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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이윤영 [李允榮, 1890~1975]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백사(白史)

by [수호천사]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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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李允榮, 1890~1975]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백사(白史)

 

 

【1890년】

  • 8월 19일(음력), 평북 영변에서 이용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896년】

  • 7세부터 15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숭덕(崇德)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 숭덕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하였다.

 

【1908년】

  • 경성 중앙 YMCA 영어학교를 중퇴하였다.

 

【1909년】

  • 경성 공업전습소(훗날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토지측량법을 배우다가 중퇴하였다.

 

【1910년】

  • 3월, 평북 태천의 창명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 7월, 평양 숭실사범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1912년에 졸업하였다.

 

【1913년】

  • 9월, 평북 운산(雲山)의 북진교회 전도사와 광동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1916년】

  • 9월, 평안남도 순천의 신창교회 목사와 일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7년】

  • 6월 24일,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신창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 신창교회 목사로 재직중 3월 5일 신창면에서 독립선언강연회를 개최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1921년】

  • 황해도 연백군 백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1921~1927년).

 

【1922년】

  •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8회).

 

【1927년】

  • 신흥리교회 및 진남포지방에서 사역하였다.

 

【1929년】

  • 7월, 감리교회 감리사가 되었다.
  • 9월, 대한감리회 총리원 사회국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 부부교회 및 개성지방에서 사역하였다.

 

【1934년】

  • 9월 19~20일, 제11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35년】

  • 남산현교회 등지로 전임하였고 평양지방 감리사직을 겸직하였다.

 

【1936년】

  • 10월, 한일 기독교 감리회 통합예비회담인 동경의 가마쿠라회의[鎌倉會議]에 양주삼(梁柱三), 신흥우(申興雨) 등 7인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 “교회통합은 곧 조선 교회의 해산을 의미하므로 결코 찬성할 수 없다”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 정일형 일가와도 가까웠던 그는 12월 26일, 평양 정의여고 강당에서 정일형과 이태영의 결혼식에 주례를 섰다. 결혼식 축사는 안창호가 했다.
    정일형과는 인척관계였다. 이윤영의 부인 이마대는 정일형의 어머니의 6촌 여동생이었다. 따라서 정일형은 이윤영 처형의 아들, 즉 처조카뻘 되는 사이였다.
    이태영 역시 이윤영이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부임했을 때 평양 남산현교회의 성도였다. 이태영은 남산현교회에 다니며 주일학교 학생반 선생을 했으므로 이윤영 목사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윤영은 이태영을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측근이 되고, 정일형은 민주당계 정당에 가담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1938년】

  • 4월, 평양의 광성중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1939년】

  • 3월, 평양의 정의여자고등학교 요한성경학교와 성림여자중학교 설립에 참여,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파면처분을 받았다.

 

【1945년】

  • 8월,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평양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 11월,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1946년】

  • 1월, 조만식ㆍ김병연ㆍ박현숙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였다.
  • 2월, 밀사를 파견, 하지 중장과 이승만ㆍ김구에게 서북 조서에 관한 시국메시지를 밀송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1945년 9월부터 감리교 재건에 몰두, 평양중앙회관에서 감리교 재건 결성회를 가진 뒤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지에 1백여 교회를 재건시킴으로써 서부연회를 조직하였고 그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탁통치반대결의 밀서를 서울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자 1946년 2월 월남했다.
  • 10월, 이승만(李承晩)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던 민족통일총본부에 참여해 정경부장 및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월남 당시 함께 했던 한근조와 결별하게 되었다.]

 

【1947년】

  • 2월,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장, 이북인애국단체연합회 위원장, 한국민족대표단 이사 등을 맡았다.
  • 11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재건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 5월 10일, 제헌국회 총선거 때 서울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5월 31일, 국회개원식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였고, 이윤영 목사가 기도하였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하시믈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해 주시옵소서.…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이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 7월 22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남북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초대 국무총리로 국회인준을 요청했지만, 한국민주당계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 8월, 초대 내각 무임소 장관에 이어 제2대 사회부 장관 등을 지냈다.
  • 10월 6일, 경제원조회담 제1차 회의에 재무부장관 김도연, 기획처장관 이순탁, 법체처장 유진오 등과 함께 참여, 협상 도중 10월 12일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수산물과 구호물자 원조를 지원받는 한편 한국정부를 지도감독한다고 명시한 조항을 내정간섭 조항이라 하여 삭제를 요구, 성사시켰다.

 

【1950년】

  • 4월 3일, 이범석이 정치적인 이유로 국무총리를 사퇴하였다. 이승만은 3일 밤 원내 각파 대표들을 경무대로 초청하여 조병옥, 신흥우, 신성모를 총리로 추천하였으나 각파에서 난색을 보이자 다시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국회에 승인 요청을 했다. 그러나 4월 6일 국회 표결에서 재석 155명 중 찬성 68표, 반대 83표, 기권 3표로 부결되었다.

 

【1952년】

  • 1952년 다시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다.
  • 5월, 신흥대학장(현 경희대학교)에 취임했으며, 7월 반공통일연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부통령 출마를 위해 무임소 장관을 사직하고, 8월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10월 5일, 국무총리 장택상이 사임하자 이승만은 이윤영을 3번째로 후임 총리에 지명하여 국회에 인준요청을 해놓고 국회인준시까지의 총리 서리로 재무장관 백두진을 임명했으나 이윤영은 다시 부결되었다.

 

【1956년】

  • 5월, 다시 제4대 부통령선거에 출마해 낙선하였다. [당시 이기붕이 이윤영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사퇴하고 자신을 밀어달라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1958년】

  • 5월,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임되었다.

 

【1960년】

  • 1960년 4ㆍ19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활동을 하였다.

 

【1961년】

  • 5ㆍ16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1970년】

  •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다.

 

【1975년】

  • 10월 15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기타】

  • 피난학교 광성고등학교 재건에도 참여한 후 평생 이사로 봉사하였다.
  •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이윤영 선생은 참 점잖으신 분이었다. 이박사의 동지가 되어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걷다가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몰이해로 고생하시다 가셨으니 유감천만입니다.”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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