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17대 국왕] 아신왕(阿莘王, 392~405)
- 재위 : 392년 11월 ~ 405년 9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405년 9월
아신왕(阿莘王)의 성씨는 부여(扶餘), 휘는 아신(阿莘), 아방(阿芳), 아화(阿花), 아미(阿美)이며,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 아신왕(阿莘王) 또는 아방왕(阿芳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아화왕(阿花王) 또는 아미왕(阿美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신왕은 침류왕의 장남으로서《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다. 이 날 신비한 빛이 사방을 비추며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 설화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아신왕을 가리켜서 ‘총기가 있었고 매 사냥과 말타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서술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아신왕은 상당히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버지 침류왕이 죽을 때 아신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왕위를 계승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신이 군사를 일으켜 진사왕을 제거하고 즉위했다 한다. 광개토왕 초반의 의욕적인 확장(석현성, 관미성)에 밀려 전왕 진사왕의 입지가 좁아진 틈을 타서 아신왕의 정변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393년]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를 맡겼다. 진무는 꽤 뛰어난 장수로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맹히 싸웠고 저번에 빼앗겼던 관미성을 포위까지는 했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지 군량미가 부족해 그냥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관미성은 우리 북방 끝의 요새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가지고 있는 바가 되었다. 이는 과인의 슬픔이 아플 정도인 바이니, 경이 마땅히 마음을 쓰는 바로 부끄러움을 씻도록 하라.”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외삼촌 진무를 좌장으로 삼으며 이른 말. 고구려 정복에 대한 야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394~395년]
수곡성과 패수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이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쌍현성을 쌓는 등 전시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396년]
계속되는 아신왕의 공세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향해 전격적으로 진격, 백제의 수도를 비롯한 수십개 성을 함락시켜버린 뒤 기어이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덤으로 58성 700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제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397년]
여름 5월, 임금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398년]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여, 계속되는 군역으로 백성들이 신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고 한다.
[400년]
백제가 가야, 왜군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를 구원하러온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했다.
[402년]
왜에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답사를 받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404년]
왜군과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그 때마다 패해 달아났다. 왜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청병사와 비슷한 것이었다.
[405년]
사망하였다. 아신왕 사망 당시 태자가 일본에 있었다. 아신왕의 친동생인 훈해(訓解)와 설례(碟禮)가 왕위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였다. 설례가 섭정 훈해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일본에 있던 태자는 귀국 도중 반란을 피해 외딴 섬에 피신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일본군의 호위와 해씨 세력의 비호로 숙부 설례를 제거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가족관계]
- 부친 : 침류왕(枕流王)
- 모친 : 왕후 진씨(王后 眞氏)
- 배우자 : 왕후 해씨(王后解氏)
- 자녀 : 전지왕 부여신
- 동생 : 훈해(訓解)ㆍ설례(碟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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