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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사]

스톡스 [Marion Boyd Stokes, 1882~1968] 도마련(都瑪蓮), 미국남감리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문서운동가, 성경번역자

by [수호천사]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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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스 [Marion Boyd Stokes, 1882~1968]

도마련(都瑪蓮), 미국남감리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문서운동가, 성경번역자 / 11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회계(1934)

 

【1882년】

  • 12월 12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에서 목사이자 크리스천 문학가였던 존 스톡스(John L. Stokes)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03년】

  • 위퍼드대학교(Wofford College)를 졸업하고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1903~1905).
  • 폴린 데이비스(Pauline Davis, 1876.5.5.~1953.5.1.)와 결혼하였다. 부인 폴린은 찰스 데이비스(Charles McQueen Davis, 1848~1936)와 메리 바이넘(Mary Thomas Bynum, 1845~1923)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쉬빌에서 2년간 목회하면서 1905년 4월 29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 11월에 웨스턴노스캐롤라이나연회에 입회하여 애쉬빌 지방에서 목회하였다.

 

【1906년】

  • 장로 안수를 받았다.

 

【1907년】

  • 웨스턴 노스캐롤라이나연회에 입회하였다.
  • 9월, 미국 남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아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1909년】

  • 개성동구역과 이천구역에서 전도하는 가운데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의 발단자 역할을 했다.
    백만명구령운동은 1909년 7월 개성지역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개최한 기도회가 도화선이 되었다. 1주일 동안 진행되는 기도회 속에서 4일째 되던 목요일 저녁 그를 비롯한 갬블(F. K. Gamble)과 리드(W. T. Reid) 등 세 선교사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한국인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두 구역으로 돌아와 5만명의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인들에게 기도를 당부하였고, 이것이 1909년 9월에 개최된 남감리회 선교연회에서 남감리회 전체 지방이 참여하여 20만 명을 구원하자는 결의로 발전하였다. 1909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서도 알려져 장로회와 감리회 6개 선교회가 모두 참여한 가운데 1년 안에 일백만 명을 구원하자는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전도운동을 위해 선교사들은 대중적인 전도집회를 전국 각지에서 전개한 반면 한국교인들은 날연보와 쪽복음을 통해 축호 전도라는 개인 전도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 원산동지방 장로사로 파송받아 지방 전도사업에 매진하면서 광성학교 교장으로도 시무하였다.

 

【1912년】

  • 한국어 학습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선교적인 목적으로 저술한 한국어 학습교재 Korean by clause-method를 간행하였다.

 

【1918년】

  • 남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였던 1918년에는 춘천지방 장로사(감리사)로 파송받았다.
  •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내려온 남궁억을 후원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전도단을 만들어 강원도 지역을 순회했는데, 이 전도단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일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남천우가 가입해 있었다. 남천우는 이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으며 스톡스의 후원으로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춘천지방 가평교회로 파송 받아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춘천군 신북면 사립 배영학교 교장을 맡았고, 춘천에서 잡지사를 차리고 1920년 1월 월간지 「세광(世光)」을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다.

 

【1921년】

  •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

 

【1922년】

  • 1922년 창립된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 에모리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때 대학생을 상대로 한 여름 캠프 강사였던 스톡스에게서 감화를 받아 유린 스미스(Euline Smith)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 안식년을 마치고 귀환한 후 1923~1925년 남감리회 조선연회 주일학교 총무로 시무하였다.

 

【1924년】

  • 1924년 태동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도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 성령사업에 냉담한 교회 현실을 우려하며 남감리회 조선연회에 제안하여 서울에서 전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중앙전도관(Seoul City Mission)을 설치하고, 1925년 9월 20일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 중앙전도관은 설립된 이후 1934년 12월 말까지 십여 년간 매일 저녁 전도집회를 개최한 결과 참석자가 145,459명, 결신자가 29,009명에 달했다. 나아가 서울지역 뿐만 아니라 서울 외곽지역까지도 영향을 미쳐 서울 원동교회ㆍ용산교회, 포천군 가계리교회, 고양군 신설리교회ㆍ성북동교회ㆍ답십리교회ㆍ공덕리교회 등지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졌다.

 

【1926년】

  • 철원지방 장로사로 파송받았다.

 

【1927년】

  • 경성지방 장로사로 파송받았다.

