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사전]/[사]

송흥국 [宋興國, 1902~1995] 감리교 목사, 해병대 초대 군목실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by [수호천사] 2024. 8. 7.
728x90

송흥국 [宋興國, 1902~1995]

감리교 목사, 해병대 초대 군목실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02년】

  • 1월 7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1924년】

  •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평양 남산현교회 부담임으로 시무하였다.

 

【1928년】

  •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

  • 이화여전 강사를 역임하였다.

 

【1933년】

  • 미국 버클리 퍼시픽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

  • 평북 회천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9년】

  • 5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 총리원 교육국 간사를 역임하였다.

 

【1941년】

  • 삼청동교회를 제18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 그가 삼청동교회로 부임했을 당시는 목사 없이 일제에 의해 계속적으로 탄압받던 시대였다. 교회는 당국의 지시에 그대로 순응하며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국기배례를 비롯한 일본식 의식을 실시하였고 시국 관련 모임도 종종 열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1년 3월에 열린 중부연회에서 송흥국 목사가 삼청교회에 파송된 것이었다.
  • 송흥국 목사가 삼청교회로 파송된 1941년 3월 연회는 사실 한국 감리교회 전통이 막을 내리는 “장례식”과도 같은 회의였다. 이 모임에서 감리교 전통인 연회(年會)를 해산하고 일본식으로 교구(敎區)를 조직하였는데, 연회뿐 아니라 총회 명칭도 “기독교조선감리회”를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라고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감리교회 법인 〈교리와 장정〉도 폐지하고 〈교단 규칙〉을 새로 만들어 공포하였는데, 이에 따라 총리원을 “교단본부”(敎團本部), 감독을 “통리자”(統理者), 목사를 “교사”(敎師), 권사를 “권도사”(勸道師)로 바꿔 불렀고 입교인, 세례아동, 원입인 같은 교인 명칭도 “정회원”(正會員), “연소회원”(年少會員), “객원”(客員), “구도회원”(求道會員)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교회 임원을 “역원”(役員)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를 “일요학교”(日曜學校), 여선교회를 “부인회”(婦人會), 엡윗청년회를 “공려회”(共勵會)로 “혁신”하면서 이 단체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민족주의 색채를 완전 제거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이런 식으로 “창씨개명” 당하고 만 것이다.
  • 이 같은 혁신교단의 노골적인 친일행각에 불만을 품은 교인들이 적지 않았다. 혁신교단은 이들 반대세력에 회유와 협박을 가했는데 그럼에도 반(反)혁신교단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파면”(罷免), “퇴직”(退職), “면직”(免職), “휴직”(休職), “대명”(待命) 등의 명분을 내세워 교회 밖으로 추방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와 경찰 당국의 지휘를 받고 있던 혁신교단에 반대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파면과 투옥의 위험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송흥국 목사는 류형기, 정일형, 구성서, 전효배, 마경일, 이규갑, 김광우, 김종만, 이윤영, 노진박 목사 등과 함께 반(反) 혁신교단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미 1941년 3월 연회부터 정춘수 감독 반대운동을 펼쳤는데 혁신교단의 견제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1942년】

  • 혁신교단 본부는 1942년 3월 대대적인 목회자 이동을 실시하면서 혁신교단 반대인사들을 정리하였는데 이때 송흥국 목사도 그 “대명”(待命)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대명”은 말 그대로 “다음 임명을 기다리라”는 뜻이지만 “대명” 처분은 혁신교단 반대자들을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1943년】

  •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송흥국 목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 혁신교단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를 비롯한 반 혁신교단 인사들은 1943년 10월 총회에서 정춘수 감독 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양주삼 목사를 감독으로 세워 난국을 타개해 나가기로 하였다.
  • 류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정춘수 감독 반대, 양주삼 감독 추대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예외 없이 체포되었다. 삼청교회에 부임하기 직전 교육국 간사로 류형기 목사의 지휘를 받았던 송흥국 목사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체포를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구성서 목사와 함께 자기 고향인 황해도지방을 돌면서 반 혁신교단 선전을 하다가 역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송흥국 목사는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3개월 더 옥고를 치르고 1943년 6월 석방되었다.

 

【1948년】

  • 그는 해방 후 감리교회의 극심한 분열과정 속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감리교회의 통합운동을 전개했던 감리교 통일전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0년】

  • 해군본부 정훈감으로 재직하였다.

 

【1951년】

  • 5월 27일, 해병대 사령부 초대 군목실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총무로 재직하였다. 기독교교육협회 총무 재직 시절 종전 후 기독교교육사업의 비전과 사업들을 제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펴 나갔다.
  • 10월 15일, 제6회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 회계를 맡았다.

 

【1959년】

  • 정릉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64년】

  • 한국기독교근로전도회회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 감리교신학대학 전임 강사 겸 사감으로 봉직하였다.

 

【1970년】

  • 동부연회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 은퇴하고 용두동교회 소속목사로 지냈다.

 

【1995년】

  • 필라델피아에서 별세하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