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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친일세력의 현실인식
제1절. 국제정세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1. 전시체제기 국제정세와 일제의 대응
- 1930년대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즘체제를 구축했다. (151)
-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나라는 반소련을 외쳤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본주의의 공동의 적대국인 소련을 봉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38년 독일이 오스리아와 체코를 침공하면서 네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음으로써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52)
-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가 만주사변을 마무리 짓기 위해 화복지방으로 침략을 확대했다. 1933년 중국 국민당과 일제 사이에 일제의 만주점령을 사실상 승인하는 당고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은 중지되었다. (152)
- 일제는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화북지방을 침략하여 괴뢰정권을 세웠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문제삼아 중국에 대해 전면전을 벌이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52-153)
-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도 일제의 중국침략을 둘러싼 국제환경은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상실할까 우려하여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완전하게 승리하는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국주의 열강은 일제와 크게 대립하지 않는 범위에서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다. (153)
- 중일전쟁은 일제의 기대와는 달리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1936년 일독방공협정을 맺었던 동맹국 독일도 일제의 침략을 비난하는 등 국제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153)
- 일제 군부는 소련과 대결을 위해 국민정부와 화평을 주장... 반면 정부는 남경의 괴뢰정권을 이용하여 중국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 근위문마 내각의 총사퇴... (154)
-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일제는 독일을 모방하여 강력한 파시즘 체제를 수립하는 이른바 ‘신체제’를 선언했다. (154)
- 일제는 2차 근위문마 내각이 수립된 후 전쟁 수행에 박차를 가했다. 근위문마 내각의 방침은 전쟁수행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 체결, 소련과 불가침조약 체결, 동남아시아로 적극적 진출과 미국의 간섭 배제 등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제가 베트남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에 반발하여 석유와 철강 수출을 금지시켰다... 일제는 1940년 9월 삼국동맹(독일, 이탈리아)을 맺었고, 1941년 4월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 (155)
- 일제는 독일이 유럽에서 승리할 것이라 판단하고 아시아에서는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 1941년 7월에 인도차이나 남쪽을 침공했으며, 미국은 이에 맞서 미국 내 일제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일제는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침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55)
2.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1) 내선일체론
-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만든다는 ‘동화주의’... 1919년 3ㆍ1운동 직후 일제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천황의 적자’로서 전혀 차별을 하지 않고 일시동인의 입장에서 통치하겠다는 요지의 조서를 발표했다. 이후 동화주의는 한국 지배의 기본입장이 되었다. (156)
-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친 경제공황... 1931년 만주침략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계속 무역적자가 커지면서 모순은 심화되었다...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적자를 줄이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56)
-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안정과 한국인의 동원이 필수적이라고 인식... 국내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한국인을 통제했다... (156)
- 동원 이데올로기... ‘내선일체’... 민족차별이라는 한국인의 불만을 해소하고 전시 동원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최소화하여 전시의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데올로기... 남차랑이 조선총독으로 부임할 당시 등장... (157)
- 남차랑 조선총독... ‘국체명징’, ‘선만일여’, ‘교학진작’, ‘농공병진’, ‘서정쇄신’의 5대강령을 식민지지배의기본방침으로 밝힘... 일제 천황의 한국방문과 징병제 실시를 한국지배의 2대 목표로 설정... (157)
- 내선일체론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대륙전진병참기지라는 군사적, 경제적 요구에 입각한 현실론적 명제라고 보았다. (157)
- 안으로는 내선일체의 결실을 맺고, 밖으로 일제를 맹주로 하는 ‘아시아 사람의 아시아’를 건설하는 것이 세계평화 확립의 거점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 (158)
-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녹기연맹의 간부 진전강... 내선일체는 한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세계에 특수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일체를 세계에 확대시키고자 했다.... 녹기연맹 강부 삼전방부... 한국이 아시아 침략의 중요한 기지이기 때문에 내선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내선일체를 근위문마 수상이 주창한 ‘동아협동체’와 연결시켰다... (158-159)
- 일제는 겉으로 내선일체ㆍ민족차별 폐지 등을 내세우면서도 민도의 차이와 황민화 정도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여전히 차별을 계속했다.... 내선일체론은 일제가 한국인의 불만과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고, 침략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불과... (159)
2) 황국신민화정책의 강화
