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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8권] 3장. 1920~1930년대 초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동향

by [수호천사]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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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8] 3. 1920~1930년대 초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동향

 

제1절.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분열정책

 

  •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무력 대신 조선인을 회유하고 동화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문화정치는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조선 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17)
  • 언론ㆍ집회ㆍ출판 등의 제한 완화... 목적은 조선인의 언론ㆍ출판 활동을 보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전 검열을 철저히 하면서 조선어 신문ㆍ잡지 발행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심 동향을 주시하고 그 저변의 흐름을 미리 알아내는 데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18)
  • 문화정치는 겉으로는 조선인을 위한 정책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식민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하는데 목적을 둔 기만적인 정치였다... 재등실은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으로서 친일파 양성책, 민족주의세력의 포섭과 개량화, 종교단체의 분열과 어용화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19-120)
  • 31운동 이후 실력양성, 청년의 자각, 민족정신 앙양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육진흥과 문화운동을 민족독립의 우선 과제로 꼽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이 중 일부는 일제에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121)
  •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당시 총독부가 문화운동의 목표로 설정하고 지원했던 실력양성, 민족성 개조, 참정권 획득 청원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저항보다는 대일 타협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121)
  • 일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 실패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 좌절, 반일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싼 의견 대립 등으로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2)
  •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최남선 조선민시론등은 민족개량주의 논리로서 일제가 내건 문화운동의 논리(자치, 실력양성, 민족성 개량 등)를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었고, 특히 이광수는 앞장서서 일제의 문화운동 방책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최린을 통해 당시 교세가 가장 컸던 천도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하였다. (123)
  • 문화정치는 31운동 당시 표출되었던 반일투쟁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친일세력을 대량 양성하고 교묘히 민족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민족분열정책이 핵심이었다. 포섭된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한 대일 타협화 여론의 조성은 민족 내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123)

 

제2절. 친일단체의 조직과 활동

 

  • 재등실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광범위한 친일인물의 확보와 활용 방안을 담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친일 인물들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각계각층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하는 일... (124)
  • 친일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 이전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체제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받았다... (125)
  •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는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25)

 

1. 국민협회

 

  • 국민협회는 19201월에 조직된 단체로, ‘국민정신 발양’, ‘사상 선도’, ‘입헌사상의 계몽과 민권신장’, ‘자치정신 배양을 강령으로 내건 대표적인 신일본주의 단체다.... 국민협회의 모태는 19188월에 결성된 협성구락부... 민원식, 이동우, 김환, 김태영, 김명준, 황석교, 김석태, 김형복, 민석현... 31운동의 원인 제거, 민심 수습, 조선민족의 번영과 행복 도모 등을 목적으로 설립... 19201월 국민협회로 확대 개편... (125-126)
  • 대부분 한말 엘리트 출신, 현직 관료, 지역 대지주 등 조선인 유력자들... 핵심적인 활동은 참정원 청원운동...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요 논리는 참정권 실현을 통한 내선인 차별 철폐조선독립불가론이었다. (128)
  • 국민협회가 일관되게 참정권을 요구한 것은 조선인들도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129)
  • 국민협회는 기관지 시사평론비롯해서 매일신보시사신문조선사상통신등의 매체를 통해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130)
  • 참정권 청원 운동 논리는 일제 지배체제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적으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일본에 의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현실인식이었다... 이들은 합병을 강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로, 일시동인의 원칙에 따라 양 민족이 공동 번영하는 계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독립이 불가하고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참정권 청원의 근거 이유로서 대표적 논객인 김상회, 김환, 고희준 등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부분이었다... 유해무익한 독립보다는 참정권을 속히 획득하여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 (131-132)
  • 이들은 자치라 할지라도 사실상 독립국가에 준하는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독립이 불가능하면 자치도 불가능하며 자치제 주장은 실상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주장... 국미협회의 세력은 대개 자산가ㆍ지주층으로서 경제적 부는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입지와 기반은 약한 자들... 현실적으로 조선사회의 주도원을 장악하기 힘든 그들로서는 자치제는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133)
  • 1930년대 들어 총독부의 친일단체에 대한 정책 변화, 만성적 재정적자, 정세 변화에 따른 영향력 감소 등으로 점차 세력이 약화되면서 명맥만을 유지하는 단체로 전락... (133)

 

2. 동민회

 

 

