 그는 자신 안에서 단순히 ‘예수’라는 것을 희생하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이다. 그의 그림에 있어서 결정적인 특징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위해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자신 안에서 계속 희생하는 ‘자기 희생’이다. (123-124)
②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있는 궁극적 계시
- 최후적인 계시의 표준은... 그리스도교가 궁극적 계시로 보는 것, 즉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나타남”에서 온다... 궁극적 계시는 엑스타시와 기적의 상관에서 일어난다. 계시적 사건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다. 그는 궁극적 계시의 ‘기적’이고, 그를 받는 것은 궁극적 계시의 엑스타시이다. (124)
- 모든 가능하고 실제적 역사에 의미를 주는 역사의 중심... 그에게서 성취된 카이로스는 궁극적 계시의 성좌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를 궁극의 계시로서, 즉 메시야, 그리스도, 위에서 내려온 사람, 하나님의 아들, 영, 육이 된 로고스, 새로운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그렇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있는 계시, 즉 최후적 계시는 우주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계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125)
(6) 계시의 근거 : 하나님과 계시의 신비
- ‘존재의 근거’라는 말의 종교적 표현이 신이다. 계시론은 신의 삶과 그의 자기 현현의 삼위일체적인 해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틸리히는 계시의 근거를 사용하기 위해서 ‘세가지’ 말을 사용한다. (125)
- ① ‘심연’... 신비적 언어에 있어서 신의 삶의 깊이, 다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성격을 ‘심연’(abyss)이라고 한다. ② ‘로고스’... 철학적 언어에 있어서 신적 삶의 형식, 의미, 구조의 요소를 ‘로고스’라고 한다. ③ ‘영’... 종교적 언어에 있어서 위의 두 요소의 역학적 통일을 ‘영’이라고 한다. (125)
- 계시를 신비로 만드는 것은 신적 삶의 심연의 성격이고, 신비의 계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 삶의 논리적(로고스) 성격이다. 계시가 받아질 수 있는 기적과 엑스타시의 ‘상관’을 만드는 것은 신적 삶의 영적 성격이다. (125)
- 신적 삶의 심연의 성격이 무시되면 합리주의적인 자연신론이 계시를 보도로 변형시킨다. 만일 신적 삶의 논리적(로고스) 성격이 무시되면서 합리주의적 유신론이 계시를 타율적 복종으로 변형시킨다. 만일 신적 삶의 영적 성격이 무시되면 계시의 역사는 불가능하다. (125)
3) 상징으로서의 말씀
(1) 머리말 : 문제점
- 바르트가 케리그마적, 말씀 중심, 은총 중심적 복음적 신학인데 대해서 틸리히의 신학은 질문과 대답의 상관의원리에서 일관해 나간 변증법, 종교철학적 신학을 대표한다. 그러나 두 신학자의 공통점은 서로 다른 의미의 내용에서라고 해도 철두철미 변증법적 원리 위에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126)
- 틸리히에 있어서는 변증법은 질문자(이성, 철학)와 대답(계시, 신학)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적인 관계가 되고, 바르트에 있어서는 변증법은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의 역설적 통일(신성과 인성의 통일)에서 출발하여 신학 또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이해가 일방적이 아니고 신적, 인적의 역설적 톡일이 끊임없는 변증법적인 원을 움직인다. (126)
- ‘말씀’에 대한 논쟁...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 자체, 성서(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말씀과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설교의 말씀을 동일화하는 데 있다. 틸리히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자의 신학’... 틸리히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기현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지 않고 기록된 성경 말씀과 교회의 인간적 설교의 말과 동일화한다면 그의 의도도 불가피하게 17세기 신교 정통주의처럼 글자로서의 성서 말씀의 신학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126-127)
- 틸리히는 사실상 바르트에게서 ‘신정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통주의의 위험을 보고 경고하고 있다... ① 말씀이라고 하는 말의 특수성이 없어지고, ② 설사 그 특수성이 보전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기현현이 문자 그대로 말하여지고 씌여진 말씀에 제한되어 하나님의 비언어적 자기 계시의 성격이 없어지고 만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모순되는 것 뿐만 아니라 성서문학에 있어서의 종교적 상징주의에 모순된다고 본다... 틸리히는 ‘말씀의 신학’에 대하여 ‘상징의 신학’을 제창한다. (127)
- 우리의 논의의 문제... 1)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트에게 있어서와 같이 계시의 실재인가, 그렇지 않으면 틸리히와 같이 다만 계시의 상징인가? 2) 말씀이 상징적인 경우와 실재인 경우에 그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이며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127)
(2) 상징으로서의 말씀 : 그 개념
- ‘말씀’은 계시의 불가결의 매개이다...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이성이 본질로서 인간 속에 있는, 가령 씨나 불꽃과 같은 내적 말씀이 아니다. 이것이 틸리히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이라고 할 때에 의미하는 것이다. 상징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상징은 그 자신을 초월하여 그것이 상징하는 ‘것’을 지시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은 표식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틸리히에 있어서는 상징이 그 상징하는 실재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표식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128)
- 틸리히는 ‘상징’이라는 말의 새로운 사용과 해석을 통하여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형식을 기계적 문자적으로 동일화하는 경향과 또 그 반대로 의미와 형식을 완전히 분리하는 순수 주관적 플라톤형의 이원론을 동시에 피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틸리히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재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틸리히의 신적 진리에 관해서 바르트와 공통된 비문자적, 동적 이해를 볼 수 있다. (128)
