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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 [George Hinsdale Winn, 1882~1963]
위철치(魏喆治),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계(1929년), 제14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영문서기(1937년)
【1882년】
- 7월 14일,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金澤)에서 장로회 선교사 토머스 윈(Thomas Clay Winn, 1851~1931)과 엘리자 윌라드(Eliza Caroline Willard, 1853~1912)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할아버지 존(John Winn, 1814~1892)도 장로교 목사로 일리노이주에서 목회하였다.
- 아버지는 낙스대학을 졸업한 후 1877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일본에 부임하여 가나자와를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20년 넘게 사역하다가 러일전쟁(1904) 이후 일본 조차지가 된 중국 다롄(大連)으로 옮겨 일본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 일본에서 태어난 여동생 줄리아(Julia Winn, 1885~1961)도 낙스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월터 어드만(Walter C. Erdman, 1877~1848)과 결혼하고 1907년 한국선교사로 부임하였다.
- 동생 머를(Merle C. Winn, 1890~1928)도 1916년 일본선교사로 부임하였다가 중국에서 사역하였다.
- 1910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38년간 사역한 램프(Henry Willard Lampe, 1878~1971)는 이종사촌이었다.
【1905년】
-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미국 일리노이주 게일즈버그고등학교를 거쳐 1905년 로스앤젤레스 옥시덴탈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잠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8년】
-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네브래스카 오마하신학교에 입학, 1908년 졸업하였다.
【1909년】
- 미국 북장로회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909년 1월 16일 내한하였다.
- 처음엔 대구선교부에 파송될 예정이었지만 1908년 12월 부산에서 사역하다 순직한 사이드보텀 후임으로 임지가 부산으로 바뀌었다. 당시 부산에는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가 공동으로 선교하고 있었다. 북장로회 선교사로는 어빈 부부와 스미스 부부, 여선교사 도리스 등이 사역하고 있었고 1909년 9월 매코믹신학교 출신 로저 윈(Rodger E. Winn, 인노절) 부부가 합류하였다(로저 윈과 조지 윈은 친척관계가 아니다).
【1910년】
- 부산에서 어학공부를 시작하였고 1910년 7월 그보다 1년 앞서 내한해서 대구선교부에서 사역하고 있던 블랜치 에씩(Blanche Lillian Essick, 1882~1955)과 대구에서 미국영사 입회하에 결혼하였다.
- 1910년 9월,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는 부산 외에 밀양에 새 선교부를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로저 윈과 조지 윈 부부를 파송하였다. 이에 갓 결혼한 윈 부부가 밀양에 들어가 선교부지를 구입하고 양관 사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1911년】
- 부산과 경남지역에 한센병 환자 병원을 설립하기로 한 연례회 결정에 따라 1911년 1월 어빈, 호주장로회 엥겔과 함께 ‘나병위원회’를 조직하고 서기 겸 회계로 병원 설립 실무를 맡았다.
- 1월, 중국 다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 대구와 부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딸과 아들을 만나고 돌아갔으며 아버지는 그해 9월 평양에서 개최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에도 참석해 후배 선교사들을 격려하였다.
- 그해 7월, 부산 감만동에 한국 최초의 한센병 환자 치료시설로 부산나병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후에 상애원(相愛園)으로 발전하였다.
- 4월, 부산선교부의 최고참이던 어빈이 선교사직을 사임하면서 그가 맡았던 부산 사역도 맡게 되었다.
【1912년】
- 10월, 다롄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13년】
- 장례식을 치른 아버지는 1913년 1월 다시 대구와 부산을 방문해서 남매를 만나고 돌아갔다.
- 1911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는 격론 끝에 밀양선교부 개설 작업을 중단하고 그 무렵 호주장로회에서 제안해 온 부산과 경남지역 선교구역 분할협정에 나설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13년 북장로회는 부산과 경남지역 선교를 호주장로회에 넘겨주고 대신 만주지역 선교를 개척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윈 부부는 밀양선교부를 호주장로회에 넘겨주고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 그동안 김해ㆍ양산ㆍ갈산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하였고 김해 시례교회와 부산 조도교회는 그의 전도로 설립된 교회다.
【1914년】
- 8월, 아버지가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선교회 연례회에 일본선교회 대표로 참석해서 만주선교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였다.
- 1914년 연례회에서 윈 부부의 임지는 대구선교부로 바뀌어 여동생, 매형과 함께 사역하였다.경술국치(1910년) 이후 경상북도 도청소재지가 된 대구에는 일본인 관공서ㆍ시설ㆍ기관들이 급증하였다.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윈은 교회와 선교부 일로 일본 관청과 교섭하는 일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는 동료 선교사들의 일본어 학습교재 Fifty Helps in the Study of Japanese Language(1914)를 출간하였다.
- 대구선교부로 옮긴 후 경북 동북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윈이 설립하거나 담임했던 교회로는 대구 칠성정(칠성동)교회와 영덕군 삼사교회, 연일군 하옥교회ㆍ가사리교회ㆍ상옥교회ㆍ정자교회ㆍ생지교회, 영천군 치일교회ㆍ안천교회, 의성군 대리교회ㆍ정자교회ㆍ수계교회, 경주군 옥산교회, 청송군 지소동교회 등이 있다. 이들 지역을 순회하면서 부산과는 다른 기질의 ‘경상도 사람’들을 만났다.
