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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전]/[아]

이자익 [李自益, 1882~1961] 장로교 목사, 장로교 총회장(1947년 제33회, 1948년 제34회), 금산교회, 대전신학교

by [수호천사]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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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익 [李自益, 1882~1961]

장로교 목사, 장로교 총회장(1947년 제33, 1948년 제34), 금산교회, 대전신학교

 

【1882년】

  • 남해도(南海島)에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1890년】

  •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1893년】

  •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1897년】

  • 17세가 되던 해 고향을 떠나 행상의 길을 나섰다. 남쪽에서부터 시작하였던 행상의 길을 북상하면서 전북까지 오게 되었다. 전북 남원에서 남원의 거부 조덕삼(1866~1919)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게 되었다.

 

【1904년】

  • 테이트(Rev. L. B. Tate, 최의덕)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때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그를 자신의 조사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법을 많이 아는 선교사였기 때문에 이자익도 테이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총회에서나 노회에서는 그를 법통으로 불렀고 어려운 일이 논란될 때마다 그를 찾아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의안을 처리했다고 한다.

 

【1905년】

  • 10월 11일, 거부 조덕삼과 함께 테이트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7년】

  • 금산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당시 조덕삼은 장로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고 더욱 교회를 잘 섬겼으며 후에 금산교회 2대 장로가 되었다.

 

【1909년】

  • 장로가 된 이자익은 1909년 예수교장로회 대리회 제3회 정기노회가 평양신학교에서 개최될 때 전라북도대리회 대표로 황운섭ㆍ최태국ㆍ김필수ㆍ최홍서ㆍ서영선과 같이 한국측 장로로 출석하였다.

 

【1910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흥덕과 남원지방 순회조사로 자리를 옮기어 목회를 하였다.

 

【1915년】

  •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5년만에 졸업하였다.
  • 8월에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그는 목사가 된 후 김제군 구봉리교회와 팟정리교회의 두 교회 전도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역시 이 지역도 테이트 선교사 관할구역이었기에 노회에서는 테이트의 동사목사로 허락을 하였다.

 

【1918년】

  • 전주 서남지방을 관장하게 됨으로 그의 활동무대는 더 광범위하게 되었다. 구봉리교회를 비롯 고부지방, 고창지방, 정읍지방 일부를 떠맡아 일을 하였다.

 

【1919년】

  • 제2대 전북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4년】

  •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모인 제13회 총회에서 임원도 거치지 않고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26년】

  • 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에서는 그를 경상남도 거창 지방 협동선교사로 초빙을 하여 거창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강연회를 하고 성례전도 베풀며 당회장으로서 개교회를 살피게 하였다. 한번 집을 나서면 3개월만에 집에 돌아오는 등 1년에 4번만 가족과 상면하고 그 외는 개교회의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 제22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여 연 2회 노회장을 역임토록 하였다.
  • 어려운 거창 목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전북노회로 옮기어 역시 구봉리교회를 중심해서 전북 서남지방에 소속된 교회를 돌보았다.
  • 9월 20일, 경성 정동예배당에서 모인 제4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 경남노회장에 추대되었다.

 

【1937년】

  • 김제군 금구면 원평리교회로 숙소를 정하고 화호리교회, 신덕리교회, 수탕리교회를 시무하였다.

 

【1938년】

  • 신사참배를 전북노회에서 결의한 이후 노회 때마다 출석을 회피하고 시골에 파묻혀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총회에 이자익 목사는 불참하였다고 한다.

 

【1947년】

  • 제33회 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 제34회 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 대전성경학교 교장의 직책을 맡고 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보이어(E. T. Boyer, 보이열), 린턴(W. A. Linton, 인톤) 선교사를 도우면서 성경학교를 이끌어 갔었다.

 

【1950년】

  • 한국전쟁으로 학교를 더 계속 못하고 성경학생 4, 5명을 데리고 김제군 원평교회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몇일이 안되어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내무서에 몇일간 구금하였다가 풀려났다.
  • 9ㆍ28 수복과 함께 이자익 목사도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흩어져 있던 성경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자신이 거처하는 사택에서 문을 열었다.
  • 오정리교회로 옮겼다.

 

【1952년】

  • 대전지역에서 장로교회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대전노회가 있어야 함을 주장하여, 총회로 허락을 받고 소집책이 되었다. 초대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 대전신학교가 문을 열자 초대 교장이 되었다. 이후 양화석 목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1년】

  • 건강 때문에 더 이상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모든 일은 후진들에게 맡기고 전북 김제군 금구면 원평리에 사는 셋째 아들 이성환에게 가서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 그의 장남인 이봉환(李奉煥)은 교육계에 오래 종사하였으며, 서울 용산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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