- 틸리히의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에서 근본적인 의문들... 1)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의 출발점 또는 표준이요, 2) 그가 이 모든 개념과 그 해명을 위해서 사용하는 그의 독특한 변증법의 성격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으로서의 실존적 경험과 그 변증법으로서의 상관의 원리이다. (128)
(3) 상징으로서의 말씀 : 그 비판
①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으로서의 경험
- 틸리히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 경험하는 말이 상징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재료가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경험한 신적 자기 현현의 인간적인 말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존재 근거, 즉 하나님의 자기 현현에 대한 불가피한 상징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궁극적 실재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뿐만 아니라 역사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도 그것이 신적 자기 현현으로 경혐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참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과 문화가 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능한 지참자가 될 수 있다. (129)
- 두 가지 문제점 지적... ① 형식과 내용의 문제... 틸리히는 성서와 설교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는 노스틱의 위험과 또 이것이 그리스도론에 적용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위험을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틸리히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것은 다만 상징, 즉 하나님의 본질, 이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에 있어서 그 형식인 예수가 상징으로서 그 내용인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노스틱적 신플라톤주의 네스토리안주의적 과오... 틸리히의 상징관으로 보면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객관적으로 “하나님 이다”는 객어가 되지 못하고 “예수는 신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본질과 의미의 무아의 경험을 통하여 그 형식을 넘어 그리스도의 의미의 세계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적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과 고난과 그의 존재의 관계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존재(본질)와 그의 말과 행동과 고난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 매개와 의미 사이에 객관적인 통일이 있지 아니하면 안 된다... 역사성이 업어질 때 도케틱, 노스틱 위험을 면할 수 없다... ②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문제... 틸리히의 모순은 일반적인 로고스와 특수한 로고스, 혹은 공통 표준과 일정한 표준을 ‘상징’의 개념 밑에서 종합하려고 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한편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 또는 로고스 철학 사이에 공통 표준이 있다고 본다. 이 공통 표준이란 공통 내용에 대한 공통된 계시의 경험을 의미한 것으로 이것을 그는 형식적 표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모든 종교와 로고스 철학의 오직 유일하고 최후적인 표준이라고 주장하여 이것을 내용적 표준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가 모든 종교의 궁극적 표준이요, 그리스도가 모든 계시의 최후적이고 유일한 상징이 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 자기 현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자기 현현이 아니라고 하면,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그의 실재와 표준에 객관적인 동일성이 없다고 하면 틸리히 자신이 주장하려고 한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지지할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어째서 석가나 노자가 아니고 꼭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유일, 절대한 궁극적 상징인가? 틸리히에 의하면 오직 신앙의 모험에 있다... 여기에서 신앙의 모험이란 신앙자의 주관적 경험, 즉 신앙자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 실재와의 종교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그리스도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객관성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에 객관적 동일성이 없다고 하면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진다. (129-131)
② 상징과 신학의 방법으로서의 상관의 원리
- 틸리히의 두 가지 공적... ① 신학적 근본주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율법적 해석인 정통주의의 과오를 피할 수 있었고, ②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인식에 있어서 그 실존적인 성격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징관이 신성과 인성의 통일에 있어서 특수한 신학의 인식 방법인 ‘상관의 원리’라는 변증법과 결부될 때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종합에 있어서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혼동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식에 관하여는 예와 아니, 가능과 불가능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자연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칸트의 형이상학에서와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성의 카테고리 속에 들어올 수 없다. 그 가능성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틸리에 있어서 이 ‘사징’이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투명한 상징으로서 그 상징 자신이 신적 경험의 가능한 매개로서 이해된다면 이것은 곧 인간 로고스에게 자신을 초월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이러한 능력 부여는 불가피적으로 틸리히 자신이 엄히 경계하고 있는 자연신학을 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신적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의 이성 자체의 능력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상징’이 그것을 상징하는 실재에 참여한 ‘어떤 것’으로서 우주적인 로고스와 결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존재론적인 해석은 디오니시우스,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적 자연주의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132)
