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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백제 21대 국왕] 개로왕(蓋鹵王, 455~475)

by [수호천사] 202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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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1대 국왕] 개로왕(蓋鹵王, 455~475)

 

  • 재위 : 455년 9월 ~ 475년 9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475년 9월

 

개로왕(蓋鹵王)은 근개루왕(近蓋婁王), 개도왕(蓋圖王)으로도 불린다.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칭호도 있다.

 

그와 후대 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하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주왕과 곤지가 그의 아들이라 하지만, 후에 사라진 백제신찬을 인용했다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의하면 문주왕과 곤지는 모두 그의 이복 동생이라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 양나라의 기록인 양서에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위례성 일대에서 전투 도중 고구려군의 첩자에 속아,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429년]

 

일본서기백제신찬의 기사를 인용하여 기사년(429)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해 양자가 차이를 보이는데, 단순히 일본서기기록의 오류로 보기도 하지만, 왕의 즉위가 다소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일본서기429년에 왜에서 백제의 왕녀를 구하자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여 왜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455년]

 

삼국사기455년에 즉위하였다고 했기록한다.

삼국사기는 비유왕이 죽은 지 한 달만인 455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였고 이때 신라의 눌지왕(訥智王)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고 적고 있다. 안정복(安鼎福)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이를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첫 사례임을 지적하였다.

 

[458년]

 

한편 중국의 송서(宋書)이만열전에는, 개로왕 4년인 4588월에 송()에 사신을 보내,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11인의 문무가 뛰어나고 충성스러우며 근면함을 말하면서 3품 관직의 제수를 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관직을 제수받은 11인 가운데 8인은 여()씨 즉 부여씨로 백제 왕족의 성씨를 지닌 자였으며, 이것은 개로왕이 추구했던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켜 후에 문주왕이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는 복선이 되기도 하였다.

 

[459년]

 

개로왕이 관직 수여를 청한 왕족 가운데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이 된 여곤(餘昆)은 곤지(琨支)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부여곤지는 개로왕 5년인 459년에 왕명으로 왜로 파견되는데(일본서기) 대체로 곤지가 어떤 이유로 축출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곤지는 개로왕에게 왕의 부인을 줄 것을 청했고 개로왕은 그 말을 들어주면서 부인이 지금 임신하여 산달이 가까웠으니 가는 길에 해산하거든 어디에서든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고, 이는 부여사마(무령왕)의 탄생 복선이 된다.

 

[469년] 개로왕 15년

 

이때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 등 고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472년] 개로왕 18년

 

관군장군(冠軍將軍)ㆍ부마도위(駙馬都尉)ㆍ불사후(弗斯侯)ㆍ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ㆍ대방태수(帶方太守)ㆍ사마(司馬)ㆍ장무(張茂)를 위()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 목적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위서(魏書)백제전 및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당시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백제가 보낸 국서는 유교적인 수사와 경전의 글귀를 여기저기에서 활용하고 있어 당시 백제의 유교 수용상황과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로 거론되며, 조선 초의 동문선(東文選)에도 백제상위주청벌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국서 속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를 두고 지금 연(, 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어 대신과 힘센 귀척들을 마구 죽이기를 서슴지 않으니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다, 고려(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거스르고 속이는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겉으로는 번국(藩國)인 척 말을 낮추고 있지만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남쪽으로 유씨(劉氏, <남조>)와 내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蠕蠕)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법(북위 <북조>)을 능멸하려 한다고 하여 당시 고구려의 내부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움을 전하고, 또한 경진년(440) 무렵(경진년은 비유왕 14년으로 이 해 겨울 10월에 백제가 송 (남조)에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백제 서쪽 국경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에서 시체 10여 구를 발견한 사실과 함께 그 시체가 갖추고 있던 의복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 등을 들어 위(북조)의 사신이 백제로 오던 길에 고려(고구려)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북위 (북조)()의 현조(顯祖)는 소안(邵安)을 사신으로 백제에 답변을 전달했지만 그 내용은 ‘1) 백제에 보냈던 사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긴 하지만 백제에서 사신의 것이라며 보내온 기물들은 조사 결과 중국의 것이 아니며, 2) 고구려는 이미 북위(북조, )에 조공을 보내고 국교를 맺은 지가 오래되었고 위에 드러날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으며, 3) 이번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군사를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을 들어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소안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백제로 가려 했지만 장수왕의 거절로 길이 막혀 백제로 가지 못했으며, 다시 바다를 통해 백제로 들어가려다 결국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에 대한 군사 지원 요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개로왕은 북위 (북조)()와의 국교를 아예 끊어버리고 말았다(삼국사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진언에 따라 왕성의 성곽과 궁실, 누각, 활 쏘는 사대(射臺)를 짓고 선왕의 능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국고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고, 이를 틈타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처음 공격해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文周)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漢城)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再曾桀婁)ㆍ고이만년(古尒萬年)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피살되었는데 두 사람에 대해 삼국사기는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난 우둔하고 밝지 못해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이렇게까지되었다. 백성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위기가 오더라도 누가 기꺼이 날 위해 싸우겠는가. 난 당연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만 넌 이곳에서 죽어도 무익하다. 어려움을 피해 국통을 이어라.”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
고구려가 백제를 함락하자 아들(혹은 동생) 문주왕에게 남긴 한탄의 말. 사실상 유언이나 다름없다.