- 1938년 중일전쟁의 교착상태... 장기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한국에까지 확대... 일제는 이른바 거국일치, 견인지구, 진충보국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주도할 조직으로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을 결성... (159)
-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목표는 한국인의 황국신민화를 통한 내선일체화, 일제의 전시국책사업 협력, 조직과 협력을 통한 전시체제의 확립이었다. 이 단체의 목표 가운데 핵심은 내선일체였다... (160)
-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조직은 먼저 중앙의 조직으로 조선연맹이 있었다... 지방에는 지방연맹... 가정 단위로 애국반이 조직... (160)
- 1940년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일제 본국의 영향을 받아 국민총력운동으로 전환했다... ‘대정익찬회’ 결성...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전환... (160-161)
- 1945년 7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치달을 무렵 전쟁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해체하고, 이를 국민의용대 중앙본부로 개편했다. (161)
- 지원병 제도... 한국인에게 병역을 부여함으로써 한국인의 자발성을 끌어내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족한 병력을 증강할 수 있다는 속셈에서 나왔다... 1938년 4월에 17세 이상 한국인을 대상으로 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했다... 1944년부터 지원병제가 아닌 징병제 도입을 결정... 1944년 4월부터 징병제 실시... 1944년부터 1945년까지 20여만 명... (161-162)
3) 조선교육령의 개정
- 일제는 황국신민화교육을 보다 철저하게 실시하기 위해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교육목표로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3대 정신강령을 내걸었다... 획일적 교육... 본질적으로는 일본어에 의한 교육, 사상통제의 강화, 전쟁에 대한 협력, 황국신민의 단련강화 등을 내용으로 교육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황국신민을 육성하겠다는 입장... (162-163)
- 1943년 또 다시 ‘조선교육령’을 크게 개정... ‘두뇌가 우수한 자보다는 내선일체 이념에 투철한 인물’을 교사로 채용... (163)
- 일제는 지원병제도 실시 및 조선교육령 개정과 더불어 창씨개명으로 모든 한국인을 보다 완전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163-164)
- 1939년에는 그들과 인연이 깊던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를 내선일체가 구현되고 결실된 일대 유연(由緣)의 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하여 한국인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부여신궁을 건립하자고 했다... 애국일... 국기 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창 강요... (164)
제2절. 친일세력의 국제정세 인식과 친일논리
- 일부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한국의 장래에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 인식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국내에서는 일제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일제에 유리한 전황만 전해져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점... (165)
- 일본이 유리하다는 생각... 일제가 주창한 내선일체의 실현으로 모아져야 한다는 인식... 이광수, 윤치호, 김두정, 현영섭, 인정식... (166)
1. 국제정세의 인식
- 중일전쟁을 주목... 이광수는 중일전쟁을 ‘세계의 역사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획(劃)할만한 대사건’이자 ‘고집 센 내 마음을 열어준’ 사건으로 평가했으며, 아시아의 장래 운명과 일본의 국가적 의도 및 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166-167)
-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중일전쟁 이후 당시 세계적으로 대두하고 있던 블록화 경향에 주목했다... 현영섭... 1930년을 계기로 여러 국가가 하나의 집단으로 연합하여 블록을 구성하는 경향이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인식... 일제 주도의 동아블록을 완성하기 위해 아시아의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와 여러 민족의 강고한 결합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 인정식도 향후 세계는 네 개의 경제 권역으로 분할될 것이라는 네 개 권역론을 주장... 조선공산당원과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8년 전향하여 대동민우회 간부로 활동... (167-168)
- 이광수는 중일전쟁을 전환점으로 아시아는 구시대가 무너지고 중국을 비롯하여 인도차이나, 남양군도를 포함한 대동아공영권이 건설되고 있다고 보았다. (168)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치자가 1935년 전향하여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던 김두정도 향후 세계는 아시아블록과 구주블록, 그리고 아메리카블록으로 하는 세계의 블록으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 세 단계를 거쳐 블록을 형성... 1) 신동아 건설... 2) 아시아에서 방공의 승리... 3) 앵글로색슨의 지배로부터 다수의 피압박 여러 민족을 구제하는 것... 아시아의 부흥으로 블록화 되는 과정에서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 (168-169)
- 지식인들은 블록화는 머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169)
- 윤치호는 당시 국제정세를 황인종과 백인종 특히 앵글로색슨족과 대결 구도로 파악하고 일제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자신이 중국, 미국 유학시절에 직접 목격했던 백인들의 인종 차별에 대한 기억과 한국주재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백인 우월주의로 인해 모멸감을 느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70-171)
- 이광수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미국과 영국의 ‘악마주의’에 의해 유린된 아시아 민중을 구하고 아시아의 정신적 전통에 기반하여 도의적 평화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근대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서구 대 아시아의 인종전쟁, 문화전쟁으로 규정했다. (171)
- 이광수의 인식은 서구제국주의는 구질서이며, 일본의 황도주의는 신질서라는 인식에서 비롯... ‘팔굉일우의 도의 세계ㆍ국민주의ㆍ만방공영ㆍ공존공영ㆍ황도주의ㆍ이상주의ㆍ도의주의’ 등이 신질서로 규정... (171)
