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산’인가, ‘마니산’인가?
‘ᄆᆞᆯ’, 즉 ‘마루’는 ‘마리’나 ‘머리’라는 단어들과 거의 같은 뜻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뜻이 갈라져 지금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머리’와 ‘마리’는 16세기까지도 우리말에서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다. ‘마리’가 ‘머리’보다는 오래된 형태로 추정되는데, 둘이 같은 단어로 쓰이다가 모음이 다른 것 때문에 뜻도 달라진 것이다. ‘맛’과 ‘멋’, ‘살’(나이)과 ‘설’(설날) 등의 단어가 같은 뜻이었다가 ‘ㅏ’와 ‘ㅓ’의 차이 때문에 뜻이 갈라진 것과 똑같다. 그래서 오늘날 ‘마리’는 사람의 머리라는 뜻은 없고, ‘개 한 마리’ 할 때처럼 짐승의 머리 숫자를 세는 단위로만 쓰이고 있다. 하지만 ‘실마리’ 같은 단어에 아직도 그 원뜻이 남아 있다.
마니산(摩尼山)은 『고려사 지리지』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마리산’(摩利山)이라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뒤의 자료인 『여지도서』나 『대동여지도』 등에는 ‘마니산’(摩尼山)이라 표시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마리산’과 ‘마니산’ 중 어떤 이름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원래의 우리말 이름은 위에서 밝힌 자료들의 연대만 따져보아도 당연히 ‘마리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마리’와 ‘머리’는 같은 말로 쓰였으니 그 뜻은 결국 ‘머리산’이다. 이 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악산’(頭岳山), 즉 머리산이라 불렀다는 사실도 이 결론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마니산’은 당연히 ‘마리산’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강화도 주민들과 한글학회 등이 중심이 된 ‘마리산 이름 되찾기추진위원회’가 이미 20년이넘도록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니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다. 이처럼 한번 굳어진 땅 이름은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잘못된 이름일지라도 사람들이 그를 계속 쓰면 입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달되며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마리산은 그 높이(469미터)로만 따져서는 사실 그다지 높은 산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민족 시조 단군왕검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성스러운 산이기에 머리산, 즉 ‘크고 높은 꼭대기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마리산’이 ‘마니산’으로 바뀐 것은 단지 ‘리’와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빌려 쓰다 보니 ‘尼’를 써서 생긴 일일 수도 있고,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불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니’(mani)는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여의주’(如意珠)를 뜻한다고 한다. 여의주는 용왕의 머리에서 나온 구슬[珠]인데, 나쁜 일들을 없애고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如意] 풀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물건이다. 이 말을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쓰는 한자의 소리를 빌려 ‘摩尼’ 또는 ‘末尼’라고 적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단어 ‘摩尼’가 우리나라에도 들어왔고, 마침 그 발음이 ‘마리’와 비슷하다 보니 ‘마리산’이라는 이름 대신에 뜻이 무척 좋은 단어를 갖다 붙여 ‘摩尼山’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마니산’이 불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보는 큰 이유는 우리나라 곳곳에 ‘관음산’, ‘도솔산’, ‘미륵산’, ‘문수산’, ‘불암산’처럼 불교와 관련된 땅 이름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시대 이후 불교가 융성하면서 이 땅을 부처님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생각한 ‘불국토지리관’(佛國土地理觀)이 퍼지며 생긴 일이다. 이에 따라 당초 ‘마리산’이었던 것이 ‘마니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와 어원으로 찾아가는 우리 땅 이야기』, 최재용, 21세기북스, 2015년, 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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