- 모든 로고스 신학의 자기 모순의 운명... 인간에게 있어서 신인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변증법, 즉 인간이 된 하나님의 말씀 자신,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하나님과 사람의 원을 움직이는 변증법이나, 초자연 질서와 자연 질서의, 영원과 시간의 질서의 균형이 아니고(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질서 때문에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말씀과 시간과 공간의 형식, 신성과 인성의 원을 움직이고 있다. 신인의 통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자체(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시간의 결합의 가능성인 동시에 실재성이 된다. (133)
(4) 결론
- 신구약성서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상징적인 매개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말씀 자체가 상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실재 그것이다... 표현된 말씀 외에 땅 위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의 실재가 없다는 것이다. (133)
- 상징이 있는 곳 거기에는 인간의 이성이 그 형식의 껍질을 넘어 그 상징 속에 숨어 있는 순수 본질, 또는 무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이 영원과 만나는 사변적 신비주의의 이원론이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사람, 영원과 시간의 만남의 과정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듣는 것’이 아니라 명상과 사색이 된다... 말씀이 자기와 대립해 있는 타자 또는 인격, 즉 ‘당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견하고 찾아낸 것이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형이상학적 지식, 또는 영적 지적인 노스틱주의의 형태의 본질이다. (134)
4) 상징적 삼위일체론
머리말 : 반삼위일체론에 대하여
- 소시니안주의의 반삼위일체론은 거의 현대 신학에서 상식이 되었다. (134)
(1)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형성과 그 의의
- 삼위일체 교의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신학적 산물이며, 니케야 신조의 주석이고, 그들이 사용한 논리의 구조는 신플라톤주의의 본질(하나)과 현상(많음)의 형태였다고 한다... 카파도기아 신학자들은 희랍어의 ‘우시아’와 ‘히포스타시스’의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문제해명에 빛을 주었다. ‘우시아’를 존재양식에 있어서 ‘동일’, 즉 아버지, 아들이 본질을 같이 하는 공통본질 또는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하고, ‘히포스타시스’를 그들의 구별, 각자의 특성, 개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해결했다. 인간의 공통본질이 ‘우시아’라면, 개인(바울, 베드로)는 ‘히포스타시스’이다. (135)
- ‘페르소나’(라틴어, 얼굴의 마스크를 의미)가 ‘히포스타시스’의 의미를 가리키게 되었다... 언어적으로 라틴어 ‘페르소나’가 가면을, 희랍어의 ‘히포스타시스’가 개성을 의미한다면, 라틴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세 가면을 쓴 한 본질이 되고, 희랍어의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은 세 개성 속에 있는 한 공동본질이 된다... 언어적 한계성을 고려하여 역사적 교회는 이때에 받아진 삼위일체의 공식을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표준적 표현으로 여겨 온다. (135-136)
- 인간이 성서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경험의 사실을 기초로 하고, 그 개념의 철학적 사용을 합해서 교회의 신학은 성서에서 삼위일체라는 공식을 해석해냈다. 그리스도교 200년 동안의 교회의 경험으로부터 이와 같은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사용된 것은 인간의 지성이며 철학적 개념, 언어였다. (136)
- 삼위일체 교의의 목적과 의의는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본질에 있어서와 그의 계시(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오직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그의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또한 우리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존재양식을 가진 한 하나님이다. 영원한 본질에 있어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계시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같은 한 하나님이라는 사상이다. (136)
(2) 반삼위일체론의 어제와 오늘
- 삼위일체론에 대한 공격은 그리스도교 신관의 본질에 대한 공격...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의 조건... (136-137)
① 소시니안주의
- 소시니우스(1604년 사망)에 의하면 성서는 고대 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의 반삼위일체론은 그의 이성적 성서 해석이다. (137)
- 하나님의 본질은 한 인격... 신적 본질 속에는 여러 인격이 있을 수가 없다... 소시니안주의의 그리스도론은 양자론이다... 홀란드의 알미니안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자연신론(Deism)... 존 로크의 철학에 의존...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이성의 종교와 동일시하였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성서의 역사적 연구방법을 신약성서 뿐만 아니라 도그마에도 적용했다. (137-138)
- 칸트는 계몽주의의 결론... 그는 두 가지를 신학에 넘겨주었다... ① 아프리오리 하나님의 초월... ② 하나님의 인식의 출발점으로서의 아프리오리 윤리적 경험... 예수는 이러한 인간의 아프리오리의 도덕적 모험이다. 성령은 광신적인 것이라고 하여 삼위일체론의 실제적 무가치를 주장했다... (138)
② 쉴라이에르마하의 삼위일체론
-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말한 후에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이 교의가 그 자체로서 신앙에 대해 불필요한 부가라는 그의 확신... 그는 삼위일체 교의의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신앙의 본질도 이 교의와는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138)
