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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백제 24대 국왕] 동성왕(東城王, 479~501)

by [수호천사]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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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4대 국왕] 동성왕(東城王, 479~501)

 

  • 재위 : 479년 ~ 501년 음력 11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501년 11월(음력)

 

동성왕(東城王)은 백제의 제24대 왕으로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모대(牟大)이다. 또 다른 이름은 마모(摩牟)ㆍ마제(麻帝)ㆍ말다(末多)ㆍ여대(餘大)등이 있다. 22대 왕인 문주왕의 아우인 좌평 곤지의 둘째 아들로서 담력이 있고 활을 쏘는 솜씨가 뛰어났다.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정권을 잡은 진씨(眞氏)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삼근왕의 뒤를 이었다.

 

동성왕의 본명은 모대 또는 여대, 마모이고, 일본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말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은 전지왕의 손자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 한다. 모후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479년부터 482년까지 진로(眞老)가 실권을 맡았고 482년부터 501년 죽을 때까지 친정하였다.


[479년]

 

일본에서 체류하다 사촌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즉위하였다.

 

[481년]

 

동성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481(동성왕 3)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다.

 

[484년] 동성왕 6년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였다.

 

[485년] 동성왕 7년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488년] 동성왕 10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하였다.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58<동남이열전> -백제-

 

이에 근거해 유목민족인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경영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489년]

 

남도 바닷가의 농부가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근초고왕 대의 경략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인정하는 불완전한 지배에 머물렀던 현재 호남권 지역의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 때 완벽히 끝나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적 통치로 전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93년] 동성왕 15년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494~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499년]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동성왕 21)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500년] 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501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501(동성왕 23) 겨울 음력 11,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쿠데타를 일으켜 병사들에게 시해당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동성왕의 승하 기사가 동성왕 2311월 조에 있지만 본문에 12월에 이르러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백가가 보낸 자객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바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중태에 빠진 뒤 얼마간 있다가 완전히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백제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폭정을 펼치니,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백제의 국인이 함께 그를 제거하였다. 무령왕을 옹립하니 휘는 사마왕인데,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 말다왕(동성왕)은 이모형(이복형)이다.(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 昆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라고 기록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능의 위치는 미상이다.


[무령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저서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고 동성왕의 동생이라고 한다. 한편 그의 딸 보과부인(寶菓夫人)은 신라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고 남모의 외조부가 된다.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이 오기였음이 확실시되었다.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로 권신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중국 측 사서를 신뢰하여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나이가 적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왜 동성왕이 먼저 임금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자연스레 해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가족관계]

 

  • 아버지 : 곤지(昆支) 혹은 문주왕
  • 이복형 : 무령왕 사마(武寧王 斯麻)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령왕이 아들이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배다른 형이다. 일단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아들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 왕비 : 신라 이찬 비지의 딸
  • 후손 : 무왕(武王, 580~641, 재위 : 600~641)
  • 후손 : 의자왕(義慈王, 599~660, 재위 : 641~ 660) - 무왕의 아들
  • 후손 : 풍왕 부여풍(豊王 扶餘豊, 623~663, 재위 : 660~663) - 의자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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