 

일본서기유랴쿠 5년조는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아예 멸망당하였으며, 백제기고니키시(國王) 및 오오키사키(大后고니세시무(王子) 등이 모조리 적의 손에 죽었다(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라는 기록을 인용하고,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왕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뉘앙스로 서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실린 도미 부부 설화

 

백제 사람 도미는 호적에 편입(編戶)된 평민으로서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그의 아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절개가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이 도미를 불러 「부녀자의 덕(德)이라는 것이 지조 굳고 행실이 깨끗함을 우선으로 한다지만, 그윽하고 어두운, 사람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고, 도미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헤아릴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저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개루왕은 그의 아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신하를 시켜 왕의 옷을 입고 마부를 데리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한 다음, 도미의 부인에게는 따로 왕이 행차할 것이라고 알리게 했다. 왕을 가장한 신하는 그 부인에게 「나는 오랫동안 네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미와 내기하여 이겼으니 내일 너를 궁인(宮人)으로 들이기로 하였다. 이 다음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라며 동침하려 했는데, 부인은 「국왕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계집종을 꾸며 대신 방에 들여 보냈다. 그러나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도미에게 가짜 죄를 씌워,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홀로 작은 배에다 실어 강에 띄워 보낸 뒤, 다시 도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간음하려 했다. 부인은 「지금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왕의 시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향기롭게 목욕한 후에 오겠습니다.」라고 둘러댔고, 이번에도 왕은 그 말을 믿고 허락하고 말았다. 부인은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향해 통곡하다가 문득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서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부인은 남편 도미와 재회하였다. 다행히 도미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부부는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䔉山) 아래에 이르렀고, 고구려 사람들은 부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이후 부부는 그곳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개루왕이며 도미 부부의 일은 개루왕의 재위 시기로 비정되는 2세기의 일로서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도미 부부의 일은 개루왕이 아니라 개로왕(근개루왕) 때에 있었던 일로 여겨지고 있다. 1977삼국사기의 국역과 함께 주석을 달았던 이병도는 개루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군(樂浪郡)이 있어 백제에서 고구려로 곧장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도미 부부의 일은 실제로는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렸던 21대 개로왕 때의 설화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도미 부부 설화가 개루왕 대의 사건일 수 없는 근거로는 1) 백성을 호() 단위로 편재한 사실, 2) 백제의 왕을 대왕으로 칭할 정도로 왕권이 전제적이라는 점 등이 거론되는데, 개루왕때보다 훨씬 후대의,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진 시기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가족관계]

 

  • 부친 : 비유왕
  • 모친 : 미상
  • 자녀 : 문주왕ㆍ곤지(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근거)
    ☞ 일본서기에는 둘 다 개로왕의 형제들로 등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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