- 쉴라이에르마하의 체계... 제1부는 그리스도교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에 포함된 ‘하나님 의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의 상세한 해명... 절대적인 하나님 의존의 의식은 세계와 인간, 그리고 하나님, 세계, 인간의 이성적 관계의 창조와 보존을 만들어 낸다... 제2부는 구원자로서의 예수에 관한 것... “구원자는 인간 본질의 동일성 때문에 모든 사람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의식의 계속적 능력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 하나님 의식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의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때 구원이 일어난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본래 교회의 회원들에 의한 교제를 통해서 예수의 구원의 능력을 전하는 이 전파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이다. 성령은 교회의 공통 정신이다... “삼위일체론의 참된 목적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유일한 하나님 의식에 대해서 말해진 것을 하나로 종합표현하는 것이다.” (138-139)
- 쉴라이에르마하의 사벨리우스 해석... 세 ‘인격’은 신적 통일의 세계와의 관계에서 계속적으로 전개한다. 즉 아들은 구원의 전개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교회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는 참된 그리고 연속적인 구별이 있으나 이 구별은 그의 ‘인격’ 안에서 영원한 구별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세계와의 관계에서만 구별이 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기능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 쉴라이에르마하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계시의 삼위일체(즉 우리의 경험에 세워진)에 그 목적이 있고 계시 배후에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에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계시에 나타난 삼위일체는 영원, 절대 타자의 자의식의 세 상징 또는 계기, 하나님의 세 기능의 상징으로 보는 고대의 사벨리안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139-140)
- 프랑크가 말했듯이 쉴라이에르마하의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교가 받아온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것, 고대의 사벨리안 주의의 부활이요, 칸트적 아프리오리 위에 선 사벨리안주의라고 할 수 있다. (140)
(3) 틸리히의 상징적 삼위일체론
머리말
- 쉴라이에르마하와 마찬가지로 부록으로 삼위일체론을 다룸...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그의 신학의 체계에 따라서 삼위일체론을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대답’, ‘신적 나타남의 상징들’로서 신의 실존적 이해의 방향에 따라서 그가 말하는 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도그마의 현대적 발전과 교정으로 생각... 노골적인 반삼위일체적 상징론... (140-141)
- 틸리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옳다고 하면 그의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반삼위일체론, 또는 비성서적 삼위일체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지 않을까 필자는 판단한다. (141)
- 틸리히는 먼저 삼위일체의 동기를 찾고... 삼위일체 교리의 문제성을 비판... 현대에 바람직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신의 재해석을 제의... (141)
① 삼위일체적 사고의 동기들
- “어떠한 일정한 모습 아래 있는 하나님의 현재의 모습들에 대한 반성 때문”... 영의 현재는 어떤 일정한 모습 아래 있는 하나님의 현재이다. 영의 현재는 창조의 교리나 구원론 속에 표현된 모습이 아니고 (물론 양자를 전제하고 또 성취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영 안에 있는 황홀하게 현재하고, 암암리에 영의 차원을 구성하는 모든 것 속에 현재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하나님의 현재적 모습들은 모든 종교적 경험과 신학적 전통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의 현실적인 것에 대한 반사들이다... “삼위일체의 상징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변화되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종교적 발전”... (141-142)
- 종교적 경험의 역사에서 삼위일체적 사고로 인도한 요소... ① 우리의 궁극적 관심 속에 있는 절대적 요소와 구체적 요소 사이의 긴장... ② 삶의 개념을 존재의 신적 근거의 상징으로 적용하는 것... ③ 창조적 능력, 구원하는 사랑, 황홀한 변화로서의 하나님의 (3중의) 나타남... 틸리히에 의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상징적 이름들을 암시하는 것은 셋 가운데 세 번째 것이다... (142)
- 하나님의 개념을 묘사하는 데서, 그리고 삶의 상징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을 논하는 데서 처음 두 가지를 취급했다...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궁극성이 강조되면 될수록, 신적인 것의 구체적인 나타남에 대한 종교적 필요가 더욱더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개념 안에 있는 절대적인 요소와 구체적인 요소들 사이의 긴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적 형상들을 세우는 것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142)
- 여러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삼위일체적 상징의 동기가 되고 또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적 논의에서 나타났던 것은 이 형상들과 궁극자의 궁극성 사이의 충돌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세 하나님주의에 빠질 위험과 이 위험을 피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궁극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의 내적 긴장 속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142)
- 삼위일체적 상징의 둘째 이유는 “삶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제목 아래서 해명되었다. 신적 삶은 영원한 “과정”에 있어서 관련성과 동일성의 재연합일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신이 죽은 동일성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 경험된다면 비존재의 요소는 그의 존재, 즉 타자성의 세움에서 보여지지 아니하면 안된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고려는 ‘근거’로서의 하나님, ‘형태’로서의 하나님, ‘행위’로서의 하나님의 구별, 즉 삼위일체적 사고를 의미있게 하는 삼위일체의 모형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142-143)
