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말’, ‘머리’
‘말’은 ‘마력(馬力)’이라는 힘의 단위를 만들어낼 만큼 강하고 튼튼한 동물이다. 말은 우리 조상들의 옛이야기 속에서 흔히 상서로운 일, 특히 제왕(帝王)의 탄생을 알리는 전령사(傳令使)역할로 나오곤 한다. 『삼국유사』에서 북부여의 왕 금와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탄생을 이끌어내는 신성한 존재로 말이 등장한다.
‘말’(馬)은 중세국어에서 ‘ᄆᆞᆯ’이었다.
중국 북송시대 사람 손목이 『계림유사』에서 “馬曰末”(마왈말 : ‘馬’는 ‘末’이라 한다)이라 적어놓은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고대국어는 한 음절에 받침이 있는 경우 대부분 그 뒤에 모음을 붙여 두 음절로 발음하는 개음절어 체계여서 지금과 달랐다. 그런 만큼 고려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말’은 ‘ᄆᆞᆯ’이 아니라 ‘ᄆᆞᄅᆞ’ 정도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단어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쓰였다는 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윷놀이의 ‘도ㆍ개ㆍ걸ㆍ윷ㆍ모’라는 이름은 우리 고대국가인 부여(夫餘)의 벼슬 이름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부여의 관작이었던 저가(猪加), 구가(狗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동물과 연결되어 있는데 ‘도’는 돝(돼지ㆍ猪), ‘개’는 개[狗], ‘윷’은 소[牛], ‘모’는 말[馬]을 말한다. ‘걸’은 노새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고, ‘모’와 같이 말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두 가지 의견과는 다르게 ‘걸’이 ‘크다(大)’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조선상고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13년, 57~58쪽). 반면 국어학자 조항범 교수는 윷놀이의 사위 이름을 개나 소 등의 짐승과 연관지을 근거가 거의 없다면서 “놀이 이름이 가장 높은 등급 ‘모’를 쓴 ‘모놀이’가 아니라 왜 ‘윷놀이’인지도 궁금하다”고 상당히 의미있는 질문을 던졌다(『다시 쓴 우리말 어원 이야기』, 조항범, 한국문원, 1997년, 236~238쪽).]
어쨌든 여기서 ‘모’는 ‘ᄆᆞ라’ 또는 ‘ᄆᆞᆯ’에서 ‘ᄅᆞ’ 또는 ‘ㄹ’이 떨어져 나간 형태이며, 말[馬]을 뜻한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로 보인다. 다섯 가지 동물 중 가장 크고 빠르기에 ‘도ㆍ개ㆍ걸ㆍ윷ㆍ모’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중세 국어를 보면 ‘ᄆᆞᆯ’은 ‘말[馬]’ 말고도 ‘ᄆᆞᄅᆞ’, 즉 ‘마루[宗]’라는 뜻도 갖고 있다. ‘마루’는 지금도 (건물의) ‘마루’, ‘용마루’나 ‘산마루’ 같은 단어에 쓰이는 것처럼 ‘높은 곳’이나 ‘꼭대기’를 뜻한다. 이와 같은 계통의 단어로 ‘ᄆᆞᆺ’도 있는데, 이는 ‘가장, 최고’라는 뜻으로 썼다. 오늘날 ‘맏아들’과 같은 단어에 쓰는 ‘맏~’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들 단어의 바탕은 ‘머리[頭]’, 즉 ‘으뜸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연결된다.
결국 ‘말’은 꼭대기나 머리를 나타낼 만큼 높고 신성한 존재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이 동물의 크고 당당한 모습에 압도되어 이런 뜻을 가진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말~’이라는 접두사가 들어간 단어는 ‘크다’는 뜻을 같는다. 말벌, 말잠자리 등이 그 예다. 신라시대 초기에 왕(王)을 뜻했던 말인 ‘마립간’(麻立干)이나 고구려 최고위 관직인 ‘막리지’(莫離支)의 ‘마립’이나 ‘막리’도 그 발음이 어땠을지는 분명치 않지만 뜻은 이 ‘말’과 같은 범주다.
『역사와 어원으로 찾아가는 우리 땅 이야기』, 최재용, 21세기북스, 2015년, 25~29쪽.
'[기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누라’의 어원에 대하여 (0) | 2024.08.04 |
---|---|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마이산(馬耳山)에 얽힌 이야기 (0) | 2024.08.04 |
‘마리산’인가, ‘마니산’인가? (0) | 2024.08.04 |
1년 열두 달의 영어 명칭과 의미 (0) | 2024.07.22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단테의 『신곡』 (0) | 2024.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