  • 19244월 조선인과 일본인 유력자들이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친일단체... 1920년대 활발한 활동... 동민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재계의 거물들... 관동대지진 이후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통제가 불안해지자, 조선인 유력자들과 연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질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동민회를 창립하게 된 것... (134)
  • 조선의 재계의 거물들이 참여... 사회주의운동의 확산과 급증하는 농민ㆍ노동운동 등에 대처하고 총독부의 산업정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서는 재계의 공동대응이 필요했기 때문... 그 대응이란 교화와 사상 선도였다... ‘고도평삼랑’... 1920년대 후반에는 일본정부의 척식성 관제안에 대한 반대활동을 전개... “조선을 척식성에 속하게 하여 식민지와 동일한 취급을 하는 것은 병합의 정신에 반한다는 이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각종 강연회와 행사 등을 통해 부인들의 시국인식 강화와 총후보국 실천에 주력하였다... (134-136)
  • 최정호... “내선융화는 시정의 근본적 개혁과 함께 먼저 일본인의 반성과 실행을 통해 조선인의 의혹을 해소하고 속마음을 헤아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해야 하며, 상호간의 이해와 온정이 있어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37)
  • 이승현... “많은 주장과 광범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내선융화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 실행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혼인의 공통에 의한 민족ㆍ가정적 결합, 학교 공학에 의한 정신ㆍ지식적 결합, 사업의 공영에 의한 재정ㆍ경제적 결합등을 제시... (137)
  • 최헌식... “일한병합의 정신은 동양평화를 위해, 아니 양 민족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신을 망각하여 감정에 흐르고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은 정말로 불행이다. 제일선에 서 있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어려움을 헤치고 내선 양 민족의 융합과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 (137)
  • 조병상은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는 다른 열강과 같이 본국과 식민지 관계가 아닌 동양평화를 위한 일한병합정신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에는 일본 그 자체를 조선인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 (137-138)

 

3. 대정친목회

 

  • 191611월 조중응의 주창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ㆍ귀족ㆍ대지주ㆍ실업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 1910년대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 이외에 대정실업친목회가 거의 유일... (138)
  • 조중응의 사망으로 명맥만 유지... 1920년대 초반 활동방향과 조직을 새롭게 정비... 일본인 회원 가입, 주요 인물은 고문으로 둔다고 결정... 매일신보는 내선융화의 측면에서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 조선의 처지와 실력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으며, 내선융화를 지금까지 일본인들이 주창한 것과는 달리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제창했다는 이유... (139)
  • 회관 설립 추진이 재정 문제로 중단... 회장의 진퇴 문제 등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활동이 부진... (140)

 

4. 갑자구락부

 

  • 19248월 조선인과 일본인의 합작으로 조직된 정치운동단체였다... 정치현안에 대해 연구하고 건의할 상설 운동단체의 필요성 인식... 조선 내 일본인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 조선 내 일본인들의 이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대변하고자 함... 참정권 운동... (140-142)
  • 19302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원인과 대책을 비롯한 교육개혁 결의안을 내놓았다... (143)
  • 만주사변과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대해서 중국을 비난하고 국제연맹 탈퇴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시국대회ㆍ결의대회 등을 개최하는가 하면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대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진정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 (143)
  • 중일전쟁 이후 중국을 지원하는 영국에 대해 시국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배영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담당... (143)
  • 193911월에는 조선민사령개정을 통한 창씨개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성명을 발표... (143)
  • 1930년대 중반 이후 퇴조... (144)

 

5. 각파유지연맹

 

  • 19243월에 결성된 연합단체로서 관동대지진 이후 민심 수습과 민족운동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결성... 12개 단체가 참여... (144)
  • 19241월 발기인회... “관민일치의 노력으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독립사상과 공산주의로 빚어진 과격사상에 대한 선도방법을 마련해서 시국을 바로잡는데 이바지 하겠다고 선언... (144)
  • 19243월 창립총회... 1) 관민일치와 시정개선, 2) 대동단결과 사상선도, 3) 노자(勞資) 협조와 생활안정 등의 3대 강령 채택... (145)
  • 조선경제회 물러남... 유민회 소극적... 언론은 참여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국유미간지ㆍ삼림ㆍ광산 등의 각종 이권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 (145)
  • 결성 초기부터 여론의 거센 비난... 동아일보폭행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 (145)

 

6. 시국대동단

 

  • 19251월 각파유지연맹의 일부 세력이 보천교와 합작하여 조직한 단체... 고희준, 채기두... 내선융화의 취지를 일반인에게 알리고 친일여론을 확산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강연회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채기두 등이 각파유지연맹 내에서 자금을 유용하고 비밀리에 보천교와의 합동을 추진한 일 등으로 자체 내의 반목도 심했다... (146-147)

 

7. 대동동지회

 

  • 192010월 평양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친일단체... 선우순, 김흥건, 나일봉... 1920년대 전반기에는 경성에는 국민협회, 평양에는 대동동지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 기관지 공영(共榮)의 발간과 강연회 등을 통해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31운동 이후 조선의 사상계를 선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147)
  • 회장인 선우순... 철저한 내선일체를 강조한 인물... “조선민족과 야마토민족은 이해관계가 공통되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함게 나가야 하며, 조선인은 일본인을 믿고 일본은 조선인을 향상시켜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 (147)
  • 공영은 평양 최초의 조선인 경영 잡지... (148)
  • 1933년 선우순이 사망한 뒤에 명맥만 유지... 평양에서는 19352월 대동동지회로부터 분립한 동유회가 조직됨... 동유회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단체로서 설립 당시 회원은 조선인 64명이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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