- 틸리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거나, 역설적이 아니고 변증법적이다. 신적인 것은 비합리적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것은 이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신적 로고스의 유한한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과정, 자기 소외의 행위만이 비합리적이다... (143)
-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패러독스만이 있다. 그것은 실존적 소외의 조건들 아래 있는 신과 인간의 영원한 통일 또는 본질적 통일의 나타남, 혹은 요한복음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 즉 로고스가 시간과 인간 안에 들어온 역사적 실존이다... (143)
- 틸리히에 있어서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의 가장 잘못된 왜곡이다... 삼위일체적 사고에 있어서는 제3의 근본 이유, 즉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나타남 속에 있는 존재의 신적 근거의 나타남”에 의해서 동기가 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진술과 같이 삼위일체의 문제는 니케야 신조에서 삼위일체론의 결단은 칼케돈의 그리스도론적 결단에 앞서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론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 문제는 논리적이다. 그러나 동기에서 볼 때는 순서는 그 반대이다. 그리스도론적(칼케돈 같은) 문제가 삼위일체의 문제를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틸리히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론적 주장들을 논한 다음에 삼위일체의 상징을 논하는 것이 신학적 체계의 맥락에 있어서 타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은 성령론 없이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이고, 역사 안의 새로운 존재의 실현은 영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삼위일체론을 신학적 체계의 마지막에 놓는 것은 신학적 가르침들의 “실존적 이해”의 방향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이었다고 하며, 그는 쉴라이에르마하의 방향을 따른다... 틸리히에 의하면 종교적 인식과 신학적 반성(삼위일체의 상징을 포함하여)의 소스는 “그리스도교적 의식”(쉴라이에르마하와 같이)이 아니고 “계시적 상황”이다. 그리스도교 의식은 다만 계시를 받는 면이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하가 신앙이 그것의 신적 원인에 관계되어 있는 여러 가지 방식들로부터 이 상징을 꺼내는 때 쉴라이에르마하는 옳다고 틸리히는 본다. (143-144)
- 바르트가 그의 하나님의 말씀론을 삼위일체론으로써 시작한 방법은 잘못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체계에서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하늘로부터, 즉 중개되지 않은 성서적, 그리고 교회적 권위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모든 신학적 상징도 그렇거니와 삼위일체의 상징은 “인간의 운명 속에 포함된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44)
- 틸리히에 의하면 실존적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인간의 운명은 세 가지 개념에 의해서 특징지워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이 인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1)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질문은 유한이고, 2)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인간의 실존적 존재에 대한 질문은 소외이다. 3) 우주적 삶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에 관한 질문은 애매성이다. 즉 인간의 유한으로부터 일어나는 질문들은 신론과 거기서 사용된 상징들에 의해서 대답되고 인간 소외로부터 일어나는 질문들은 그리스도론의 과정에 적용된 상징들에 의해서 대답된다. 삶의 애매성으로부터 일어나는 질문들은 영혼과 뜻의 상징들에 의해서 대답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이 대답들은 각각 특수한 계시적 경험으로부터 꺼낸 상징들 속에 있는 “궁극적 관심”에 관한 것을 표현한다. (144-145)
- 삼위일체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에서부터 성서 안에 증거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하나님을 창조자, 속죄자, 구원자로서의 한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위한 수백년 동안의 교회의 신학적 또는 신앙고백적 노력에서 왔다... 틸리히는 이러한 교회의 케리그마의 행동과 신앙고백의 행동과는 전혀 관계없이 “인간의 궁극적(종교적) 관심”에 대한 대답, 궁극자의 경험과 구체적인 경험 사이의 실존적 경험, 삶의 애매성의 변증법적 표현에서 궁극적 관심에 대한 대답의 상징으로 규정하려고 한 것은 너무나 비신학적인 것 같다. 삼위일체의 표식은 단순한 궁극적, 종교적 관심의 상징적 표현인가? 그것은 성서에서 만나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하나님은 같은 한 주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 더욱이 우리가 성서의 증언에서 만나는 아버지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령으로서 만나는 계시의 하나님은 다름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교회가 고백한 것이다.... 틸리히의 삼위일체의 동기 해명에는 이 케리그마적, 교회적, 신앙고백적, 신학적 동기는 읽을 수 없고 실존적 동기만이 지배적이다... 그의 삼위일체론의 동기의 서술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대답의 상징이 된다. 이것은 성서가 가르치는 구체적 계시와 신앙의 고백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의 해명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만일 오늘날 틸리히의 삼위일체의 교훈을 신학적, 신앙고백적으로 따진다면 현대의 실존주의적 사벨리안주의의 부활 또는 쉴라이에라하의 상징주의의 실존주의적 변증법으로의 교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43)
