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사전]/[사]

스코트 [William A. Scott, 1886~1979] 서고도(徐高道), 캐나다장로회ㆍ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by [수호천사] 2024. 8. 9.
728x90

스코트 [William A. Scott, 1886~1979]

서고도(徐高道), 캐나다장로회ㆍ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1886년】

  • 11월 8일,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 알렉산더 맥밀란(Dr. Alexander MacMillan)이 캐나다장로회 목회 공부를 시키기 위해 선발한 스코틀랜드 청년 중 한 사람으로 캐나다에 왔다.
  • 매니토바(Manitoba)주 선교현장에서 일하면서 브랜돈대학(Brandon College)에서 입학과정을 마쳤다.

 

【1911년】

  • 퀸즈대학교(Queen’s University)에 들어가 영문학과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3년】

  • Kathie Edithdhk와 결혼하였다.

 

【1914년】

  • 밴쿠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신학훈련을 받고 졸업하였다.
  • 그 무렵 대만에서 선교하다가 휴가로 귀국하여 밴쿠버노회에서 연설하기 위해서 온 던컨 맥레오드(Duncan Macleod) 의사를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부인과 상의하여 인도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인도는 캐나다장로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선교사로 가도록 제안받았다.
  • 같은 해 캐나다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되어 1914년 12월 3일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1915년】

  • 부산을 거쳐 목적지인 함북 성진선교부에 도착해서 1915년 7월 원산에서 열린 제17회 연례회의에서 성진선교부에 배정되어 어학 공부를 하면서 단천남학교를 맡았고 목회사역을 보조했으며, 부인도 어학공부를 하면서 여성사역을 보조했다.

 

【1916~1917년】

  • 지역 교회에서 목회하며 지역 남학교와 사경회를 맡았고, 로스(Ross)가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오기까지 의원ㆍ단천ㆍ갑산ㆍ삼수ㆍ서간도 지역 사역과 남학교를 겸하여 맡았다. 부인도 여학교 교장을 맡고, 그 지역 여학교들을 관리하며 지역 교회 사역과 순회전도, 사경회 등을 도왔다.

 

【1917년】

  • 6월, 원산에서 열린 제19회 연례회의에서 간도 용정선교부에 배정되어 지역 교회 목회를 하면서 남동부 구역을 맡고 선교부 총무도 맡았다. 부인은 두 명의 전도부인과 지역 여학교와 지역 여성사역을 맡았다.

 

【1918년】

  • 교회협의회(FCC) 결성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였다.

 

【1919년】

  •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중국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생기자 제창병원 원장 마틴(Stanley Haviland Martin)을 도와 이들을 구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 특히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젊은 한국 청년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조사에 착수하여 1919년 4월 초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실패(The Failure of Japanese Imperialism in Korea)”라는 제목의 논문을 1919년 4월 10일자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llan Egbert Armstrong)에게 보낸 편지에 첨부하여 보냈다. 이 편지에서 “일본은 동방의 야만족을 자처하고 있으며, 어떠한 재활도 이루어질 수 없도록 괴롭히는 싸움 대장입니다. 한국인들은 심각하게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고 선교 활동과는 관계없이 출판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시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출판하게 되면 ‘김서방’으로 해주시거나 익명으로 해주십시오. 만일 출판이 어려우시면 최소한 한국인의 처참한 상황을 캐나다에 알릴 수 있도록 어떤 방법으로든 노력해 주십시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시고, 우리 종교가 어두운 구석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어야 할 권리를 거부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한국 상황을 널리 알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편지와 논문은 익명으로 1919년 7월 미국기독교연합회(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동양관계위원회(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에서 발간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거의 전문이 실렸다.

 

【1920년】

  • 6월, 안식년 휴가로 귀국하였다.

 

【1921년】

  • 복귀하여 7월 원산에서 열린 제23회 연례회의에서 용정 은진중학교 교장을 맡게 되었고, 용정과 도성포교회 목회와 사경회도 겸하여 맡게 되었다.

 

【1925년】

  • 제1회 캐나다연합교회와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서 함남 함흥선교부로 전임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그 지역 전도사업과 함흥남성경학원을 돕고 함흥선교부 회계도 겸하였다. 부인도 그 지역 교육 사업을 도왔다.
  • 11월 21일,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영생중학교 신축교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26년】

  • 11월 14일, 신창리예배당에서 개최된 ‘토마스 목사의 순교 60주년과 대영성서공회 설립 30주년과 민휴씨 성서공회에 봉사 25주년 기념식’에 참여하여 축도하였다.

 

【1928년】

  • 10월, 함북기독교청년회 관북 수재구제부를 조직할 때 부회계에 선임되었다.
  • 11월 19일부터 12월 15일까지 김관식 목사를 원장으로 함흥남자성경학원을 개원하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 5월 30일, 함흥기독교청년회와 신창리교회ㆍ중하리교회가 합동으로 영생여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안식년 휴가 전별회(餞別會)에 참여하였다.

 

【1930년】

  • 안식년 휴가에서 귀환하였다.