 

【1929년】

  • 1월부터 남감리회 주일학교부에서 스톡스가 발행인, 주일학교부 총무인 김준옥을 편집인으로 하여 「주일학교 선생(Sunday School Teacher)」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였다.
  • 1929년 5월부터 1930년 10월까지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

 

【1930년】

  • 원익상 목사가 파송된 경성지방 원동구역에 함께 파송되어 중앙전도관 관장 및 성경번역부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구약 개역작업에 보충되었으나 신약 개역작업에도 참여하였고, 재한복음주의연합공의회 산하 연합찬송가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1년】

  • 1931년 신정찬송가가 발행된 후 장감 사이에 논란이 발생하여 조선기독교연합공이회에서 개정편찬을 위해 장감 양교파 동수의 찬송가 편찬실행부를 조직할 때 감리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2년】

  •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합동한 이후에도 원익상 목사와 함께 원동구역에 속한 경성지방 목사로, 중앙전도관 관장으로 시무하는 가운데 1932년 선교비가 축소되는 상황 속에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무까지 겸임하였다. 일시적으로 「조선주일학교연합회보」를 발행하였다.

 

【1933년】

  • 연회 직후 선교회 용무차 귀국길에 올라 6월 6일 애즈베리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8월에 다시 내한하였다.

 

【1934년】

  • 9월 19~20일, 제11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회계로 선출되었다.
  • 그는 한국말 방언에도 익숙하고 한국말로 부흥회를 인도할 만큼 당시 활동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한국어에 능숙하며 한국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앙생활 중에서 체험한 것을 근거로 여러 교회에 다니며 설교한 메시지를 엮어 1934년 『도마련설교집』을 간행하였다.
  • 1934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2회 총회에서 총리원 전도국 외지전도부장으로 만주 선교사업에 대한 책임도 맡게 되었다.

 

【1935년】

  • 중앙전도관을 폐관한 직후인 1935년 1~4월에는 원익상 목사, 피터스 선교사 등과 함께 서울 근교 농촌선교사업에도 착수하여 여러 기도처를 세우기도 하였다.
  • 1925년 창간되었다가 1929년 페간되었던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기관지인 「주일학교신보」를 1935년 속간하기도 하였다.
  • 1935년 2월에는 피터스ㆍ변홍규ㆍ김우현ㆍ조신일ㆍ송태용 등 초교파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동인들이 경성부 필운동 17번지에 성화사라는 잡지사를 차리고 스톡스를 발행인, 정남수 목사를 편집인으로 하여 「성화(聖火, Holy Fire)」 잡지를 발행하였다.
  • 1935년 연회에서 철원집아 감리사로 다시 파송되어 철원읍제일교회 예배당 건축, 철원 역전에 제이교회 설립, 철원지방 성경학원 설립과 3천 원을 들여 기숙사를 건축하고, 김화읍에 석조예배당, 석교와 기타 10여 개의 교회를 건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한때 경남지방에 원익상 목사를 통해 선교회 자금으로 교회 기지를 매입하고 감리교 대현교회를 건축하여 예배와 전도를 시작한 지 8년이 지나 교인이 삼십여 명이 되었지만 원익상 목사가 철원지방으로 이임하면서 자신 명의의 예배당을 매각하여 교인들이 흩어졌고 이 일에 스톡스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구설수에 휩싸이기도 했다.

 

【1937년】

  • 5월 24일, 한국선교 30주년을 맞이해 철원읍제일교회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 5월 31일,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

 

【1938년】

  • 내한하여 경동지방에 파송되었다.

 

【1940년】

  • 미일 간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선교사들이 본국 귀환 명령으로 철수할 대 스톡스도 귀환하였다.

 

【1941년】

  • 쿠바선교사로 7년 동안 활동하였다.

 

【1950년】

  • 한국전쟁 당시에는 한국어에 능통하여 미군 촉탁으로 일본 도쿄에서 한국 포로를 위한 문헌을 발행하기도 했다. 스톡스는 ‘전도운동의 달인’이라고 불렸으며 전도ㆍ교육ㆍ문서 활동을 통해 한국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 5월, 부인 폴린이 76세로 별세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 매닝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이후 매기 스프롯(Maggie Davis Sprott, 1879~1968)과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1968년】

  • 7월 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Charlotte)에서 85세로 별세하여 매닝 공원묘지의 첫 번째 부인 옆에 안장되었다.
  • 11월, 두 번째 부인 매기도 별세하여 매닝 묘지에 묻혔다.

 

【기타】

  • 폴린과의 사이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 장남 존(John Lemacks II, 1908~2006)은 노스캐롤라이나대학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 차남 제임스(James Carlisle, 1910~1990)는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 삼남 맥(Mack Boyd, 1911~2012)은 에모리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사역하고 미국 연합감리교회 감독으로도 선출되었다.
  • 사남 찰스(Charles D., 도익서, 1915~1997)는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며 목원대학교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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