-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비판한 것...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되는 진리는 성육신된 진리, 구체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추상적인 환상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어떻게 성서에서 증언된 아버지, 아들, 성령의 계시적 행동을 하늘에 비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의 소스를 성서의 증언에서 찾았지 결코 인간의 경험이나 세계의 사실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서의 말 자체는 아니고 교회의 신앙고백이며 신학적 산물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뿌리를 그는 다만 성서의 증언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계시적 행동에서만 찾았다... 따라서 틸리히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자기 현현)의 세 상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계시에 나타난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될 수 없고,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상징이다. 틸리히에 있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계시에 나타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믿어온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다른 사벨리안적 하나님이다. (145-146)
② 삼위일체 교의에 대한 태도
- 틸리히는 이 항목에서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 교의의 문제성과 모순을 비판, 지적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문제는 하나님과 그의 로고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 이 문제는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너무나 실존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와 그의 구원하는 계시의 능력의 가치판단과 그의 구원하시는 계시적 능력이 그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케아에서 아리우스를 극복한 것)... 아리안주의의 반신(半神)의 예수는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삼위일체의 문제는 대답되기보다는 주장되었다고 틸리히는 지적한다. (146-147)
- 니케아의 언어의 사용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우시아)은 하나님과 그의 로고스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히포스타시스’는 구별된다... ‘히포스타시스’는 자체 위에 서 있는 능력, 상호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독립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니케야의 결정을 “아버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아들 로고스는 ‘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어떻게 궁극적인 관심이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하면서도 상호관계에 의해서 다른 두 개의 하나님의 형상들에서 표현될 수 있을가를 틸리히는 묻는다. 영의 신성은 제3회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규정되었다. 그것의 동기는 역시 그리스도론적이었다...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영은 계시로서 나타난 삼위일체의 영은 아니다. 계시에 나타난 삼위일체는 “영이신 하나님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147)
- 삼위일체 교의에 대한 틸리히의 문제 : “어떻게 궁극적 관심이 하나의 신적 ‘히포스타시스’ 이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147)
- 초대교회 삼위일체론의 논리적 모순... 종교적 기도... “기도는 그 안에 하나님의 본질이 존재하는 세 인격의 하나에게 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기도는 그 인격과 구별되는 어떤 다른 분에게 드리는가? 거기에 아무 구별이 없다고 하면 왜 우리는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가?” (147)
- 역사적 예수, 즉 로고스가 ‘육신’이 된 인간은 삼위의 제2의 히포스타시스(인격)으로서의 로고스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물어지는 순간 어려움이 일어난다고 틸리히는 본다. 틸리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상징들에 대한 비상징적 해석은 유한한 카테고리들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삶의 역사를 가진 유한한 개성을 로고스 속으로 가져올 것이다... 나사렛 예수 또는 역사적 인간의 모습 또는 존재의 창조적 근거의 어떤 특수한 나타남의 모습을 영원한 로소그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틸리히는 본다. 그러나 역사적 인간에 대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나사렛 예수는 영원한 로고스의 상징이다.” (148)
- 신적 근거의 삼위일체적 나타남은 인간에 대해서 상징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러나 틸리히에 있어서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예수 중심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상징에서 보여진 하나님은 다른 세계들을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그의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틸리히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주장, 본질에 있어서와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은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틸리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하나님(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의 상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148)
- 틸리히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희랍 정교적 이해 속에 있는 종속적 요소는 실재를 가장 낮은 데로부터 가장 높은 데로 인도하는 등급으로 해석하는 고전적 희랍의 실재와의 만남이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영속적인 흔적들 중의 하나이다. 이같은 실재의 실존적 이해는 플라톤의 심포지움으로부터 오리겐에 이르고, 오리겐으로부터 동방교회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이른다... 이 도그마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형태들의 정치적으로 보장된 상징이 되었고, 모든 교회들에 있어서 근본적인 예배의식의 공적 형식이 되었다. (149)