 

【1931년】

  • 3월, 자신이 설립자로 있던 함흥 영생중학교를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영생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켰다.
  • 9월 19일, 제8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를 맡았다.
  • 10월 3일, 자신이 당회장을 맡고 있던 함흥 운흥리교회를 신축하고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1933년】

  •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함흥의 영생보통학교와 원산의 진성여자보통학교에도 1933년 9월 ‘만주사변 2주년 순난자 위령제’에 참여하라는 공문이 왔다. 그러나 일단 거기에서 치러지는 신도의식이 종교적 행사이기 때문에 참여하기 어렵고,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태도를 밝히겠다고 불가참 사유서를 제출했다.

 

【1934년】

  • 1월 3일부터 한 달 동안 함흥 신창리에서 함흥 남자성경학원을 열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 ‘만주사변 3주년 순난자 위령제’에 참여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타협을 하여 “기독교 학교는 국민적 행사에 참가하고, 우리 학생들과 선생들이 물러간 후에 신도의 신직들이 그들의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1935년】

  • 총독부로부터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1936년】

  • 3월 7일, 영생고등보통학교 졸업식과 동시에 학부형회에서 수여하는 10주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 안식년 휴가로 귀국하였다.

 

【1938년】

  • 중일전쟁 이후 강화된 황민화정책으로 신사참배를 하게 되었다.
  • 스코트는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학교 교육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학교 교육을 중단하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같은 선교부 원로 선교사 맥레(D. M. MacRae)의 견해와 충돌하였다.
  • 4월 23일, 안식년에서 귀국하여 함흥으로 복귀하였다.

 

【1939년】

  • 12월의 보고서에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기독교인임을 증거할 여지가 있음을 발견한다. 예배와 성경공부가 전과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인 교사들은 아직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학생회의 종교부는 기독교적 예배의 기회가 있다. 선교사의 존재는 끊임없이 기독교회의 보다 큰 연대기구를 생각나게 한다. 어떤 이들은 선교계에 분열이 있음을 유감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 가운데서, (학교를) 폐쇄하고 증거하는 것이나 봉사를 계속하며 증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축복해주셔셔, 이 두 정책을 다 그의 영광을 위해서 써주실 것을 믿고 기도한다.”

 

【1940년】

  • 11월, 영국영사관의 선교사 철수 권고와 선교부의 방침을 받았다.

 

【1941년】

  • “한국 국민들을 격려하고, 선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면서, 선교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서 선교 문제들에 관한 연락 임무를 맡기 위해” 1941년 3월 모든 선교사를 철수시키고 그와 프레이저(Edward James Oxley Fraser), 함흥 제혜병원 의사와 간호사였던 머레이(Florence Jessie Murray), 번즈(Beulah Vernon Bourns) 4명만 남게 되었다.
  • 그러나 이들도 12월 8일,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가택 연금이 되었다.

 

【1942년】

  • 6월1일, 부산항을 통하여 연합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교환 형식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1943년】

  • 캐나다로 돌아가 1943년 밴쿠버의 유니온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브랜트포드노회(Branford Presbytery)에서 목회하였다.

 

【1946년】

  • 다른 캐나다 선교사들과 함께 모국 교회에서 정성껏 기부한 구제헌금과 보급품들을 가지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 어려움에 처해 있던 월남한 피난민들을 도와주었다.
  • 그리고 이 해부터 서울에서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전신) 구약신학ㆍ교회사 교수와 조선성서공회(대한성서공회 전신)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7년】

  • 4월, 51명의 신학생이 장로회 제33회 총회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촉발된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 문제에 관한 논쟁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신학 교육의 더 큰 자유를 제공하는 조선신학교와 같은 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려는 총회에 참석하여 이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1952년】

  • 10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37회 총회에서 “① 조선신학교 졸업생은 장로회목사 후보생으로 받을 수 없다. ② 김재준 교수를 목사의 명부에서 제명하고 그가 소속한 경기노회로 이 사실을 공포케 함. ③ 조선신학교 교수진에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 박사를 그가 소속한 노회로 하여금 조사케 하다. ④ 각 노회로 하여금 위의 두 교수와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친 사람을 선전, 혹은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회원을 조사 징벌케 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1950년】

  • 한국전쟁 중에는 아다 샌델(Ada Sandell)과 협력하여 거제도에 있던 응급병원을 관리했고, 류권찬 목사의 도움으로 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피난민촌에 들어가 복음전도와 구제사업을 돕기도 했다.

 

【1953년】

  • 제3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측이 분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전신)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캐나다연합교회가 조선신학교 측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연합교회의 대표단에게 조사를 해야 한다면 꼭 공정한 조사를 진행하여 캐나다연합교회가 한국에 있는 교회와 계속적인 협력을 할 때에는 대한기독교장로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5년】

  • 대한기독교장로회와 캐나다연합교회가 1955년 5월 선교협약을 맺게 하였다. 이때 그는 캐나다연합교회 한국선교회 회장으로서 “캐나다연합교회 총회 실행위원회와 선교부의 결의에 의하여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성명, 직위, 주재 주소”(자신을 포함한 19명)를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에 통보하였다.

 

【1956년】

  • 6월 8일, 은퇴하고 귀국하여 브랜트포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1969년】

  • 8월, 부인이 별세하였다.

 

【1975년】

  • Canadians in Korea : Brief Historical Sketch of Canadian Mission Work in Korea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선교부의 한국선교 역사를 정리하여 남겼다.

 

【1979년】

  • 7월 14일, 브랜드포드에서 93세로 별세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