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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숙 [申公淑, 1884~1967]
감리교 목사, 교육가
【1884년】
- 10월 5일, 경기도 개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889년】
- 6세 때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양육되었다.
【1895년】
-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후, 12세 때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1901년】
- 18세 때에는 혼자의 힘으로 점포를 낼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1902년】
- 19세 때 남감리회 매서인으로 개성에 왔던 이화춘(李和春) 전도사의 설교와 권고를 듣고 기독교인이되었으며 개성남부교회에 출석하면서 개화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 그는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치리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청년교인 몇 명과 교회를 탈퇴, 독립교회를 세울 결심을 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겨 개성 도강굴에 배의(培義)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그 학교 학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 졸업후 그는 이 학교 교사가 되어 산수와 영어를 가르쳤으니 그는 설립자ㆍ학생ㆍ교사의 3역을 모두 거친 셈이다.
【1907년】
- 선교사의 거부로 일본인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 그는 배의학교 안에 독립교회로 도강굴교회를 설립, 선교부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독자적인 교회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비협조적 태도와 경험부족으로 학교와 교회 운영이 어렵게 되어 마침내 도강굴교회를 자진 해산하고 다시 개성남부교회로 복귀했다.
- 한편 배의학교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후에 중등과를 설치하여 후의 송도중학교의 모체로 발전하였다.
【1910년】
- 남감리회로 복귀한 그는 북간도로 건너가 자신의 꿈을 펴보려 했으나 가던 도중 금천경찰서에서 검거되어 그의 배일사상 때문에 북간도행이 좌절되었다.
- 이때 개성 한영서원을 경영하던 남감리회 선교사 왓슨(A. W. Wasson, 王永德)으로부터 돌아오라는 서신을 받고 개성으로 돌아와 매서인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1911년】
- 1년 동안 매서일을 본 그는 1911년 9월 남감리회 조선매년회로부터 정식 전도사로 임명받아 이때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 그가 처음 담당한 구역은 장단교회 외 3개 교회였다.
【1912년】
- 풍덕교회로 옮겼다.
【1913년】
- 서울 광희문교회로 옮겼고 이곳에서 3년간 시무하였다.
【1914년】
-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 다시 장단교회로 파송받아 1년 남짓 시무한 후 개성북부교회로 전임하였다.
-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3회).
- 10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 목사안수를 받은 첫 부임지는 경기도 이천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시무하면서 40여명의 신도를 400여명으로 늘렸으며 새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모금이 독립군자금 모금으로 오인받아 일경에 체포, 수난을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 개성북부교회로 전임했다.
- 신공숙 목사와 에드워즈 양(Miss Edwards) 등이 인도한 집회들은 개성지방 내 교회들의 영적 성숙에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해 웜스 감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해 사업의 현저한 양상 중의 하나는 성서연구에 대한 큰 관심이었다. 부흥회와 함께 진행된 25회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약 7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업에서 지방순행 목사인 신공숙은 훌륭한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일의 절반은 특별히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에드워즈 양에 의해서 인도되었다.”(Minutes of the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18, p.54)
【1920년】
- 당시 개성지방 감리사 크램의 요청으로 1920년에는 남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강연회 강사로 함경도ㆍ강원도 지방을 순회하여 전도강연을 실시하였다.
【1924년】
- 송도중학교 교장 윤치오의 요청으로 송도중학교 교목으로 시무하였다.
【1925년】
- 개성북지방 장로사로 선임되어 개성지방의 교회를 관장하였다.
【1926년】
- 신공숙 목사는 남ㆍ북감리교회의 통합에 있어서도 관여하였는데, 1926년 9월에 회집되었던 남감리교회 조선매년회에서, 조선에 있는 남ㆍ북감리교회가 통합할 방침을 연구키로 하고 위원을 각각 5명씩 택하였다. 그것이 남ㆍ북감리교회 통합의 공식적 출발이 된 것이었다. 이때 신공숙도 그 대표로 참여하게 되는데, 미감리회 조선연회 대표로는 노블, 윌리엄즈, 김찬흥, 김종우, 오기선이 선출되었고, 남감리교회 조선연회 대표로는 저다인, 갬블, 정춘수, 신공숙, 양주삼이 선출되었다. 이 위원들로 구성된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는 1927년 각 조선연회에서 선출된 연합위원들을 통해 전권위원회가 성립하고 결국 통합감리교회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 신공숙 목사도 동참하고 조력하였다.
【1927년】
- 10월, 일본 토오쿄오한인교회 9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 이곳에서 그는 3년간 일본에 있는 교포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였다.
【1930년】
- 귀국하여 수표교회에 부임하였다. (수표교회에서는 1931년 3월부터 1932년 2월까지 시무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1931년】
- 9월 19일, 제8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34년】
- 종교교회에 부임하여 12년 동안 봉직하였다.
- 이 기간 동안 YMCA의 신흥우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적극신앙단운동에 대해 양주삼ㆍ윤치호와 함께 공개적인 반대자로 나서 투쟁하였다.
【1942년】
- 적극신앙단 반대로 인해서 1942년 경기도 의정부교회로 좌천(?)되고 말았다. (의정부교회에서는 1941년 5월 31일에 제13대 교역자로 신공숙 목사가 부임하였다고 소개한다)
- 그는 의정부교회에서 8ㆍ25 해방과 6ㆍ25 한국전쟁을 맞았다.
【1945년】
- 11월 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재판부장을 맡기도 하면서 감리교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6년】
- 6월 13일, 중앙교회에서 동부연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 경기도 의정부교회 제15대 교역자로 재부임하였다. (제14대 교역자는 전진규 목사로 1946년 5월에 부임한 것으로 소개된다)
【1950년】
- 한국전쟁으로 피난중 경남 가덕도에 감리교 교역자 및 교인 수용소 안에 교회를 설립하여 담임하였다.
【1952년】
- 은퇴하였다.
【1953년】
- 4월, 목동교회(1919년 설립)에 3대 담임자로 부임하였고 이상복 장로가 조력하였다.
【1955년】
- 12월, 화곡교회(현 강서제일교회) 1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59년】
- 은퇴 후에도 김포군 목동교회에서 1959년까지 봉직하였다.
【1967년】
- 말년에 건강과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다가 1967년 7월 2일 별세하였다.
-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자, 조정혜와 5남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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