- 틸리히는 18세기 이후, 반도그마적 계몽주의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삼위일체의 전통적 주장을 반복할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그는 구체적으로 반삼위일체론으로 일어난 소시니안주의와 유니테리언주의를 옹호한다. 다만 이들에게 흠이 있다면 그들이 삼위일체적 상징의 “종교적 동기들”에 정당성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오늘 다시 삼위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실존주의적 상징신학의 원리에서 삼위일체를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149)
-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와 그리스도, 인간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의 통일은 오직 상징일 뿐이고 실제적이 아니다... 틸리히가 해석하는 삼위일체의 상징적 해석은 초대교회가 거부한(양자론적 그리스도론, 에비온적 그리스도론, 노스틱적 그리스도론, 사벨리안주의 아리안주의) 그러한 삼위일체의 하나인 ‘실존적 상징주의’라고 해서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149-150)
③ 삼위일체의 재해석의 요구
- 삼위일체 도그마의 ‘기능’에 있어서 일어난 극단적인 변화... 제단 위에 놓고 예배를 받아야 하는 불가해한 신비가 되었다는 것... 신비는 존재의 근거의 영원한 근거가 되지 못했고, 그 대신에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 문제의 수수께끼가 되었다는 것... 숫자들에서 부조리의 영광이 되었고 이 형태에서 교회의 권위주의와 탐구하는 정신의 억압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150)
-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기능은 “숫자 속에서 부조리의 영광”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신앙의 중심문제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에서 출발하여 성서적 하나님의 신앙고백을 찾았던 것이고, 삼위일체의 셋이라는 수자는 이 신앙고백에서 결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학적 언어이고 성서의 계시의 해석으로서 철학적 사고방식이나 자연적 논리방식에서는 불가해한 신비일 수밖에 없다. (150-151)
- 그리스도교는 거듭거듭 도그마티즘과 권위주의에 항거해 왔고, 교회의 전통, 신앙고백들은 시대 시대의 성서적 이해와 케리그마의 행위를 위한 안내로 삼아오고 있지 않은가? ... 신학자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에 참여하고 있는 실존적 신앙자라면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삼위일체의 기능은 초대교회가 그리고 오늘의 교회가 성서에서 우리에게 만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행위, 아버지, 아들, 성령의 한 구원의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려는 데 있다는 것 외에 다르게 말할 수 없다고 본다. (151)
- 틸리히는 소시니안주의와 유니테리언주의의 반(反)삼위일체적 항거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다만 삼위일체적 상징의 종교적 동기들에 정당성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들의 약점으로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들이 하지 못했던 약점을 고려에 넣으면서 삼위일체 교리의 교정을 성취코저 한다. “신학적으로 당황하지 않고 또는 전통에 대한 단순한 복종이 아니고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위대한 말을 또 다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기도를 듣는 사람들 안에 미신적인 형상들을 일으키지 않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축도를하는 것이 또 다시 가능한가?” (151)
-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이 축도에서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얻고 집으로 돌아가는지 아는가? (151)
④ 삼위일체 교의의 재해석의 시도
- “신적 삶과 영의 현재”에 의해서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을 비판... (152)
- 첫째 문제는 ‘삼위일체’라는 말에 표현된 3이라는 수자에 관한다. 이 숫자를 지켜야 할 정당성은 무엇인가? 어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의 2위일체적 경향이 3위일체적 상징에 의해서 극복되는가? 왜 4위일체로 확장되지 않았는가? 틸리히에 의하면 이 문제들은 역사적 동기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로고스와 영 사이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았고 또 비실존적 그리스도론의 문제는 영의 개념과 관계없이 발전했다. 영의 개념은 개인들과 그룹들의 황홀한 경험을 재촉하는 신적 능력을 위해서 보류되었다는 것이다. 4위일체의 경향(마리아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든 로마 가톨릭교회이 도그마를 의미)... 틸리히는 이러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3인격들의 공동본질들을 3인격으로 구별하는 가능성... 이것은 신성을 3인격 위에 세우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3인격들의 하나로서 그리고 신성의 공동 소스로서 보는 것에서 온다고 본다. 4위일체적 경향의 두 번째 이유는 성처녀를 신적 권위에 가까운 자리로 높인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틸리히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셋이라는 숫자가 아니고 ‘신적 자기 현현의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셋은 경험적 삶의 본질적인 변증법에 일치하고 신적 삶을 상징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그럴싸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틸리히는 판단한다... “삼위일체의 상징은 변증법적이다”는 틸리히 자신의 주장이 기도의 형식과 신학적 사고에 있어서 ‘셋’이라는 수자가 지속되어 온 그 이유의 확증이 된다고 본다. (152-153)
- 둘째 문제는 삼위일체 속에 있는 남성, 여성에 관한 문제이다... 개신교가 성 처녀의 상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한 이러한 종류의 구체적인 상징은(전체 종교가 보여주듯이) 그것의 참된 능력을 다시 세울 수 없다... 참된 개신교 상징 속에 남성과 여성의 2자택일을 초월하는 요소들, 그리고 일방적인 남성으로 결정된 상징에 대결하여 발전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잇는가 없는가가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틸리히는 세 가지 가능성을 지시한다. 1) 그것은 “존재의 근거”의 개념에 관계되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개념적이나 부분적으로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상징인 한에서 “존재의 근거”은 출생하고, 이끌고, 껴안고, 동시에 소환하고 피조물의 독립성에 항거하고, 그것을 삼키는 어머니의 성질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 자체 또는 존개의 근거라는 말에 대한 많은 개신교도들의 불안한 느낌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종교적 의식,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 양심은 이 하나님을 다른 모든 인격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 지배적인 하나님의 “아버지의 형상”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틸리히는 본다... 2)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대로, 로고스는 남성과 여성의 이자택일을 초월하는 그의 자유한 특성과 자기 희생의 상징이다. 