【1916년】
- 9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경상도 기질(Kyung Sang Characteristics)”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전통적인 양반의식을 바탕으로 서양과 기독교에 배타적이었던 경상북도 지역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 “우리는 그동안 양반계층을 비판해 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참 교인이 된 양반들은 겸손한 자세로 무식한 농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성경을 공부하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다. 그들은 잘 모르는 교인들이 성경 찾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또한 교회 일을 논의하면서 목사의 결정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눌한 한국말로 하는 서양인들의 지시를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1917년】
- 1917-1918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직후 건강 악화로 1년간 고생하였다.
【1919년】
- 3ㆍ1 독립운동 때는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수색하려는 일본 관헌들과 타협하는 일을 맡았고 일본 경찰서를 찾아가 체포되거나 수감된 목회자와 교사,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개정 사립학교 규칙」으로 폐쇄 위기에 처한 대구 계성학교 교장을 맡아 총독부 인가를 받아냈고 경북지역 70여 교회를 순회하며 관리하였다.
- 6월, 선교회 결정으로 인력이 부족한 평북 강계선교부로 가서 1년간 사역하였다. 평안북도 북부 산악지역을 자전거로 순회하며 교인들을 만나고 주민들에게 전도한 후 “우리는 광범위하게 씨를 뿌렸다. 많은 날이 지나고 우리는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30배, 어떤 곳에서는 60배, 또 어떤 곳에서는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기를 간구한다”고 보고하였다. 대구로 돌아온 후 지방 순회에 주력하였다.
【1923년】
- 1923년 봄에는 울릉도까지 가서 하나밖에 없는 교회 교인들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1925년】
- 1925-1926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귀환하는 여행 중 고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스웨덴 왕자 부부를 만나 그의 방한을 주선하고 경주 답사와 대구선교부 방문을 안내하였다.
【1926년】
- 1926년 연례회에서 윈 부부의 임지가 서울선교부로 바뀌었다. 이후 서울 연지동선교부에 거하며 한강을 따라 김포에서 양평을 오가며 경기도 지방 40여 교회를 맡아 순회 여행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지방 순회를 가지 않을 때는 세브란스병원에 나가 전도하였다.
【1929년】
- 9월 13일,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회계에 선임되었다.
【1931년】
-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 선교회 의장으로 선임되어 그해 1월 일본 가나자와에서 별세한 아버지 토머스 윈 박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다롄에서 사역한 하버지는 1923년 은퇴후 일본으로 가던 길에 ‘요한3서 4절’ 말씀을 표지 안쪽에 적은 성경책을 아들에게 주고 갔다.
【1933년】
- 봄, 강계선교부 부탁을 받고 올라가 사경회를 인도한 후 북부지역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 5월 22일,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경기노회(노회장 차상진) 주최로 ‘위철치 목사부부 선교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윈은 참석자들에게 “자기에게 기념품 주는 것을 원치 않고 그 돈으로 전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1934년】
- 기념식 후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4년 9월 돌아왔다.
- 귀환 후 경기노회 동부시찰을 담당하였고 찬송가 개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 6월, 윈 부부는 서울 연지동선교부를 떠나 경기도 양평읍 양량리(양근리)언덕 양평교회 부근에 사택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그 결과 전에는 1년에 두 차례 시간을 내서 지방 교회들을 순방하였는데 이제는 필요할 때마다 교회를 방문하여 목회자와 교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937년】
- 대구에서 태어난 아들 폴(Paul)이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로는 4대, 선교사로는 3대가 되어 일본선교사로 부임하였다.
- 12월 7일, 제14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영문서기에 선임되었다.
【1938년】
- 한국교회에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38년 이후 선교상황도 악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경기노회 지역 교회들을 순방하며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1939년】
- 1939년 김포지방을 순회한 후 “13년 전만 해도 이 지방에 교회가 3개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9개로 늘어났다. 그 중엔 약한 교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약한 교회를 불쌍히 여겨 강하게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모든 교회가 우리 주님과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 교회 공동체로서 그 능력을 발휘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할 것이다”고 기록하였다.
【1940년】
- 1940년 양평군 지평교회 교인들이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위철치기념예배당’이라 명명하였다. 헌당식에 참석한 윈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예배당 건축을 이뤄낸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1941년】
- 11월, 대부분 선교사들이 미국 정부가 보내온 수송선으로 귀국했을 때 일본어가 틍통했던 윈은 선교부 재산관리를 위해 서울에 남았다. 그때부터 연지동선교부로 다시 옮겨 경기노회 전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다.
【1941년】
- 미일 외교관계가 단절된 1941년 7월 중국 상하이를 거쳐 귀국하였다.
【1946년】
- 일본 패전 후, 서울로 돌아와 경기노회 교회 재건 및 복구작업을 도왔다.
【1948년】
-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은퇴하고 귀국하였다.
【1963년】
- 귀국 후 애리조나 투산에 거주하다가 1963년 6월 18일 별세하였다.
- 8년 앞서 별세한 부인의 묘소가 있는 뉴욕 브롱크스의 우드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윈 부부가 살았던 ‘양평 사택’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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