- 김두정은 18세기 앵글로 색슨을 중심으로 하는 백인종의 전성시대였지만, 20세기부터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황인종 전성시대로 세계사가 전환해 가고 있다고 파악했다... 현영섭은 인류의 발전방향이 일본과 조선이 하나의 민족이 되고, 나아가 일본과 중국이 하나의 민족이 되는 단계를 거쳐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세계일가의 국가로 나아가 하나의 세계, 하나의 민족이 될 것이라고 이해했다. (172)
2. 한국독립에 대한 전망
- 윤치호는 한국인은 독립국가를 유지해나갈 만한 실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을 반대했다... 본질적으로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불신에서 나왔다... 그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한국인의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믿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조선인들이 능력과 능률면에서 일본사람을 따라잡으려면 수백 년이 걸릴 것이며, 조선사람들이 이타주의 정신을 배우기 전에는 일본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73)
- 이광수도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한국인 내부에서 찾았다... (174)
- 윤치호와 이광수는 한국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독립운동보다는 민족성을 개조하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을 수립하는 등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지자, 두 사람은 한국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174)
- 현영섭은 한국은 일본의 일부로서 이미 일본의 정치ㆍ경제에 제약되어 있으며, 한국경제의 90%가 일본경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존립 자체는 일본과 긴밀한 연결 속에서 성립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지는 것, 즉 한국독립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민족주의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극언도 서슴치 않았다... 사회주의와 아나티즘에 대한 비판... (174-175)
- 사회주의자들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는 전쟁이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인식... 중일전쟁은 사회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 (175-176)
-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은 사회주의 이론상 오류와 이로 인한 개심, 구금의 고통 등의 원인도 작용했지만,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1938년 후반기부터 1939년 후반기까지 전향한 공산주의자 658명 가운데 46%에 해당하는 300명이 사상전향의 원인을 중일전쟁에 따른 시국인식에 따른 것이라는 결과... (176)
-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에는 소련에 대한 실망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77)
- 이에 반해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구상한 제2차 근위문마 성명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8)
- 이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풀려난 이들도 한국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78)
3. 내선일체론의 인식
- 중일전쟁...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 언론계도 마찬가지... 일본이 침략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은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고, 일본의 주도하에 세계질서도 재편될 것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정세에서 조선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현영섭... 한국인 중에서도 재상이 나오는 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인식... 일본제국을 통치하는 한국인을 꿈꾸고 있었다... (179-180)
- 인정식... 일본을 유일한 절대의 맹주로 하는 동아의 재편성... 내선일체의 필연성... 일본의 정책에 따라 한국이 병참기지화가 되면 한국은 경제적, 정치적, 문하적으로 복리와 번영을 약속할 수 있다고 주장... (180-181)
- 윤치호도 신동아 건설의 여부는 내선일체의 완성 여하에 달려있다고 이해... 그는 내선일체의 길을 거부하면 한국인의 나아갈 방향은 공산주의 이외의 방향은 없다고 보고, 공산주의를 배제하고 박멸하는 것이 한국인이 행복의 길로 향하는 것이라고 주장... (181)
- 내선일체론의 당위성을 한국과 일본간의 역사에서 구하는 이들... 이광수... 두 나라는 혈통이나 문화를 볼 때 종형제라고 주장... 김두정... 같은 조상... 동일한 문화... (181-182)
- 1) 일본사람과 일본의 구체와 문화를 이해하는 소수의 조선사람이 주장하는 ‘철저일체론’ 또는 ‘민족동화론’... 현영섭, 김두정, 이광수, 박희도, 김한경, 박영희... 2) 한국은 과거에 특수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으며 여전히 그것을 보존한 채 평행하게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행제휴론’ 또는 ‘민족협화론’... 인정식, 차재정, 윤치호, 김명식... (182)
- 1938년 12월 삼천리사 주최로 개최된 ‘시국유지원탁회의’... 인정식... 내선일체를 조선어의 폐지, 조선 의복의 착용금지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자들을 비판... 이광수도 한국의 언어와 문화 등은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 이각종도 한국문화를 말살하고 배척하는 것은 일본이 취할 길이 아니라고 주장... 이광수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국어를 비롯한 문화를 모두 없애야 하며 철저한 황국신민화를 통해 내선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 (182-183)
- 남차랑에 이어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소기국소는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던 내선일체론에 종지부를 찍는 시정방침을 내렸다. (184)
- 전시체제기하에 지식인들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고 태평양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의 주도하에 세계질서도 재편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한국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국이 장래에 복리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갔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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