자기 희생은 남성과 여성의 성격이 아니고 자기 희생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서, 양성 중 하나의 다양성을 부정한다. 자기 희생은 남성-여성의 양성의 대조를 깨뜨린다. 그리고 이것은 상징적으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나타났다. 이 고난받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강도를 가지고 참여하였다... 3) 틸리히는 하나님의 영의 개념으로 향한다. 그는 카오스 위에 배회하는 영의 형상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틸리히는 우리는 그것을 직접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노골적인 남성 상징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 형상 속에 포함된 여성의 로고스는 유대교에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이 남성 원리를 대신하는 예수의 처녀탄생의 이야기에서도 영이 남성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틸리히에 있어서 처녀탄생은 “영적 현재의 황홀한 성격”이다. 영적 현재의 성격은 영의 경험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상징의 이자택일을 초월한다. 이 엑스타시는 합리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를 초월한다. 이 두 요소는 흔히 각각 남성 형태와 여성 형태에 돌린다. 틸리히에 의하면 영적 현재에서 황홀한 요소를 불신한다는 것은 개신교의 도덕적인 인격주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항적으로 비인격적 신비주의로 향하게 한다. (153-154)
- 틸리히에 의하면... 그것의 본래적 기능을 성취하기 위해서, 즉 포괄적인 상징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적 삶의 자기 현현”을 표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을 열어 놓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틸리히는 결론짓는다. (154)
⑤ 맺는 말
- 틸리히의 “상징적 삼위일체론” ... 1) 삼위일체적 사고의 동기에 대한 그의 해명... 2)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의 태도와 비판... 3) 삼위일체의 오늘의 재해명 또는 전통적 삼위일체 교의의 교정... (154)
- 첫째, 틸리히가 “3”이라는 숫자 문제의 지적과 해명에 관한 것... 너무나 제3자적이고 3이라는 숫자 자체가 마치 마법적인 속임수처럼 “나는 이 교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종교철학의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 느낌... 초대교회가 삼위일체 교리 속의 ‘3’이라는 숫자들에서 부조리의 영광을 찾았다는 진술은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을 너무나 유치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교의’는 악이라는 계몽주의적인 합리주의에서가 아니고는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표시하는 삼위일체 교의 그 자체를 그것의 실존적 악용과 혼돈하는 너무나 큰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성서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만나는 하나님은 같은 영원한 한 하나님의 주격이라는 신앙의 삶과 경험에서 교회가 이 경험과 신앙을 표현할 논리, 언어, 아날로기아를 찾은 결과가 삼위일체의 공식의 창조가 아닐까? ...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서의 언어는 아니다. 또 삼위일체의 언어가 성서에서 증거된 하니님을 경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거슨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교회가 만든 신앙고백의 표현이며 신학적 산물이다. (154-155)
- 둘째로, 틸리히는 삼위일체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에 관한 문제를 지적... 여성적 요소의 제거... 삼위일체의 상징 배후에 있는 존재의 근거, 인가의 공통적 관심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틸리히에 있어서는 영원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 아닌 신플라톤주의적인 신 자체로서의 근거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는 창조자, 속죄자, 구원자로서의 아버지, 아들, 성령을 그의 계시의 나타남에 있어서와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같은 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155-156)
- 셋째로, 삼위일체의 문제로서 틸리히는 남성, 여성의 조화를 자신의 방법의 체계에 따라서 그것을 신적 근거, 로고스, 영의 경험이라는 세 가지의 해석으로써 남성, 여성의 2자 택일을 초월한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교정을 “황홀한 합리주의의 요소”와 “감정적 요소”를 초월하는 영의 현재적 재해석에서 시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의 해석은 성서의 증언에서는 너무나 생소하고 종교철학적이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해명으로 받기는 어렵다. (156)
- 초대 그리스도교가 거부한 것, 삼위일체론을 현대적, 실존주의적으로, 상징적으로 교정하고 쉴라에이르마하가 시작한 현대의 사벨리안주의의 성취라고 하면 너무나 지나친 판단일까? 이 판단 위에서 볼 때 그의 신론, 구원론, 속죄론, 원죄론 등등 신앙의 내용들은 의심스럽다. 근본적으로는 그의 신관과 계시의 상징적 이해에 근거되어 있기 때문에 틸리히의 상징적 삼위일체론은 종교철학의 한 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156)
- 교회의 선교의 내용을 비판하는 것을 과제와 사명으로 삼는 교의학은 틸리히의 신학의 삼위일체로서의 실존화와 상징화는 교회의 선교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결국 틸리히의 무기는 신앙의 해명에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교와 문화와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또 이 관심을 그의 신학체계 자체를 통해서 일관하게 이끌고 나간 점에서 개신교 종교철학의 한 역할을 해낸 그 용기를 결코 낫게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종교철학적인 공헌이 교의학의 과제에 성실했다는 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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