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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백제 22대 국왕] 문주왕(文周王, 475~477)

by [수호천사]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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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2대 국왕] 문주왕(文周王, 475~477)

 

  • 재위 : 475년 9월 ~ 477년 4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477년 4월

 

문주왕(文周王)은 문주(汶洲), 문원왕(文園王), 문연왕(文淵王) 또는 문연왕(汶淵王)이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유랴쿠기(雄略紀)에는 개로왕의 모제(母弟, 동생)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과, 양서(梁書)에서는 모도(牟都)로 기록되어있고, 송서(宋書) 백제전에는 여도(餘都)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의 유라쿠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라 한다. 오오치씨와 토요타씨 족보에는 문주왕의 별칭인 문원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나타난다. 중국측 기록인 양서백제전에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의 어머니와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문주왕의 성격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의 태자가 되었으며, 즉위하기 직전에는 부왕 개로왕으로부터 상좌평에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475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한성을 공격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었다. 일설에는 개로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문주왕을 피신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개로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5년 음력 10,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476년]

 

2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아직 고구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한강 이북 백성들을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3월에 바다 건너 유송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방해로 못 가고 되돌아왔다.

여름 4,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탐라국 사신을 보답으로 은솔(恩率)로 임명하였다. 탐라왕에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좌평(佐平)으로 임명하였다.

 

[477년]

 

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는데, 같은 달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해구의 쿠데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뒤는 왕족들의 추대를 받은 아들 삼근왕이 계승하였다.


[야망있던 동생 곤지, 인망있던 형 문주]

 

개로왕 시기 때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개로왕이 유송에 사신을 보냈을 때 보국장군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상좌평을 역임했었다. 다만 지위나 조정에서의 능력적 평가로는 동생 곤지한테 다소 밀렸었고 이러한 평가는 다름아닌 개로왕이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성품이 부드러웠지만 우유부단했다고 하는데 백제 역사상 최대의 국난을 수습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은 왕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은 성품이었지만 너무 유능한데다 야심도 어느 정도 있는 곤지가 영향력을 키우며 도성 내 귀족들과 간혹 마찰을 빚다가 개로왕한테 찍혀서 일본으로 보내진 것과는 달리 형 개로왕에게는 바로 그 이유로 더욱 의지가 되는 동생이었던 것 같다.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능력이나 야심은 곤지에 비하면 딸렸지만 인망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유의 국난 상황에서 나머지 세력을 추스르는데는 오히려 곤지보다 적격인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부여씨 왕권의 실추]

 

3세기 중반경 당당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한 백제는 약250여 년 동안 수도였던 한성을 잃으면서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부여씨의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고 귀족 세력이 강성해졌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를 휘둘렀던 해씨, 진씨 세력이 강성해져 웅진 시기에는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해씨나 진씨 가문 출신의 권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웅진 인근의 현지 지방 세력(구 마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씨, 연씨 등의 권력이 증대되면서 기존의 해씨, 진씨와 함께 대성팔족이라는 최고 귀족층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문주왕이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기는 했지만 475년 큰 패전으로 인해 도망온 부여씨 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추락하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까지 겹쳐서 웅진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 일본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된 것을 보면 전왕 개로왕처럼 부여씨 왕실 인사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둘 다 해구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이 경우는 준비되지 않은 강제적으로 쫓긴 상황이었으므로 웅진 지역에서 기반을 갖추기 급급했다. 결국 재위 3년째 되는 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다가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 장관, 국왕의 최측근.) 해구의 사주를 받은 도적에게 시해당했다. 반란이 성공하자 해구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한 후에도 권세를 휘둘렀다가 몰래 세력을 키우던 동성왕파의 세력이 커지자 권력 다툼을 일으켰으나 진로에 의해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삼근왕 또한 반란을 진압한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삼근왕의 죽음에 동성왕이 개입했다는 설이 있다.


[가족관계]

 

  • 부친 : 개로왕 / 비유왕(일본측 기록)
  • 형제 : 곤지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개로왕도 형제라고 되어 있음)
  • 아들 : 삼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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